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 안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에 떠밀려서 앞으로 멘 가방에 매달린 키링이 두서없이 앞사람 명치를 날카롭게 겨누고 있을 때. 인산인해 속 내릴 타이밍을 놓쳐 집과 점점 멀어질 때. 내리는 사람과 타려는 사람이 동시에 승차장을 지나며 서로의 어깨를 확인할 때. 나의 인류애는 여기까지구나… 고작 이런 것으로 끝날 수 없는 사랑이란다… 홀로 중얼거리며 사람들로 안 보이는 계단을 감각으로 내딛고 올라선다. 모든 게 다 위태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타야 할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선다. 도착한 버스 안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매달린 손잡이 하나에 의지해 비틀거리는 마리오네트가 될 때,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려둔 나의 가방을 번쩍 들어 자신의 품에 끌어안는다. 자신이 들어주겠다고 무언의 끄덕임을 깜빡이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조아린다. 여기서 끝날 수는 없구나… 무수한 사람을 지나쳐와 넘어지고 싶을 때, 사람이 나를 또 일으키는구나…
나는 사람으로부터 애써 접어둔 종이를 다시 사람에게 펼치고 싶어진다. 시는 접어둔 종이 안쪽을 횡단하고는, 내가 세상에 건넬 수 있는 여백을 보여주는 일. 시를, 우글거리는 어둠 속에서 사람을 지웠다가 여백 위로 다시 사람을 그리는 일처럼 이해해보면 어떨까. 이 자리에서 산책하는 사람, 유력한 사람, 공중에서 사는 사람, 가장 불행한 사람을 읽는 사람에게 건넨다. 우리 사람이니까, 사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김경인 저 | 문학동네
나는 계속 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지루한 이야기를 위해 백 년간 돌아가는 물레처럼
잠을 깨면 내게 매달린 너무 많은 창문
커다란 자석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 뒷걸음치는
아주 작은 쇳가루처럼
나는 나로부터 가장 먼 창문
(중략)
나는 나에게 남은 아흔아홉 개의 털실
돌아오다 실수로 흙탕에 떨어진 한 올
다만 여기에 남아
조금도 깨지지 않은
완벽한 유리의 세계 안에서
(「산책하는 사람」의 부분,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123쪽)
산책하는 사람은 한가로운 사람이라기보다, 자신을 배회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을 반복하고도 계속 걸어나가려고 하니까. 그 길을 “자석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 뒷걸음치는” 일로 걷는다. 중력을 거스르거나, 목적지와 반대로 걷는 일은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돌을 얹고 나서는 길일 테다. 화자는 그러다 떨어뜨린 한 올의 털실로, 백 개라는 완벽한 셈을 깨트리고는 오히려 아흔아홉 개가 남았다는 이상한 희망으로 전복한다. 미완이라는 ‘하나’가 한 세계를 세어 나가는 방식이 된다. 김경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사람을 미완으로써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깨달음은 “나로부터 가장 먼 창문”을 열거나 닫으러 가는 길이 곧 삶이라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무엇일까?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란 어떤 것일까? “자석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 뒷걸음치는” 저항하는 마음으로 걷는 발걸음 아니면 넘어질 것을 알고도 넘어진 자리를 지나려고 하는 발걸음. 세상에 남아 있는 존재들이 완벽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부족했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미완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해하고 궁리하며 걸어가는 삶이 곧 산책이라면, 언제든 다시 사람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기리 저 | 문학과지성사
끝을 내기 위해 시작하겠어
우리가 왜 우리겠어
희박한 빛만을 모아 밝아지겠어
얘기를 들어주고 모두 털어내겠어
보고 싶었다고 말하겠어 뒤돌아보지 않겠어
이 순간만큼은 즐거웠으면 좋겠고
나타나주었으면 좋겠어
받아주었으면 좋겠어
깨진 무릎을 감추고 무사히 네게 닿겠어
김 서린 안경을 벗고 이렇게나 많은 비가 내리는 날
가져온 우산을 씌워주겠어
(「유력한 사람」의 부분,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161쪽)
한 사람을 ‘유력함’이라는 존재감으로 다시 불러내는 일이, 곧 한 사람의 ‘희박함’이 일으킨 의지로 읽힌다는 점에서 나는 이 시에 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과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마다 의지와 결심으로 잠겨 있는 이 시를 읽고 나면, 읽는 나조차도 불쑥 ‘한 사람’으로 유력해진다. 그리고 그 의지와 결심이 타자에게 전속력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왜 우리겠”느냐는 질문에 조금은 대답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풍경에 이러한 전망을 심어주는 이 시의 가장 커다란 힘은, 바닥을 읽어본 적 없인 길을 안내할 수 없고 추락을 목격한 적 없인 공중을 의논할 수 없는 우리의 서글픈 운명을 뒤집어 생각할 여지를 남겨준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고 장대비가 우거진 골목을 걸어나가는 ‘우리’의 안녕을 영원히 빌어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엔딩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다시 시작하는 도입부처럼 느껴진다. 이 시는 이제껏 뒤엉켰더라도 기꺼이 그 “마음을 계속 해보”려고 한다.
이영주 저 | 문학과지성사
서서히 올라오는 저녁이 노래 바깥으로 흘러갑니다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우리는 냄새처럼 이 공중에서 화석이 될까요
집이란 그런 것이지요 벽이 있고 사라지기 전에 냄새의 이름도 알 수 있는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그저 이마를 문지르고 머리뼈를 기대고 몸에서 몸으로 악취가 흘러가기를 우리는 남겨두고 노래가 내려가 떨고 있는 두 손을 핥아주기를
(「공중에서 사는 사람」 부분, 『차가운 사탕들』 45쪽)
땅에 두 발을 내딛고 있더라도 공중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나는 이영주 시인의 시를 읽는다. 시 안에는 나보다 더 높은 공중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내가 속해 있는 이 공중도, 언젠가 추락한 곳이라고 여겨지며 이상한 안심을 하게 된다. 낙하하는 우리의 운명에 이름을 불러주고, 어서 이곳을 도망치자거나 여기를 빠져나가자고 말하지 않으면서 ‘공중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 “노래가 내려가 떨고 있는 두 손을 핥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떨어질 일만 기다리고 있는 가을 나무의 잎사귀나 마침표를 찍지 못한 일기장 속 문장처럼 살아가는 날도 분명 있을 테니까. “우리는 원하지도 않는 깊이를 가졌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시의 처음처럼, 때론 우리가 사람에게 내걸 수 있는 기대는 그 알 수 없는 깊이에서 높이를 만나고, 부피를 느끼고, 질량을 갖게 된다는 것. 알 수 없는 깊이가 측정하는 삶의 기쁨과 고통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마음을 자꾸 빚어준다는 것이다.
장이지 저 | 창비
길모퉁이를 도는 당신에게서 끝나지 않는 끝이 시작하네 비가 오네 이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우산 쓴 당신이 있고 그 우산은 가라앉아 심연으로 사라지네 아니야, 지붕이 구름 너머로 솟구치고 구름의 잠을 뚫고 내가 꿈의 에테르로 떠돌 때 당신 우산은 투명한 잉크가 되어 편지의 중심으로 스미고, 깨어보면 언제나 슬픈 백지가 다시 펼쳐지네……
(「가장 불행한 사람」의 부분, 『편지의 시대』 26쪽)
언제부터인가 내 삶의 화두는 ‘시작’이 아닌 ‘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이 끝을 그만 슬퍼하고 아름답게 다루고 싶다고도 느껴지는데, 시집 『편지의 시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가 사람과 세계와 역사와 시간과 결별한 뒤에 쓴 경의의 편지처럼 읽힌다는 점에서 내가 바라던 ‘끝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내가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방법은, 편지를 쓰는 일. 누군가를 온전히 떠올리며 빈 종이를 글씨로 채우는 일은 너무나도 사람의 일이니까. 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 끝”인 것 같다. 그중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는 일을 상상해본다. 현전하던 시간이 모두 지나면 아득하게 사라지겠지만 “꿈의 에테르”로 다시 떠돌면서 끝나버린 시간을 무한히 회전하는 우리의 또 다른 슬픔들은, 사실 내 불행을 막기 위해서 태어난 감정이라는 것을. 우산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잉크처럼 땅 위로 스며들 때, 편지에는 많은 것들이 적히고 번져 있을 것 같지만 백지가 펼쳐져 자꾸만 시작할 수밖에 없는 끝을… 이 시집은 투명하게 감추고 있다.
사람이니까 어서 오세요,라고 맞이한 다음 다시 사람이니까 안녕히 가세요,라고 작별한다. 사람일수록 사람을 떠나고 싶어 하고, 사람 없이는 사람을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는 다시금 사람 앞에 서 있는다. 내가 그동안 읽은 모든 시의 줄거리는 이와 같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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