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사용하는 단어를 꺼내며 친구와 대화한 적이 있었다. 순정. 옛날에는 하이틴 로맨스 만화를 순정 만화라고 부르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에도 그런 장르가 있는지 모르겠다. 순정 영화, 순정 소설, 순정이 아예 장르였던 시절. 나는 친구에게, 걔가 아직도 순정 만화 주인공처럼 지내야 하겠냐며 대답하던 참이었다. 내가 말해놓고도 순간 낯설어서 잠시 침묵했다. 순정이라는 단어를 너무 오랜만에 발음해 본 탓이었다. 친구도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저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하다며 이내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그는 그저 학교 운동장에서 몇 번 농구나 하던 사이였다. 그는 운동신경이 좋아서 나는 번번이 그의 어깨에 몸이 밀리며 공을 뺏겼다. 이름과 얼굴만 알면서 그저 농구할 때나 잠깐 보는 사이. 나중에 그가 체대에 진학했고 군대에 가기 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스키장 안전요원 일을 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장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던 동갑 여자 친구가 있었다. 동네가 오밀조밀하던 탓에, 그도 그녀도 다 이름과 얼굴은 알던 사이였다. 장례식장에서 내내 펑펑 울고 있었다던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당시 그와 그녀의 싸이월드에 들어가 본 기억이 있다. 그의 미니홈피는 멈춰 있었고, 그녀의 미니홈피는 모든 글이 삭제된 채 그와 찍었던 사진 한 장과 커플 배경음악만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기억으로는 싸이월드가 망하기 직전까지 그녀의 페이지는 어떤 글도 올라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페이지 상태가 그녀가 그의 부재를 기록한 것 같아서 문득 찾아보곤 했다. 그와 그녀의 일은 너무 이른 나이에 벌어진 비극이라 동네에선 오래도록 회자됐다. 그랬던 그녀가 몇 년 전 결혼했다는 소식이었다. 동창이나 동네 친구는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고, 그와 그녀를 알던 모두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서른 후반이 넘은 지금에서는 그게 뭐 큰 별일인가 싶었다. 이제는 살아서도 서로 죽이지 못해 헤어지는 경우가 주변에 흔해진 마당에. 삶을 살아가니 다행인 일 아닌가. 그렇다고 살아가지 않으면 또 어찌할 텐가.
아마도 동네 모두가 그와 그녀의 연애를 아름답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비극을 아름답게 여기는 일에서 어떤 죄책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의 우린 순정한 것들을 아름답게 여기며 순정해지고 싶었으니까. 새삼스레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제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내가 지나온 그 모든 연애가. 분명 체중이 크게 줄어들 정도로 진통했던 그 이별들을 오랜 시간 동력 삼아서 여기까지 무언가 적으며 살아온 셈일 텐데, 그들의 얼굴이나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했다. 누군가 그랬던가. 이별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가 비로소 진정으로 작별한 것이라고. 오래전 영화를 뒤적거렸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때의 내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까. 순정은, 얼마만큼 내게서 뒤처진 단어인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사랑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영화 <국화꽃 향기>)
영화 <국화꽃 향기> 스틸컷
희재가 인하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보낸 사연의 첫 문장이다. 소설이 원작인데, 영화는 인물들 이름부터 다르게 각색되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한국의 정통 신파 멜로극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여자 희재와 그런 희재를 대학 동아리 시절부터 변치 않고 사랑해 온 남자 인하의 이야기다.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찾아보게 된 건, 어릴 적 처음으로 내게 결혼을 생각하게 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미술을 전공해서 종이 공예를 하며 처음엔 학교 선배와 결혼했지만, 교통사고로 남편과 친정 부모를 잃고 식물처럼 살아가던 희재에게 라디오 PD를 하던 인하는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가간다. 희재와 인하가 재혼하여 보여주는 신혼의 모습이 어렸던 내게 가장 이상적인 결혼의 장면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더군다나 극 중 희재 역으로 분했던 배우 장진영이 실제로 영화 개봉 6년 뒤, 희재와 같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국화꽃 향기>는 한국 영화에서 가장 아픈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서사와 연기가 정직하고 단순해서 너무 예전의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때의 나는 작품을 보며 사랑은 때로 내가 용서할 수 없는 나를 대신 용서해 주기도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해도, 그의 용서로 간신히 나를 용서하는 일. 물론 살아오면서 나는 나를 용서하는 일도, 상대를 용서하는 일도 잘하지 못했다. 희재는 임신 검진을 받다가 위암이 함께 자라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아이를 위해 치료를 포기하고, 희재가 떠난 후 인하는 남은 아이에게 희재가 남긴 한지로 만든 그림책을 읽어주며 영화는 암전한다. 작품에서는 내내 책과 종이가 자주 등장한다. 희재와 인하가 서로를 처음 만났던 동아리도 헌책방을 탐구하는 일종의 독서 동아리이고, 대학을 졸업한 동아리 선배도 종이 일을 한다. 희재 역시 한지로 자신의 도록을 출판하고 싶어 하는 미술작가이고, 책과 종이는 계속해서 작품 내에 중요한 매개물로 등장한다. 편지의 시대인 셈이다. 20년 전 영화이기도 하고 작중 초반 배경은 거기서도 더 전을 다루고 있으니, 아직은 문명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정보와 지식은 종이에 적어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을 때이다. 그래, 사랑하면 기록하고 싶어진다. 기록해서 남겨두고 싶어진다. 인하가 딸에게 희재가 남긴 그림책을 읽어주었을 때, 인하는 깨달았을 것이다. 희재가 자신에게 딸이라는 생명을 자신이 당신을 사랑했노라 그림처럼 남겨두었다는 것을.
“우리 한 달만 떨어져 있어 보자.” “헤어지자는 말이야?” “그럴 수 있지.” (영화 <봄날은 간다>)
영화 <봄날은 간다> 스틸컷
<봄날은 간다>가 남긴 희대의 명대사는 아마 “라면 먹고 갈래요?”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일 것이다. 영화는 몰라도 저 대사는 아는 사람도 많으니. 이미 한 번 이혼을 경험해서 사랑은 두렵고 연애는 필요한 여자 은수와 그런 은수에게 깊게 빠져버린 서툰 남자 상우의 이야기다.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내게 은수는 그저 자신에게 순정을 바치는 남자를 이용하는 나쁜 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시차를 벌려 여러 번 봐야 한다. <봄날은 간다>가 그렇다. 작품을 다시 보며, 나는 내내 상우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더 정확하게는, 과거의 나를 한 대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고 말았다. 은수는 내심 결혼을 바라는 상우에게 부담을 느낀다. 둘의 연애는 균열이 생기고,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한다. 은수는 상우와 함께 침대에 누워 한 달만 떨어져 있어 보자고 한다. 상우는 헤어지자는 말이냐고 묻는다. 은수는 엎드려서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럴 수 있지. 고백건대, ‘그렇다’와 ‘그럴 수 있지’의 차이를 알게 된 건 나도 최근의 일이다. 은수와 상우의 연애가 엇갈리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저 순간이다. 먼저 좀 사랑해달라는 말을 끝내 헤어지자는 말로밖에 못 하는 은수에게 상우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라는 물음은 처음 볼 땐 상우의 입장에서 아픈 원망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 장면의 중요한 핵심은 상우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시 벙찌는 은수의 모습이다. 저 남자를 대체 어찌해야 하나. 상우가 거리 조절을 하지 못할 때마다 이별을 무기이자 방패로 삼는 은수의 방식이 건강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끝내 상우는 은수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다. 은수의 소리 없는 절망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둘의 끝은 예정되어 있다. 상우에게 은수는 언제나 자신을 밀어내서 힘들게 했다가 제멋대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어리고 서툴 땐 언제나 그 부분이 문제다. 상처가 너무 아프다는 것. 아직 굳은살이 모자란다는 것. 관계에서 모든 문제는 결국 내가 내 상처만 감싸 쥐고 끙끙거릴 때 발생했다. 상대가 흘리는 피가 그저 닦아내면 그만인 땀이거나 눈물인 줄로만 알았을 때. 착하게 굴겠다고 약속해 놓고 상처받으면 곧바로 미워하고야 마는, 그런 서툰 시절.
<국화꽃 향기>가 사랑을 종이에 적었다면, <봄날은 간다>는 소리로 녹음한다. 극 중 상우는 음향 엔지니어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은수는 상우와 함께 소리를 채집하러 다닌다. 상우는 고요하게 은수가 사용할 소리를 녹음해 준다. 대숲의 서걱거리는 봄바람 소리, 절간에 내리는 눈 쌓이는 소리와 겨울이 흔드는 처마 밑 풍경의 딸랑거리는 종소리, 그리고 여름이 흘려보내는 시냇물의 소리까지. 거기엔 은수의 발자국이 찍히는 소리와 은수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도 함께 녹음되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상우가 홀로 은수가 없는 봄의 푸른 들판으로 나가서 풀잎을 뒤섞는 바람 소리를 새로 녹음하는 장면이다. 소리를 덮어쓰는 것이다. 우는 듯, 웃는 듯이. 아마도 상우가 녹음하고 간직해야 했을 소리는 둘이 연애를 시작한 초반, 운전 연습을 시켜주다가 내려서 함께 길가 저편 야트막한 언덕에 놓인 봉분 두 개를 보며 했던 은수의 말일 것이다. “상우 씨,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 언제나 다 끝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앞이나 뒤가 아닌 옆에 서 있어야 한다는 걸.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영화 <헤어질 결심>)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앞선 두 작품과는 다르게, <헤어질 결심>은 사랑해서 기록한 것이 아닌, 기록하다가 사랑하게 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꼼꼼하고 집요한 형사인 해준이 서래를 피의자로 특정하고 그녀를 잠복하여 추적하면서 서래에게 빠져들고 만다. 특별한 이유랄 것도 없다. 나중에 해준이 직접 자신이 왜 서래를 좋아하는 줄 아냐며 하는 말은 그녀의 자세가 ‘꼿꼿해서’였다. 긴장하지 않고서도 자세가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꼿꼿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의 사망을 추적하며 해준이 서래에게 빠져드는 부분이 전반부라면,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이 사망하여 서래를 수사하게 되는 시점이 후반부다. 전반에는 해준이 서래를 사랑하다가 떠나고, 후반에는 서래가 해준을 사랑해서 떠난다. 사진을 찍고, 스마트 워치로 바로바로 녹음하고, 사건과 관련된 모든 숫자나 단서는 빠짐없이 기억해 두는 해준은 서래의 습관이나 행동을 모사하게 된다. 늘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은 오직 서래의 곁에서만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해준은 서래에게 서래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고 얘기하지만, 닮아서 사랑하게 됐는지 사랑해서 닮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서래를 사랑하게 된 해준은 처음으로 사건에 실패하며, 결국엔 자신이 서래가 기도수 살인을 은폐하는 데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서래에게 자신이 여자에 미쳐서 붕괴되었다며 서래를 떠난다. 해준은 서래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담긴 핸드폰을 깊은 바다에 버리라고 한다. 그 순간 서래는 깨닫는다. 이것은 자신과 해준의 기록이자, 해준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서래는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서래의 두 번째 살인은 그 비밀을 알고 해준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임호준을 막기 위해 발생한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해준이 서래에게 대체 왜 그랬냐고 말하자, 서래는 답한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기록을 버리려면 사랑을 버려야 하고, 사랑을 버리려면 자신을 버려야 했던 서래는 스스로를 깊은 바다에 버리기로 한다.
트뤼포가 히치콕의 영화를 보고 남겼다고 전해지는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이라는 말이 너무나 걸맞은 <헤어질 결심>은 반드시 두 번을 봐야 한다. 처음에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치해 둔 착시로 서래의 행동이 마치 범행을 은폐하거나 해준을 해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결말을 알고 다시 보게 되면, 서래의 모든 행동이 해준을 연모하여 일으키는 행동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종종 사랑은 쳐들어오는 적군 같은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사랑은 자주, 오랜 숙적 같다. 그것은 도처에 있다. 늘 매복하며 호시탐탐 내가 방심하기를 기다린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으며, 내가 세운 울타리를 제멋대로 가볍게 뛰어넘어 들어오거나, 내가 스스로 목책을 무너뜨리게 한다.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통제할 수 있는 사랑이란 건 그것이 진정 사랑이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촉발되고 시작하는 단계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파괴와 모종의 무질서를 동반한다. 내가 아닌 것들이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큰 자리를 차지하며 영혼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내가 감지하고 인식하는 모든 시공간에 사랑을 일으킨 대상이 간섭한다. 내가 세운 경계와 질서는 처참하게 박살 난다. 부서지지 않고 사랑해 본 적이 있나. 그게 내가 되었든, 당신이 되었든 간에.
다만, 그럼에도 사랑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고, 간신히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생활의 행위만을 통제하며 살아갈 뿐이다. 내 사랑이 주먹질이 되지 않도록. 나도 당신도 너무 오래 아프지 않도록. 그것을 배우느라 얼마만큼의 시간을 앞으로도 더 길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우리는 기꺼이 사랑에 인생을 탕진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을. 봄날은 가야만 하고, 다시 와야만 한다. 그저 봄이 왔을 때, 봄이 봄이었음을 늦지 않게 깨닫고 충분히 고마워하며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연둣빛을 기다려보자. 앞으로의 나도, 지난날의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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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우리 없이 빛난 아침』과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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