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선명한
[작지만 선명한] 고요한 새벽의 치열한 읽기, 엘리의 책 | 예스24
폴 윤의 소설집과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 기념 기획으로 작년 한 해 우리를 찾아왔던, 엘리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글: 허정은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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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새벽, 저자와 번역가의 손끝에서 빚어진 문장이 편집자에게 이르렀습니다. 편집자는 아직 책으로 존재하지 않는 문장들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갓 인쇄된 교정지는 따끈따끈하고, 흰 바탕 위의 글자들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빛나고 있네요. 이제 즐거운 읽기가 시작될 참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비문과 오자와 오역과 비약(N)을 막기 위한 사투입니다. 각종 사전들과 참조 도서들을 쉴 새 없이 뒤적이면서, 무엇이든 의심하고 궁금해하면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습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 동안의 시간을 들여 마지막 문장에 이르고 나면, 문장들은 조금 더 단단해져 독자분들을 만날 채비를 마칩니다.

 

제인 오스틴, 실비아 플라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발터 벤야민, 헤르만 헤세, 시그리드 누네즈, 다와다 요코, 폴 윤, 그리고 테드 창까지—엘리의 손을 잡아준 작가들의 (한국어로 도착한) 문장들은 모두 이런 고요한 새벽, 치열한 읽기를 거쳐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올해에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집,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제인 오스틴의 장편소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집, 호르헤 볼피의 인문 역사서, 발레리 페랭의 장편소설,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의 장편 SF를 그렇게 다시 새벽에 읽고 또 읽어 독자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이에요.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또 다양한 장소에서 엘리의 책과 마주치게 되신다면 한 번쯤 이 새벽의 시간을 떠올려주시기를.

 

      『벌집과 꿀』

       폴 윤 저/ 서제인 역 | 엘리

 

삶의 가장 어두운 시절을 지나가고 있는 작은 사람들, 칼로 스윽 잘라내 드러난 삶의 상처 난 단면들이 어찌나 깊은 골짜기를 품고 있던지요. 동트기 직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조금은 세상이 외롭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리지 않고 비워둔 여백 속에 독자의 자리를 남겨준 폴 윤 작가와 그 여백의 분위기까지 살펴 옮겨준 서제인 번역가를 떠올리기 전까지는요. 온전히 혼자가 되어 소설을 읽고 혼자임을 실감하며 소설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 글을 쓰고 옮긴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었거든요. 특히 「옮긴이의 말」은 저에게, 책을 함께 읽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붉은 실 같은 글이었습니다.

 

『디어 제인 오스틴: 젊은 소설가의 초상』

김선형 저 | 엘리

 

제인 오스틴 전작을 번역하고 싶다는 김선형 번역가의 소망을 처음 들었을 때, 조바심이 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대학 때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었던 두 분의 번역가 중 한 분이 제인 오스틴 전작을 번역하겠다고 나서다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하면서요. 계약서를 준비해 무작정 찾아갔을 때 놀라면서도 반가워해 주셨던 번역가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정성껏 내려주신 커피의 향기를 기억합니다. 번역가의 그때 표정과 향기는 그대로 제인 오스틴의 표정과 향기가 되어, 제인 오스틴의 200번째 생일인 2025년 12월 16일에 첫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책은 김선형 번역가가 제인 오스틴의 첫 출간 소설들을 번역하면서 깨달은 것들, 제인 오스틴의 하루하루를 속살속살 풀어놓은 제인 오스틴 백과사전과도 같은 에세이입니다.

  

『휴먼, 어디에 있나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저/김상훈 역 | 엘리

 

미국에 테드 창이 있다면 영국에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가 있다고, 작가를 처음 소개해 주시며 흥분했던 김상훈 번역가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일단은 세계 3대 SF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위상에 솔깃했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죽여 경찰에 체포된 로봇, 그런데 그 경찰도 이제 로봇인… 게다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 도입부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여기에 단테, 보르헤스, 오웰, 카프카, 그리고 애거사 크리스티까지 인류의 가장 눈부신 작품들로 쌓아 올린 각각의 ‘부’는, 웃어야 할지 황망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읽기의 기쁨에 푹 빠져들게 해줍니다. 인류가 삭제된 세계에 남은 시스템과 알고리즘, 그리고 로봇들의 방랑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엘리의 2026년 첫 책을 기대해 주세요.

 

 

함께 읽는 다른 출판사의 책

 


『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저/새뮤얼 타이탄 편/김정아 역 | 현대문학

 

대학 때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었던 두 분의 번역가 중 한 분의 작업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벤야민을 조금 더 잘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모두 김정아 번역가 덕분이라는 생각을 저 같은 비전문 일개 독자가 감히 해보며, 이 귀한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반갑습니다. 특히 「경험과 빈곤」이 「경험지와 부족함」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론 속의 뉘앙스와 사유를 번역한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경험과 지혜의 전승 회로가 끊긴 시대에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새롭게 열린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 사유를 지금 시대에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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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저/<새뮤얼 타이탄> 편/<김정아> 역

출판사 | 현대문학

벌집과 꿀

<폴 윤> 저/<서제인> 역

출판사 | 엘리

휴먼, 어디에 있나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저/<김상훈> 역

출판사 |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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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은

엘리 편집장. 문학, 교양, 학술 도서 편집자를 거쳤다. 그동안 W. G. 제발트, 프리드리히 키틀러, 발터 벤야민, 클리퍼드 기어츠,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 주디스 루이스 허먼, 제인 오스틴, 루이자 메이 올컷,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헨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캐럴라인 냅, 폴 윤, 다와다 요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배명훈 등의 책을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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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프라이부르크, 뮌헨 대학 등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나중에 평생의 친구이자 유대사상에서 지적 동반자가 된 게르숌 숄렘을 만난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간 그는 1919년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에 대한 연구로 베른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고 번역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4년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집필하지만 아카데미 세계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같은 해에 알게 된 연인 아샤 라치스 이외에 나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유물론적 사유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평, 번역, 방송활동을 펼쳐나간다.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유럽에서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로 이해한 그가 택한 길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고, 유대 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 신비주의와 계몽적 사유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통해 현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1940년 벤야민은 당시 뉴욕에서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원을 받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를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결한다. 그로써 그가 13년간 매달렸던 프로젝트, 즉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의 구상을 상부구조(문화) 전체에 적용하여 19세기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필생의 저작 『파사젠베르크』(Das Passagen-Werk)는 미완으로 남는다. 스탈린-히틀러의 밀약을 접한 충격에서 쓴 유물론적 역사철학의 결정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일명 ‘역사철학테제’)는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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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윤

소설가. 이주민 가정에서 성장한 체험을 바탕으로 정체성과 갈망, 시간과 역사 속에 놓인 인간이라는 문제를 독특하고 고요한 서정으로 그려낸다. 2009년에 첫 책인 소설집 『Once the Shore』로 전미도서재단에서 선정하는 ‘35세 이하 작가 5인’에 선정되었으며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으로 꼽혔다. 첫 장편소설 『스노우 헌터스』(2013)로 뉴욕 공공도서관 영 라이언스 픽션 어워드를 수상했다. 소설집 『The Mountain』(2017)은 NPR을 비롯한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장편소설 『Run Me to Earth』(2020)는 앤드루 카네기 메달 소설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2023년에 출간된 소설집 『벌집과 꿀』은 스토리상을 수상하고 조이스 캐럴 오츠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해 [타임] ‘올해 최고의 책 10’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뉴요커] 등 유수의 매체들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혔다. 『벌집과 꿀』은 러시아 극동 지방, 스페인, 에도시대 일본,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 광막한 시공간으로 흩어진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뿌리와 정체성, 개인에게 날카롭게 새겨진 역사의 상흔, 외로움과 갈망,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좌절의 아픔을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묘사해낸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로부터 호평받았을 뿐 아니라 에르난 디아스, 앤 패칫 등 세계적인 작가들로부터도 극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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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영국의 SF 및 환상문학 작가. 1972년 영국 링컨셔 카운티 우드홀 스파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졸업 후 레딩 소재 법무법인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다 북부 도시 리즈로 이주해 법무사로 활동했다. 오랫동안 작가를 꿈꾸며 습작을 꾸준히 해나갔던 차이콥스키는 15년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작품 출간을 거절당했지만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고, 2007년 서른다섯 살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극적으로 대형 출판사 토어 UK와 계약을 맺었다. 이때 계약한 작품이 2008년 출간된 데뷔작 『엠파이어 인 블랙 앤드 골드』로, 판타지 시리즈 ‘앱트의 그림자’ 중 첫 번째 소설이다. 이 시리즈는 비평가들의 찬사와 독자들의 인기 속에서 10편까지 이어졌다. 2016년에는 장편 SF 『시간의 아이들』로 아서 C. 클라크상을 수상했고, 이 소설을 필두로 『폐허의 아이들』과 『기억의 아이들』을 발표하며 2023년 휴고상 시리즈 부문을 수상했다. 더불어 2017년에는 『호랑이와 늑대』로 영국 판타지상을, 2021년에는 『지구의 파편』으로 영국SF협회상을 수상하는 등 장르 문학계의 주요 상을 석권했다. 지난 2025년에는 『휴먼, 어디에 있나요?』와 『에일리언 클레이』가 휴고상 최우수 장편 부문 최종 후보에 동시에 오르기도 했는데, 한 작가의 두 작품이 동시에 후보에 오른 것은 휴고상 역사상 두 번째 일어난 이례적인 사례로, SF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 『휴먼, 어디에 있나요?』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가 풍자 SF라는 전통적인 하위 장르를 통해 환골탈태에 가까울 정도의 작풍 변화를 보인 전환점격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SF 작가, 평론가, 독자 들에게 스타니스와프 렘의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나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연상시킨다는 격찬에 가까운 평을 받으며 2025년 휴고상, 로커스상, 아서 C. 클라크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