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인의 만화 탐독
[김해인 칼럼] 무한의 주인, 유한의 만화 | 예스24
일생일대의 복수가 끝나자마자 그대로 헤어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로의 갈 길을 간 린과 만지처럼, 저도 그렇게 『무한의 주인』을 좋아해요.
글: 김해인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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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만화를 편집하면서 먹고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선생님의 오랜 팬인 독자기도 하고요. 이 글은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쓰는 편지이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스스로를 탈탈 털어보는 글이에요. 편지라고 썼지만 선생님이 이 글을 읽으실 일은 아마 없을 거라 생각하고 쓰고 있어요. 없겠죠. 없어야 하고요. 선생님이 좋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하면은 종종 “그래서 넌 사무라 히로아키가 좋은 거냐 싫은 거냐…”라는 물음을 듣거든요. 선생님이 이 글을 읽을 일이 있어도 문제라는 뜻이에요.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선생님 만화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선생님이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이 1% 정도는 있다고 염두에 두고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서 나온 확률이냐면, 제가 여태까지 불특정 다수를 포함하여 약 100명 정도에게 선생님의 대표작 『무한의 주인』을 추천한 것 같은데 그중 딱 1명만 『무한의 주인』을 끝까지 읽었거든요. 100명 중 1명. 나름 정교하게 어림잡아본 확률이지요?



말했다시피 선생님의 대표작은 『무한의 주인』입니다. 한때는 많은 만화가와 지망생들이 『무한의 주인』처럼 그림을 그리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글쎄요… 『무한의 주인』을 읽으려면 만화방이라고 하기엔 만화책 전질 세트를 깔짝깔짝 비치해두고 짜게치나 로제떡볶이를 파는 데 집중하는 복합문합공간 같은 곳에선 어림도 없고, 파상풍 걸릴 것처럼 변색된 누런 만화책들이 잔뜩 있는, 아저씨들만 조용히 묵묵히 책장을 넘길 것 같은 오래된 만화방에나 가야 만날 수 있을지도요. 어째서 이런 세상이 되어버린 걸까요. 사람들은 대체 뭘 보고 살고 있는 걸까요. 『무한의 주인』은 정말 재밌는데. 『무한의 주인』은 선생님이 고단샤에서 1993년부터 2013년까지 연재한 선생님의 장편 데뷔작이에요. ‘혈선충’이라는 불로장생의 비법을 얻게 된 주인공 만지가 죽지 않는 몸이 되어, 아버지를 죽인 ‘일도류’라는 검객 집단에 복수하려는 린을 돕는 줄거리고요.

 

아마도 일본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라고 한다면 많은 만화 독자들은 『아이실드21』『원펀맨』을 그린 무라타 유스케 선생님과 『데스노트』를 그린 오바타 타케시 선생님을 꼽지 않을까요? 죄송하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선생님의 그림은 너무 좋지만, 너무 잘 그리시지만, 그러니까… 예쁘고 깔끔하지는 않잖아요? 기본적으로 약간 털선에, 톤을 많이 쓰지 않으면서 해칭으로 표현하다 보니 뭔가 덕지덕지한 기분도 들고요. 하지만 만약 일본에서 그림을 가장 멋있게 그리는 만화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선생님이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런 기술적인 거, 예쁜 거, 깔끔한 거(제작 공정이 디지털화되면서 마치 위생적이고 무균적인 느낌이 나는), 가독성 좋은 그림 같은 거. 그것들을 다 뛰어넘어 저에겐 선생님의 그림이 최고니까요.

 

『무한의 주인』을 보는 내내 생각했어요. 어째서 시대극 만화가 이렇게 스타일리시하고 멋있는 걸까. 무슨 사람 하나 꼬챙이 만드는 전투 장면에서 이렇게 멋진 앵글과 구도가 나와버리는 건데? 선생님 만화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이를테면 사람의 목과 팔다리를 모두 썰어버리는데 주인공의 뒤로 아주 아름다운 꽃과 풀들이 그려진 장면, 그런 너무 잘 그린 장면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 볼 때마다 숨이 막혀요. 오직 멋져 보이기 위해서 이런 걸 그리는구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멋짐에 압도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순정만화에서 잘생긴 주인공이 등장할 때 뜬금없이 인물 옆에 꽃이나 반짝이 같은 것들이 그려지잖아요? 『무한의 주인』은 그런 면에서 순정만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예쁘게, 멋있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그렇지. 하여튼 실제로 전 압도 당해버렸습니다. 멋지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해요. 한 권의 만화, 아니 단 한 장, 아니 그냥 그 한 장에 있는 어떤 한 컷. 그 한 컷에도 선생님의 붓질이 여러 번 있었겠죠. 그 한 컷만으로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요. 그것이 예술이라고, 만화는 역시 최고라고 생각하게 돼요.

 

『무한의 주인』을 본 어떤 분들은 그러한 말을 하더군요. 생각보다 만화가 별거 없다고요. 엄청난 대서사시와 박진감과 긴장감 있는 전개, 삶과 인생을 꿰뚫고 통찰하는 깊은 메시지, 철저한 역사적인 고증과 실재하는 시대 배경. 그런 거 딱히 없다고요. 젠장, 하나같이 맞는 말입니다. 반박할 수 없어요. 『무한의 주인』엔 그런 메시지 개뿔 먹고 죽으려 해도 없다고요. 하지만 그런 메시지가 중요할까요? 

 

전 사실 『무한의 주인』이 일본의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지, 일도류 같은 검객들이 판을 치던 시대가 역사적으로 일본에 실제로 있었는지 어쨌는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냥 만지가 조금 부족한 검술 능력을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신의 육체로 몸빵하면서, 린이라는 한 여자의 경호원이자 오빠이자 아빠로서 그녀의 곁에 영원히 머무는 이야기가 좋아요. 어떻게 한 남자가 경호원이자 오빠이자 아빠일 수 있냐고요? 그리고 다른 만화였다면 엄청난 훈련 끝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필살기를 연마하고 진검 승부를 하겠지만 『무한의 주인』에는 그런 거 없고 그냥 칼이고 몽둥이고 몇백 개씩 들고 다니면서 서로 만날 때마다 “응~ 너 죽을 때까지 꽂아 쑤실 거야~” 하는 게 좋단 말이죠. 칼 꼬챙이 되어버린 인간까지도 멋있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선생님밖에 없을 거예요. 불사신과 그를 쫓는 가오 검객들의 간지 맞짱. 

 

이게 『무한의 주인』의 매력이고, 제가 이 작품을 순수한 즐거움으로 숨 가쁘게 달린 이유입니다. 정말로 『무한의 주인』을 읽을 때 너무 재밌어서 밖에서 화나는 일이 좀 있어도 ‘응~ 집 가서 칼 꼬챙이 만들어버리는 『무한의 주인』 볼 거야~’ 하는 생각밖에 안 했어요. 몇 날 며칠 퇴근하고 그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집에 가서 만지의 스테미나를 시험하는 이야기를 읽었죠.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차했던 만지 무한 인체실험 에피소드─불사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그의 몸을 정말 조져놓죠─가 너무 길었다는 중론에는 저도 동감하는 바이기는 해요.)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결말이었습니다. 린이 드디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일도류의 수장 아노츠 카게히사를 만나서 그런 말을 하잖아요. 언젠가 내가 당신을 반드시 죽이러 갈 거니까 그것만은 기억해 두라고요. 일도류의 수장에 비하면 신체도, 각오도 연약하디 연약한 이 소녀가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싶었으나 저는 이 대사를 읽는 순간 알 수 있었어요. 이 만화는 반드시 린이 자기 손으로 아노츠를 죽이면서 끝날 것이라고요. 제 안에서, 필히 그런 결말만이 이 만화에 허락된다고요. 그리고 만화는 정말 그렇게 끝이 납니다. 선생님이 어느 인터뷰에서 『무한의 주인』의 린이 아노츠를 죽이는 결말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변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만화는 저에게 만지가 영원히 한 소녀의 경호원이자 오빠이자 아빠이자 불사의 존재로서 함께하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아노츠 카게히사라는 유한한 존재가 생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끝맺어줄 한 여자를 기다려온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복수는 허무하다고, 또 다른 끝없는 복수만을 낳을 뿐이라고 하는데요, 전 그렇지 않다고 봐요. 어떤 원념은 자기 손으로 파괴하고 끊어내어 버림으로써 매듭이 지어진다고 생각해요. 린이 그 복수의 굴레를 매듭지어서 좋았어요. 복수하는 게 뭐가 나쁘죠? 물론 대갚음을 하고 난 후에도 해소될 수 없는 감정이나 응어리는 남아 있겠죠. 그런데 또 그게 뭐가 그렇게 나쁘냐고요? 모든 게 해소된다는 것이 오히려 꿈같은 이야기 아니에요? 어쩌면 그 잔여물 같은 것이 다음 생의 그다음생에도 이어져서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잖아요. 스스로 지은 매듭이야말로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죠.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으로 어느 날 어딘가에서 린의 손녀를 다시 만난 만지를 보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저 선생님이 다시는 『무한의 주인』 같은 만화를 그리실 수 없으리란 걸 알아요. 1970년생인 선생님은 한국 나이로 57세이고, 앞으로 또 20년 동안 이런 만화를 그리면 77세가 되시거든요. 게다가 이 밀도와 무게감의 작화로 연재를 하신다면 선생님 손목은 정말로 아작이 나고 말 거예요. 한 창작자가 한 시절에 영혼과 몸을 갈아서 만든 수작이라는 점에서 저는 선생님이 『무한의 주인』 같은 걸 다시는 그리지 못하더라도, 아니 다시 그리지 못해서 더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실의 시간으론 장작 10년에 걸친 일생일대의 복수가 끝나자마자 그대로 헤어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로의 갈 길을 간 린과 만지처럼, 저도 그렇게 『무한의 주인』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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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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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2026.05.06

우와...완전히 감동받다...
"아노츠 카게히사라는 유한한 존재가 생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끝맺어줄 한 여자를 기다려온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 출처 : 채널예스
요 문장 덕분에 무한의 주인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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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