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어느 날 바로 그 문장을 만났다 | 예스24
찾고 있는지 몰랐으나 만나는 순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문장들에 관해, 혹은 책 읽기의 우연한 기쁨에 관해.
글: 금정연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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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가 없을 땐 우연이 길잡이가 된다. 쥘 베른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은 좋은 큐레이터다. 아무런 의도도 목적도 없이 우연히 손에 집은 책이, 때마침 내게 딱 맞는 문장을 내어주는 일이 종종 있다. 마치 선물처럼.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가 172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제목이 눈에 밟혔다고 해야 할까. 한동안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던 책이라는 사실은 다 읽고 난 후에야 알았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지만, 베스트셀러 목록은 내 책이 올라올 때만 본다. 그래서 볼 일이 없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스즈키 유이 저/이지수 역 | 리프

 

결혼기념일 식사 자리에서, 홍차 티백 꼬리표에 인쇄된 괴테의 문장을 발견한 독문학자—이름은 ‘도이치’—가 그것의 정확한 출처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괴테를 비롯한 고전문학, 결혼, 개똥철학, TV 교양프로그램의 위험성과 학계의 암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 재미없게 들린다고? 실제로 소설의 초반을 읽는 내 감상도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내가 있었다. 고풍스러운 문체로 쓰인 노교수의 일상이 슬며시 미스터리 장르의 리듬을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놀랍진 않지만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반전까지—전혀 다른 책이지만, ‘지적인 학술 미스터리’라는 점에서는 몇 해 전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떠올리게도 한다. 무엇보다, 요시다 슈이치의 아쿠타가와상 심사평처럼 “여기에는 기쁨이 쓰여 있”다. 무언가를 아는 기쁨과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기쁨—그러니까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기쁨이.

 

긴 여정의 끝에 노교수는 배움을 얻는다. 문장의 출처를 찾는 일보다는 문장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삶과 사랑과 문학과 학문을 꿰뚫는, 아니 그 모든 것이 실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 티백 꼬리표에서 만난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문장이, 그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 하나의 선물이었던 셈이다.

 

내가 받은 선물은 이거다. 소설의 중반, 도이치가 꿈에서 만난 ‘선생님’(물론 괴테다)은 제자들과 인용에 대해 고풍스러운 문답을 나누다 갑자기 호탕하게 말한다.

 

실생활에서 따오든 책에서 따오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제대로 사용했는지 아닌지, 그것만이 중요하지! 나의 메피스토펠레스도 셰익스피어의 노래를 부른다만, 왜 그게 안 된다는 건가? 셰익스피어의 노래가 그 장면에 딱 들어맞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 시원히 말해주는데 어째서 내가 고생해서 나의 글을 새로 써야 할까?”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내 말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장면에 딱 들어맞는다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생기는 순간, 인용은 단순한 베끼기가 아니라 이름표가 붙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문장을 새로운 맥락 속에 배치하며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이 된다.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덧붙이자면, 이 글의 서두에 내가 인용한 쥘 베른의 말은 실은 “우리의 선택을 인도해 줄 표식이 없어서, 우리는 우연을 믿어야 했다”를 내가 살짝 손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쥘 베른의 말인가 나의 말인가? 글쎄, 그러니 그냥 괴테의 말이라고 해두자.

 

*

 

제대로 사용해야 하는 건 인용만이 아니다. SNS 피드, 광고, 기타 등등의 경로로 내 눈앞에 자꾸 나타나는 어떤 종류의 책들이 제시하는 원칙, 법칙, 공식… 아니, 어쩌면 책이라는 것 자체도 그렇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폴 기오의 『킬 더 도그』를 읽은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나는 작법서 매니아다. 장편소설, 단편소설, 시, 비평, 논픽션, 에세이, 일기 등 장르도 가리지 않지만, 그중 가장 즐겨 읽는 건 단연 시나리오 작법서다—실제로 가장 많기도 하고. 그러니 제목부터 블레이크 스나이더의 고전 작법서 『세이브 더 캣!』을 저격하는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있나.

 

『킬 더 도그』
 폴 기오 저/김지현 역 | B612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고양이 책’과 그와 유사한 책들이 알려주는 시나리오 작법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며, 심지어 괜찮은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초반부를 읽으면서 미심쩍음은 점점 커졌다. 그의 비판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고 해도, 그게 곧 이 책이 맞다는 뜻은 아니니까. ‘사짜’를 비난하는 ‘사짜’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까지는 정확히 37쪽이 필요했다. 흔히 말하는 시나리오 작법의 ‘공식’과 다르게 전개되면서도 감정적 반응을 일으킨 유명한 순간들을 나열하는 목록이 등장하는 페이지다. 〈대부〉, 〈기생충〉, 〈매드맨〉, 〈시티 오브 갓〉, 〈차이나타운〉, 〈저수지의 개들〉처럼 ‘대단한’ 작품들이 포진한 목록의 맨 마지막은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였다. 그리고 특정한 요소를 꼽아둔 다른 영화들과 달리, 그 옆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이 놀라운 시나리오에는 예상을 뒤엎는 장면이 셀 수 없이 많다.”

 

그 구절을 읽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내 말이. 나는 마틴 맥도나를 좋아해서 그의 영화를 찾아보는 것은 물론, 한국에 유일하게 번역된 그의 희곡 『필로우맨』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그중에서—어쩌면 다른 감독들의 작품까지 포함해서—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바로 〈이니셰린의 밴시〉다. 심지어 나는 〈이니셰린의 밴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의 친구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절교에 관한 영화이긴 하지만…

 

일단 그렇게 ‘라포’를 형성하고 나자, 다음부터는 하나하나 맞는 말이었다. 『킬 더 도그』의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좋은 시나리오는 특별한 시나리오 비법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결국 좋은 글쓰기에서 나온다는 것. 흔히 말하는 3막 구조, 전환점, 고양이를 구하는 순간 같은 것은 ‘그럴싸한’ 이론일 뿐이다—고만고만한 매력 없는 시나리오를 양산하는.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건 이거다. 구조는 도구가 아니라 결과라는 것.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구조가 필요한 게 아니다. 구조는 그저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에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나리오 작법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물론 때로는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폴 기오도 인정하듯이, 멋진 재킷을 입은 프로 작가들 중에서도 그쪽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앞뒤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시나리오가 막힐 때나 수정할 때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시나리오 ‘구루’들이 제시하는 구조에 레고 블록 맞추듯 장면들을 끼워맞추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우연이라는 길잡이가 끼어들 자리를 남겨놓기 위해서라도.

 

시나리오도 결국 ‘글’이기에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제일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가르칠 수 없고, 당연히 공식이나 법칙 같은 것을 세울 수도 없으며, 오직 배울 수만 있다. 물론 뻔한 말이다. 동시에 맞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뻔한 말이 맞는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은 대부분 뻔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맞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는 것이다—여기에 공식 같은 건 없다. 각자의 기준이 있을 뿐. 그러니 작가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라고 기오는 말한다.

 

내 기준은 이렇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글쓰기에 관한 책을 추천하는 장이 있는데, 시드니 루멧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 월터 머치의 『눈 깜짝할 사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시간의 각인』처럼 ‘대단한’ 작품들이 포진한 목록의 맨 마지막은 바나비 콘라드의 『스누피 글쓰기 완전 정복』이다. 그리고 거기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나의 영웅 스누피. 내가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도 바로 그였다. 어린 시절 ‘피너츠’를 열렬히 읽으면서, 세계 최고의 작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누피의 모습에 강한 울림을 느꼈다. 이 책은 ‘피너츠(Peanuts)’ 연재 중 스누피와 그의 타자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을 모은 것이며, 여기에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조언도 함께 담겨 있다. 나는 이 책을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최소 여섯 번은 읽었다.” (356쪽)

 

내가 덧붙이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내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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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각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저/<라승도> 역

출판사 | 곰출판

필로우맨

<마틴 맥도나> 저/<서민아> 역

출판사 | 을유문화사

킬 더 도그

<폴 기오> 저/<김지현> 역

출판사 | B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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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연

읽고 쓰는 사람. 『아무튼, 택시』, 『담배와 영화』,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한밤의 읽기』, 『모두 일요일이야』 등을 쓰고 『문학의 기쁨』,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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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1947년 미국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따라 여기저기 이사 다니며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형이 발행하던 동네 신문에 기사를 쓰면서 글쓰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킹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은 1974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캐리』였다. 원래 쓰레기통에 처박혔던 원고를 아내인 태비사가 설득하여 고쳐 쓴 이 작품으로 킹은 작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이후 30여 년간 5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여 모든 책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킹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33개 언어로 번역되어 3억 부 이상이 판매되었을 만큼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그의 문학성을 새롭게 평가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어서, 2003년 킹은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전미 도서상에서 미국 문단에 탁월한 공로를 기여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500편이 넘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전미 도서관 협회상, 로커스상, 세계 판타지상, 영국 판타지상, 휴고상, 브램 스토커상, 세계 호러 컨벤션상, 미국 추리작가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1996년에는 오헨리 상, 2011년에는 [LA타임스] 도서상을 수상하며 문학성을 입증받기도 했다. 이 외에 브람 스토커 상을 16회나 수상했고, 영국 판타지 상과 호러 길드 상을 각 6회, 로커스 상 5회, 세계 판타지 상을 4회 수상했다. 2014년 국가 예술 훈장을, 2018년 PEN 아메리카에서 수여하는 문학 공로상을 받았다. 2015년엔 그의 첫 추리소설 시리즈인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포함된 [빌 호지스] 3부작은 미국 최대 추리소설상은 에드거 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스티븐 킹은 데뷔 이후 호러, SF, 미스터리, 스릴러, 판타지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포브스]는 2017년 전 세계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창출한 작가 중 7위로 스티븐 킹을 뽑았다. 많은 수의 그의 작품들이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코믹스 등의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어 사랑을 받고 있다.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준 초기작들 대부분이 호러 소설이기 때문에 ‘호러 킹(King of Horror)’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작가로 데뷔한 이후 현재까지도 꾸준하게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영화로 제작되어서도 높은 평가를 얻었다. 그중 『캐리』, 『샤이닝』, 『살렘스 롯』,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본』,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미스트』, 『조이랜드』, 『그것』, 『닥터 슬립』이 제작 개봉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셀』과 『다크 타워』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영화화 중이다. 외에도 『고도에서』, 『잠자는 미녀들』, 『아웃사이더』, 『악몽을 파는 가게』 등을 썼다. 필명 리처드 바크만으로 장편소설 『로드워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