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삭의 중화권 대중문화와 문학
[김이삭 칼럼] 극장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 예스24
극장을 문화실험실로 삼는 타이완 '극단 군(阮)'.
글: 김이삭 사진: 김이삭
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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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쯤 충청남도로 이사를 왔다. 서울공화국이라고 불리는 한국에서 충청남도 모처의 면 거주자로 살아가려니 문화생활만큼 아쉬운 것도 없더라. 특히 특정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생활이 유독 아쉬운데 그중에서도 연극은 국립극단의 온라인 극장에 올라오거나 지방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상업적인 작품이 아닌 이상 볼 수가 없다. 상경 외에는 답이 없달까.

 

전통 연희를 제외한 공연 예술이 수도에 집중된 건 한국만이 아니라서 타이완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타이완 극단 군(阮劇團, Our Theatre)1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큰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이(嘉義, 타이완 서남부에 있으며 인구는 27만 명 정도) 최초의 ‘현대극’ 극단인 극단 군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2003년에 문화 경작이라는 포부를 안고 환향한 18살 청년이 세운 극단이다2. 지금은 타이완의 대표적 극단 중 하나이자 자이의 문화적 명물이 되었는데, 2024년에는 타이완 국가 문화 예술 기금회로부터 타이완 톱(TAIWAN TOP) 예술 단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역 민속 문화와 현대 극장의 결합, 타이완어로 각색해서 올리는 라이센스 공연, 적극적인 오리지널 공연 제작, 지역의 문화 예술 교육에 힘쓰는 등 여러 노력들이 인정을 받은 덕분이다.


극단 군 사무실 안 상패들(왼쪽), 극단 군 창고(오른쪽)

 

그렇다면 지난 20여 년 동안 극단 군은 자이에서 어떻게 자라났고,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가오량주 공장에 구축한 문화 예술 기지

 

지난달 타이완 문학기지의 상주 작가로 있을 때 잠시 시간을 내서 자이에 갔다 왔다. 극단 군의 모습을 직접 가서 두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타이베이 기차역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한 시간 반을 가고, 고속철도 역에서 내려서는 택시를 타고 30분은 더 가야 나오는 자이 기차역. 그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게 극단 군의 보금자리였다. 정확히는 자이 시립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자이 문화창의산업원구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건축된 가오량주 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자이 문화창의산업원구는 타이베이에 있는 송산 문화창의공원이나 화산 1914와 비슷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조금 다른 곳이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 상점이 즐비한 곳이라기보다는, 문화 예술 공작실이 주를 이룬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작실이 바로 극단 군일 것이다. 극단 군의 사무실과 창고 그리고 연습실이자 공연장인 신(新)자이좌3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 

 

자이 문화창의산업원구 입구

몇 주 전에 예고하고 가기는 했지만, 워낙 바쁜 시기라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극단 군의 예술총감인 왕자오첸과 부예술총감인 우밍룬, 부극단장인 장쥔카이, 단원인 펑루메이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자이 문화창의산업원구를 함께 돌아보며 상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극단 군의 역량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극단 군은 이곳에 자리만 잡은 게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영입하고, 이런저런 협업을 진행하며 문화 예술 보금자리를 꾸려오고 있었다. 특히 예술총감 왕자오첸의 설득으로 이곳에 둥지를 튼 이웃이 둘이나 되었는데, 핸드드립 전문 카페인 국왕호접 카페와 용기 서점이 그러했다.

 

*연습실이자 극장인 신(新)자이좌와 맞닿아 있는 용기 서점은 언제든 극단 군과 공간적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창문을 통해 신(新)자이좌 내부를, 즉 연습과 상연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곳으로 넘어가 북토크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신(新)자이좌로 통하는 문이 있는 곳에 따로 꾸려진 희곡 책장과 서점 카운터에서 사 마실 수 있는 신(新)자이 맥주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신(新)자이 맥주는 극단 군이 로컬 맥주 업체와 협력해 만든 맥주다.4

 

용기서점 내부(왼쪽), 신자이 맥주를 마시는 김이삭 작가와 왕자오첸 예술 총감(오른쪽)

 

 

타이베이도서전에서 처음 만난 연극인

 

용기 서점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극단 군이 공연계와 문학계를 어떻게 이어주고 함께 협업하는지에 대해, 조금은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좀 더 이야기해 보자. 극단 군은 리앙 작가, 천쓰홍 작가 등 여러 소설가의 작품들을 무대화했으며, 무대화하고 있다. 공연계와 문학계의 협업은, 소설이 무대 언어로 탈바꿈해 상연되는 건 사실 한국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기에 딱히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 군에 대한 내 첫인상은, 정확히는 왕자오첸 예술총감에 대한 내 첫인상은 신선함이었다. 과장을 좀 해본다면 신기함 그 자체였달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타이베이도서전에서였다.5 모 출판사 부스를 돌며 책을 구경하던 내가 왕자오첸의 얼굴을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는데(그날 도서전 주변에서 미팅하기로 미리 약속을 잡아놓기는 했다.) 왕자오첸이 지나가던 사람들을 한 명씩 부르더니 내게 소개를 해주는 게 아닌가. 정말 그랬다. 이리 와보라는 손짓에 지나가는 행인 1, 2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정말로 오더니(!) 작은 원을 이루면서 대화에 참여했다. (알고 보니 다들 소설가이거나 편집자였다.) 실로 문학계의 마당발이었다. 이때 나는 진심으로 왕자오첸이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궁금해졌다……. 


극단 군의 공연 『귀신들의 땅』 하이라이트 영상


 *극단 군은 장자샹 작가의 뮤직비디오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좡카뤈이라는 밴드의 리더이기도 한 장자샹은 소설과 음악 창작을 병행하는데 소설 한 챕터가 음악 한 곡인 셈이다. 소설 『밤의 신이 내려온다』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상금을 받자 장자샹 작가는 그 상금으로 동명앨범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는데, 이 여섯 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배우들이 다 극단 군 출신이다. 특히 <꽃 거리> 뮤직비디오에서는 극단 군의 간판 배우인 위핀지에가 주연을 맡았다.


<꽃 거리> 뮤직비디오

 


극장을 매개로 본토와 문화 그리고 동시대 의제를 잇는 연극

 

그렇다면 극단 군의 본업인 연극은 어떨까? 극단 군은 지난 22년 동안 총 23의 도시에서 1,127회 공연을 했고, 누적 관람객 수가 18만 8,855명에 달한다.6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극단이기에 레퍼토리도 상당하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아보자면 <십전>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 타이완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극단 군의 부예술총감인, 그와 동시에 극단 군의 간판 극작가이기도 한 우밍룬의 대표작이다. 타이완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는 청나라 시기 타이완의 5대 기이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와 오늘날을 배경으로 재해석해 만들었는데, 곳곳에서 타이완 본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연극 <십전> 홍보 영상

※트리거 워닝 - 본 영상에는 자살, 살해 등 여러 죽음을 연출한 장면이 있습니다.


 

극작가를 양성하는 희곡 농장에서 무대화를 돕는 DQ 창작 프로젝트까지

 

극단 군은 2013년부터 희곡 농장 프로젝트도 진행해 오고 있다. 매년 극작가를 3명씩 선발해 자료 조사, 희곡 개발, 낭독 쇼케이스, 희곡집 출간에 이르기까지 3년간 함께 작업하는 프로젝트인데 소재나 장르에 제한이 전혀 없다. (실제로도 출간된 작품의 절반 정도는 뮤지컬 대본이다.) 오늘날 타이완 공연계를 이끌어가는 많은 극작가들이 이 프로젝트 출신이라고 한다. 부예술총감이자 간판 작가인 우밍룬 작가도 희곡 농장 제1기 출신이다.

 

희곡 농장이 극작가를 양성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면, DQ 창작 프로젝트는 제작 발표에 포커스를 둔 프로젝트이다. 극단 군은 인력, 경비, 공간에 이르기까지 능력이 닿는 한에서 물심양면 돕고, 선정자는 30분짜리 공연을 유료 판매 방식으로 공개한다. 프로젝트명인 DQ는 규정되지 않은 약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극단 군은 DQ가 (30살 이상의) Dis Qualified에서부터 Drama Queen, Dancing Queen, Drag Queen, 심지어는 Dragon Quest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며 따로 참가 대상이나 주제, 소재,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2022년 DQ 창작 프로젝트 초안 소개 영상. 이때는 30세 미만이라는 나이 제한이 있었다.

 


연극이라는 매개, 타이완어와 아동 예술 교육

 

타이완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는 타이완어가 아닌 화어이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칼럼 ‘모어로 글을 쓸 수 없다는 건’을 참고하자.) 북부로 올라갈수록, 나이대가 젊을수록 타이완어를 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연극의 향유층은 주로 청년이다. 그것도 대도시에 사는 청년. 타이완어를 할 줄 모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또한 이는 관객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극을 쓰는 극작가나 무대에 오르는 배우 또한 타이완어를 모르니까. 때문에 타이완어 연극을 올린다는 건 상업성이나 대중성을 좇지 않는, 오히려 이에 반(反)하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화어’라는 헤게모니에 맞서는 저항과도 같달 까. 정식 단원이 수십 명에 달하는 민간 극단이라면 절대로 택하지 않는, 아주 위험한 방향일 것이다.

 

그러나 타이완어는 극단 군 레퍼토리 공연에 있어서 핵심 특징 중 하나이다. (심지어 공연 소개 글을 보면 타이완어 비율 100%, 80% 등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공되기도 한다.) 타이완 현대 연극 중에서 타이완어 공연을 찾기 어렵다면, 반대로 극단 군 공연 중에서는 타이완어가 아닌 걸 찾기가 더 어렵달까. 그러나 상당수의 관객이 타이완어를 모르는 것도 사실이기에 극단 군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공연에서는 화어 자막을, 출간된 희곡집에서는 타이완어와 화어가 병기되어 나온다. 

 

연극 <십전> 대본 사진. 타이완어가 먼저이고 뒷장이 화어 번역본이다.


 극단 군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로 ‘작은 곳(小地方)’이라는 아동 예술 교육 프로젝트가 있다. 문화 경작이라는 포부를 품고 지방 도시로 왔다고 할지라도, 공연을 보는 관객이 없다면, 예술 농사라고 하는 것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관객은 연극의 3요소 중 하나니까. 그중에서도 아이들은 지금 이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자이라는 땅에서 함께 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이기도 하다. ‘작은 곳’ 프로젝트는 바로 이런 아이들을 위해 아예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문 예술 교육을 제공해 아이들이 자기 표현력, 창의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 협업 능력 등을 익히고 현지 문화를 인식하며 공동체 의식을 형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다.

 

아동 예술 교육 프로젝트 ‘작은 곳’ 소개 영상

 

 

자이를, 타이완을 대표하는 연극제, 차오차오(草草) 연극제

 

매년 3월이면 자이에서는 차오차오 연극제가 열린다. 연극, 음악, 강좌, 대담, 전시, 체험, 플리마켓 등 200개가 넘는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열흘 가까이 진행되는 실내·외 페스티벌로 자이를 대표하는 지역 행사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딱 18번째(제18회 차오차오 연극제, 3월 14일 ~ 3월 22일)가 되었는데, 차오차오 연극제의 성년(?!)을 기념해 올해 주제는 ‘제2막’이라고 한다. 다음 달에 타이완 남부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잠시 자이에 들러 성인이 된 차오차오 연극제를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제17회 차오차오 연극제 <以上與未滿 Almost, But Not Quite> 하이라이트 영상






1 타이완어로 阮은 군이라고 읽으며 ‘우리’라는 뜻이다.

2 이때 극단 군을 창단했던 창단 멤버 중 한 명이 오늘날 극단 군을 도맡고 있는 예술총감 왕자오첸이다. 

3 좌(座)는 일제강점기 때 극장을 칭하던 표현이다. 명동예술극장의 옛 이름도 명치좌였다.

4 극단 군의 대단함은 사실 여기에 있지 않을까. 홀로 살아남는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함께 공생할 수 있도록 문화 예술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 말이다.

5 내가 어쩌다 극단 군과 알게 되었는가도 사실 문학계를 떼어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극단 군의 존재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질적 교류가 전혀 없었는데, 교류의 물꼬를 터준 게 천쓰홍 작가다. 극단 군이 천쓰홍 작가의 작품인 『귀신들의 땅』을 연극화했다는 소식을 들은 내가 대본에 관심을 보이자, 천쓰홍 작가님이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셨다.

6 타이완은 한국과 달리 민간 공연장이 많지 않으며 장기간 상연하는 공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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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삭

평범한 시민이자 소설가 그리고 번역가. 중화권 장르 소설과 웹소설, 희곡을 번역했으며 한중 작가 대담, 중국희곡 낭독 공연, 한국-타이완 연극 교류 등 국제 문화 교류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한성부, 달 밝은 밤에』, 『감찰무녀전』,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등이, 역서로는 『여신 뷔페』, 『다시, 몸으로』 등이 있다. 홍콩 영화와 중국 드라마, 타이완 가수를 덕질하다 덕업일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으며 서강대에서 중국문화와 신문방송을, 동 대학원에서는 중국희곡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