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류가 보여 주는 인간의 조건 | 예스24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강하고 높은 존재가 아니라, 누구보다 약하고 낮은 존재라고 믿습니다.
글: 출판사 제공 사진: 출판사 제공
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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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신인류가 나타났다. 에티오피아 밀림에서 발견되어 엉뚱하게도 어느 허름한 동물원에 머물게 된 이 신인류는 기대와 달리 신비롭지도, 멋있지도 않다. 단지 ‘감자처럼 생긴 원숭이처럼 생긴’ 인류종일 뿐이다. 그를 ‘인류 2호’라는 무명(無名)으로 부르거나, ‘감자 원숭이’라며 조롱하거나, ‘우리 감자’라며 애정 어리게 부르는 이들 사이에서 이 신인류는 일생 동안 호모 사피엔스를 관찰한다.

 

데뷔작 『빅파파』부터 『맨투맨』, 그리고 영화 『프랑켄슈타인 아버지』까지 비주류 삶의 면면을 그려 온 작가 최재영은, 이번 신작 『인류 2호』에서 ‘인간이라는 종에게 질린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서로를 가장 잔인하게 해치지만, 때로 끝까지 사랑하기도 하는’ 인간을 신인류의 시선으로 탐구하고 유쾌하게 그려내는 작가 최재영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작가님께서는 데뷔작부터 꾸준히 소외된 인물의 삶을 현실적으로 다뤄 오셨습니다. 이번 작품 역시 그러한 지점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작품 세계가 좀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신인류의 등장, 그를 이용하는 연구조직, 신약개발이 등장하면서 마치 SF영화 같기도 하고요. 집필하시게 된 배경이 궁금하고, 이전 작품의 집필과 특히 다른 지점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이 호모 사피엔스다운 것일까?’ 이 질문이 저를 소설로 이끈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화 혹은 신화처럼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소위 말하는 현실의 핍진성이나 개연성에 얽매이지 않는 서사를 짜고 싶었달까요. 

앞선 작품들과 차별점이 보이는 이런 변화는 물론 저 자신의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소설은 딱 그 소설가처럼 쓰여진다고 믿는 쪽이거든요(그래서 저는 에세이보다도 소설이 그 작가의 민낯을 보여 준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제 소설에서 저의 민낯을 보려 하진 말아 주셨으면……). 과거의 제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믿는 것을 소설로 쓴다’라는 쪽이었다면, 이 소설을 쓸 즈음에는 ‘나는 내가 소설로 쓴 것을 생각하고 믿게 된다’로 바뀌었습니다. 인생의 몇몇 계기들로 인해 그전까지 제가 고수하던 세계 바깥에 대해서 상상해 보게 되었거든요. 

이게 창작에도 이어진 듯합니다. 한때는 ‘이게 말이 되나?’를 먼저 생각하면서, ‘말이 되게’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애하기도 했는데요. 소설 속 안전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요즘은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싶기도 해요. 서사에서 개연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보다도 더 중요한 게 분명 있다고,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지만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누구는 소설을 쓰고 또 누구는 소설을 읽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여기서 뜬금없이 오늘날에 이야기를 만드시는 모든 분들에게 응원의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 ‘말이 되나 안 되나’에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맙시다 우리!

 

많은 이들이 ‘신’인류란 우리의 한계를 초월한 새로운 종이거나 훨씬 신비로운 존재라고 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류 2호’는 신장 128cm, 기대수명 18세, ‘감자처럼 생긴 원숭이처럼’ 생긴 이로 일반적인 기대와는 많이 다릅니다. 신처럼 인류를 체험하고 관찰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인류 2호를 이렇게 설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신이 인류의 형상을 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표현한 많은 예술 작품처럼) 머리숱도 많고 이목구비도 뚜렷하며 마르긴 했지만 실전 압축 근육을 자랑하는 비율 좋은 서양인 모델 같은 외모는 아닐 것 같아요. 신은 반대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누구보다도 못나고 나약한 모습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강하고 높은 존재가 아니라, 누구보다 약하고 낮은 존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류 2호’를 신으로 보는 건 딱 적절한 해석 같아 감사합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한 신이, 까치발 한 채 고개를 높이 쳐들고 인간을 바라보는 것. 이 소설은 결국 그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편으로 저는 ‘인류 2호’가 ‘이야기’라는 개념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야기’는 인간과는 독립되어 존재하면서도 마치 거울처럼 인간을 되비치면서, 인간들이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자기 자신을 만들어(써) 나가니까요. 

 

앞서 언급한 이들은 이주민, 노인, 환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로, 인류 2호는 이들과 친구가 되고 또 안정감을 찾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소수자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아담회’에서는 엄청난 지지와 또 큰 상처를 받는 사건이 생기게 되어요.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회를 만들었던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다층적인 인간의 면면을 표현할 때 생긴 고민이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모든 인간은 어떤 면에선 전부 소수자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자가 아닌 인간은 없다고 말이죠. 민족이나 인종, 성별, 나이, 그 외 모든 정체성을 떠나서 말입니다. 그런 정체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근본적 소수성. 그것은 약점 같은 게 아니라고 보았어요. 오히려 고유함이라고 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저라는 사람을 ‘30대 대한민국 국적의 현역 군필 남자’ 정도의 정체성으로 판단할 때 저는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해지거든요. 그 외에도 출신 학교라든지 고향이라든지, 누군가는 저를 얼마든지 강자와 다수자들 쪽에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자신이 소수자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의 양상이 달라지겠지요. 대표적으로 정숙 씨를 비롯한 동물원 사람들은(그리고 동물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존재들로 그리고 싶었어요. 단순히 다수가 소수를 존중하며 보편성이 소수성을 품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다수성이나 보편성이야말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폭력은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결국 다수 혹은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담회’가 그런 사회겠지요.

다만 그런 면면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만 묘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삐뚤어지면 삐뚤어진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조금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일그러진 상에서만 드러나는 진실 같은 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정교한 정물화보다 이상한 추상화 같은 것에서 그 대상의 본질이 더 잘 드러날 때처럼요.

 

이 책은 ‘인류 2호’의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다섯 파트로 구분해, 인류 2호의 일생을 다룹니다. 어떤 부분이 집필하면서 가장 재밌었고 가장 힘들었나요?

우선 유년기와 소년기가 제일 재밌었습니다! 저는 소설 쓸 때의 작가는 작품에 몰입하는 배우와 비슷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쓸 땐 그 나이에 맞게 현실에서 한 뼘쯤 떨어져 있었던 거 같아요. 특히나 해당 부분은 태국에서 집필(이자 유유자적)했는데, 그런 환경의 정서랄까요, 자유로움이 글을 쓸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 청년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작품 속에서도 앞선 유년기, 소년기와의 간극을 보여 줘야 하는 부분이기에 더 처절하고 현실적인 얘기도 들어가야 했으니까요. 더군다나 청년기을 쓰기 시작하는 시점이 딱 해외의 유유자적 생활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부터였으니…… 배우로 따지면 거의 메소드 연기 수준으로 몰입할 수 있었달까요……. 혹시 공감하시나요? 아무리 해외 여행을 가서 삶의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만끽하고 오더라도 인천 국제공항에 내리는 순간 자동으로 발걸음이 빨라지며 한국화(?)되는 것을…… 

 

청년기로 넘어가며 동물원 바깥세상으로 나온 ‘인류 2호’의 삶은 다소 충격적으로 흘러갑니다. 끔찍한 인체실험, ‘아담회’, ‘호모쇼’처럼요. 그럼에도 정숙씨와 사육사의 사랑 등 주변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작가님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에게 사랑은 너저분하고 더럽고 추한 삶의 현장에 존재하는 것이에요.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은 언제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에서만 ‘뽀사시’하게 출현하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 주는 사랑도 그런 것이고요. 사랑하는 연인을 그릴 때 그들의 이에 고춧가루가 낀 걸 보여 주진 않잖아요. 솔직히 우리도 그런 걸 보고 싶어 하진 않죠. 그러나 나약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으로서의 사랑은 이 잔인하고 지저분한 세상 한 가운데에 있다고 봐요. 비록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수하지 않더라도. 따라서 제가 쓴 소설 속 사랑 이야기도, 아름답고 동화 같은 부분보다도 처절하고 힘든 환경에서의 부분이 더 ‘사랑답다’고 생각해요.

 

작가님과 노년기의 ‘인류 2호’가 만나서 인터뷰를 한다면, 어떤 대화를 나누실지 궁금합니다. 작가님은 ‘인류2호’를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요?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행동할까요?

실은 노년기의 ‘인류 2호’를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너무 슬퍼서)…… 아마도 저는 길지 않은 생애였지만 네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아마 그를 ‘감자’라고 부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노년기의 그는 이제 쭈글쭈글해져서 감자보다는 호박 같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가 오랜만에 누군가 자신을 ‘감자’라고 부르는 걸 듣는다면 아주 새로운 감정을 느낄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의 가장 행복했던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함께 그 이야기 속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볼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그의 기억 속에 정숙 씨가 있다면, 정숙 씨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거죠. 정숙 씨는 그 순간 어땠을까? 혹은, 정숙 씨는 자신이 사육사랑 결혼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만약 후회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육사와 함께 살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식으로 상상해 보고 질문을 던져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 많아지는 시대지만, ‘서로가 서로를 더 필요로 해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점점 더 잔혹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 위해, 스스로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또, 타인을 어떻게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자주 못돼 먹은 인간이 되기 때문에 이런 말할 자격이 없는 것 같긴 한데요. 그럼에도 조금 얘기해 볼게요.

잔혹하고 폭력적인 시대에 그나마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그래서 서로를 더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생각보다 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믿어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류의 생각들, 예컨대 (강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약한) 타인을 이해하고 보살핀다는 생각들은 결국 제자리걸음을 하게 하는 것 같거든요. 

그보다 저는 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또 내가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대가 없는 선의로 인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근원적인 겸허함 같은 것. 설령 혼자 똑바로 직립할 수 있고 내가 일해서 나를 먹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지금의 상태는 아주 일시적일 뿐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 인간의, 호모 사피엔스의 대부분의 상태는 생존하기 위해 결국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에게 기댈 품을 내어 줄 수 밖에 없다는 것. 나 역시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느끼는 극도의 고독한 순간이, 역설적으로 서로를 연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인류 2호’가 그런 변화에 일조(?)를 했으면 좋겠네요. 아 물론, 저에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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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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