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호 모춘, 극장 무비랜드의 ‘단짠’ 운영기 | 예스24
더 나은 일을 하고 싶어 하던 이들이 재미있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 상상하지 못한 노선으로 핸들을 틀었습니다. 그 과정과 결과는 어땠을까요? 『무비랜드 메이킹북』에는 이들이 매일의 일을 만드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글: 박의령 사진: 표기식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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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쟁이 가장 치열한 도시 중 하나인 서울에서 좌석 30석의 작은 극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번 팝업을 열 때마다 1만 명이 거뜬히 모이는 브랜드였던 '모베러웍스(Mobetterworks)'는 갑자기 극장 운영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것도 하루에 한 편의 영화만 상영하고 매회 다른 큐레이터가 자신의 인생 영화를 상영하는 곳을요. 성수동에 위치한 '무비랜드'는 속절없는 유행의 파도 속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굳건히 보냈습니다.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문상훈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프로듀서 민희진까지 큐레이터로 기용하며 즐겁고 멋있는 일들을 벌여왔습니다. 낭만적이고 힙하게만 보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일을 위해 불모지로 뛰어든 극장주 소호와 모춘은 『무비랜드 메이킹북: 매일의 일을 만드는 여정』을 통해 각자의 굴레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전하려 합니다. 회사원에서 자영업자로, 또 극장주라는 색다른 명함을 달기까지 겪은 세세한 기쁨과 절망의 기록을. 그러니까 이 책은 한 극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신랄한 ‘메이킹북’이자 저마다의 일에 대한 가치를 되새기는 에세이입니다. 

 

 

어디에도 없던 영화 공간의 탄생

 

팝업에 1만 명을 동원하는 화제성을 지닌 브랜드를 운영하다 영화관을 만들었어요. 더군다나 역사가 있는 영화관들이 연이어 문을 닫는 상황에서요. 

소호 당시 저희한테 정말 중요했던 게 어떻게 하면 일을 좀 더 오래 할 수 있을까였어요. 모베러웍스를 운영하던 때는 단기적인 팝업 형식의 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영화라는 매개체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게 해줄 거라 생각했던 거죠. 영화라는 게 재밌는 영화도 있고 슬픈 영화도 있고 심지어 죽음에 관한 영화도 있잖아요. 나름대로는 확신을 가지고 뛰어들었던 것 같아요.


모춘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오히려 의자와 영상을 볼 수 있는 벽이 있으면 되지 않나? 수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어요. 시작해 보니 정말 큰 일이더라고요.(웃음) 책의 부제가 ‘매일의 일을 만드는 여정’인 것처럼 매일 고정된 일의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한 과제였어요. 무비랜드를 시작하기 전에는 1년에 몇 번 우리를 내보이고 그 결과로 평가받다 보니 인력을 갈아 넣는 걸 반복하고, 점점 더 자극적인 무언가를 쫓게 되는 게 건강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카페, 레스토랑, 서점 등 다양한 공간이 있는데 극장을 선택한 건 결국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영화란 이야기의 총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소호
저희 둘이 회사에서 퇴사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 때도 키워드는 이야기였어요. 브랜드를 먼저 만든 게 아니라 브랜드가 없는 상태에서부터 유튜브 채널에 공개하기 시작했거든요. 브랜드의 껍데기가 아닌, 퇴사하고 고군분투하는 과정과 이야기를 응원하고 공감해 주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라는 키워드는 여전히 중요해요.
 

모춘 억한 심정도 좀 있었나 봐요. 우리는 이야기를 되게 좋아하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메시지를 계속 발신했는데 ‘굿즈 팔이’라는 시선도 많았으니까요. 지금은 극장이라는 이야기 상점에서 영화라는 진짜 이야기를 선사하고 있는 거죠. 


처음에는 이름을 ‘모베러웍스 픽처스’라고 지었어요. 어떤 과정에서 무비랜드라는 직설적인 이름으로 변모한 건가요?

모춘 꽤 오랫동안 모베러웍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저가 가진 자산 중에 가장 유명한 게 바로 이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당연히 처음에는 ‘모베러웍스 픽처스’로 정했는데 의외로 저희가 하려던 것들이 이름 안에 잘 안 담기는 거예요. 나아가 모베러웍스에서 일하던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예 정반대되는 가볍고 편안한 이름을 정해보기로 했어요. 간판만 보고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을 생각하다 ‘무비랜드’라는 이름을 지었고 이후에는 기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매회 다른 큐레이터들이 영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시스템이 무비랜드의 핵심이자 정체성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소호 어떤 영화를 상영해야 할까 라는 고민이 많았는데 우리끼리 고른 영화가 100편이 채 안 되더라고요. 지속 가능한 방법에 대해 생각하다 사람을 먼저 선정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매거진에서도 힌트를 많이 얻었어요. 매달 나오는 잡지에는 표지 모델도 있고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가 실리잖아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정작 매번 같은 사람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일방적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모티비 채널을 운영할 때 선배분들을 모시고 조언을 얻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매번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었거든요. 여러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영화 프로그램에 적용해 볼 수 없을까 생각한 것들이 뒤죽박죽돼서 나온 결과예요. 

 

큐레이터를 섭외하고 영화를 수급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소호 보통 두세 달 전에 큐레이터를 섭외하고 상영할 영화 리스트를 2~3배로 받아요. 생각대로 수급이 안 될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다음 라이센스 업무를 맡아주는 파트너사와 상영 여부를 확인하고 계약을 진행해요. 동시에 큐레이터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편집해서 콘텐츠로 만들면서 본격적인 상영 준비를 해요. 인터뷰 때 나눴던 대화를 토대로 전체 테마를 정하고 각 영화별로 아트워크를 만들고 영화 소개를 써서 리플렛이나 티켓 같은 작업물도 만들어야 해요. 큐레이션에 맞춰서 내부 공간도 조금씩 변화를 주고 개봉을 한 이후에는 GV와 이벤트도 기획해요. 1년에 10번 정도를 하는 거니까 진짜 잡지 마감처럼 돌아가는 거나 다름없어요.(웃음)

 

2024년 개관해 2년을 보냈어요. 다양한 시도를 해온 공간의 지난 2년은 어땠나요?

모춘 사실 작년에 한 6개월은 저희 둘 다 월급을 못 가져갔어요. 틈틈이 외주 작업을 하며 겨우 유지를 해도 적금을 깰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일이 힘들다는 감각이 없고 약간 노는 것 같았어요. 큐레이터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렇게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거든요. 전혀 몰랐던 영화들도 알게 되고요. 사실 영화 취향은 한정적이잖아요. 자신의 분야에서 좋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고른 인생 영화 다섯 편을 ‘자 이것도 먹어봐, 이것도’ 해주는 게 얼마나 엑기스겠어요.(웃음) 한편으로는 좀 무섭기도 해요. 멋진 큐레이터와 협업하면서 그분들께 누가 되지 않을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요. 겉으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건 아닐까 지난 2년 동안 항상 파도를 타는 기분이었어요.

 

소호 영화관이라고 하지 않고 극장이라고 표현해요. 부티크 시네마나 독립 영화관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려워요. 이 공간에서 왓챠, 비너스, 반스 같은 브랜드와 협업 행사도 여러 번 열었거든요. 경계가 좀 더 허물어져 있는 것 같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2년이 길다면 길지만 아직은 너무 짧은 것 같아요.

 



영화의 매력과 일맥상통하는 디자인 미학

 

성수동의 골목 안 주택을 개조한 공간이 주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특유의 빈티지적인 요소가 무비랜드의 큰 무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춘 극장은 공공 시설물이지만 개인 아지트 같은 정서를 주고 싶었어요. 실내에 나무를 많이 써서 약간 촌스러운 느낌마저 나거든요. 어릴 적 교실 바닥에 왁스 칠하던 감성이나 교회 풍금 같은 걸 떠올렸어요. 공간의 목적에 비해 과할 만큼 요소를 많이 둔 건 어릴 때 극장에 가서 느꼈던 이미지나 순간들을 관람객들에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예요. 정작 영화보다 극장에서 나던 냄새나 풍경 같은 게 더 기억에 남을 때가 있잖아요. 결국 넓은 관점에서 영화 관람을 생각하며 만든 공간이에요. 영화라는 콘텐츠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동행한 상대와 맥주 한잔하면서 “그 연기 죽이지 않냐”고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영화 관람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관람객이 영화를 보러 무비랜드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감상이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하루에 한 편의 영화만 상영하고 안내하는 스태프들이 상영 영화와 관련된 코스튬을 하거나 OST를 틀어 놔 완전하게 한 영화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소호 저희가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게 디자인이라서.(웃음) 지금까지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다른 경험이 된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에 극장을 만들 때도 디자인이라는 요소를 잘 활용해 보자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굳이 영화의 아트워크를 재해석해서 포스터와 티켓을 다 새로 만들어요. 


무비랜드 메이킹북』 안에 수십 개의 아트워크를 따로 모아놓은 페이지가 있을 만큼 아트워크를 보는 재미가 있어요. 현장에서 구입하거나 만들어 볼 수 있는 굿즈는 무비랜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새로움입니다. 
모춘
뭘 만드는 걸 좋아해요.(웃음) 저희 취향이 되게 많이 반영됐는데, 여행 가면 기념품을 그렇게 사요. 예쁨이나 실용성을 떠나 미술관에 가면 꼭 포스터를 사야 하고 도쿄에 가면 ‘아이 러브 도쿄’ 문구가 들어간 굿즈를 꼭 사고 말아요. 왜 그런 걸 사냐 하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기념품을 보면 연관된 순간들이 떠오르거든요. 무비랜드에 오는 분들한테도 그런 기억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현장에서 직접 실크 스크린으로 작업해야 하는 굿즈를 파는데 정말 효율이 떨어져요. 작업하는 데 15분씩 걸리고 스태프가 내내 상주해야 하죠. 그런데도 잉크를 튀기면서 굿즈를 직접 만드는 경험이 관객분들 기억에 남는 것 같아 유지하고 있어요.
 

소호 저희끼리 아트워크를 하기 위해 극장을 만든 게 아니냐고 농담을 할 정도로 아트워크 작업을 즐겨요. 디자인은 컨펌이나 피드백을 받으며 작업하는 게 대부분인데, 아트워크는 디자이너들이 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서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나온 ‘무비랜드 에디션’ 아트워크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무엇인가요?

모춘 <찬실이는 복도 많지> 포스터 작업이 기억에 남아요. 이미 보았던 영화인데 문상훈 님이 라디오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짚어준 걸 듣고 다시 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다시 보니 재미있는 포인트가 읽혔어요. 그 대사로 만든 포스터 작업이 맘에 들고, 엄태화 감독님 큐레이션 때 <복수는 나의 것>을 상영하면서 만든 아트웍은 자랑을 좀 할 만해요.(웃음) BTS가 이번에 컴백하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뒷배경에 제 작업물이 보이더라고요.  

 

소호 저는 작년에 일본 《브루터스(BRUTUS)》 매거진과 협업했을 때 훈택 디자이너가 작업한 <드라이브 마이 카>랑 <헤어질 결심>이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책의 배면 형태를 컨셉트로 작업한 점이 기억에 남아요.


순서대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 <복수는 나의 것>, <드라이브 마이 카>, <헤어질 결심> 아트워크 ⓒ무비랜드


여러 큐레이터들이 고심해 고른 명작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상영작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모춘 <대취협>이요. 저희 개관작으로 상영했던 60년대 작품이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데 수급 비용이 너무 비싼 거예요. 반세기 전 영화이기도 하고 상영하면 무조건 수익이 마이너스라 고민했지만 너무 아쉬워서 딱 하루만 상영했어요. 고심해서 상영한 영화인데 만석이라 감격했던 게 아직도 생생해요. 참고로 지난 2년 동안 상영한 영화 중 라이센스가 가장 비싼 영화이기도 합니다.(웃음)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이유로 사랑받는 매체인데요. 두 극장주가 생각하는 영화의 매력이 궁금해요.

소호 러닝 타임 동안 다른 세계로 푹 빠져들어 간다는 느낌이 좋아요. 영화라는 게 대신 꾸는 꿈 같을 때가 있거든요. 엄태화 감독님이 영화는 만든 사람의 꿈을 관객들도 함께 꿀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영화는 영화를 만든 사람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크게 공감했어요.  

 

모춘 저는 사회 초년에 3-4년 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했어요. 말이 프리랜서지 거의 백수처럼 1년에 두어 개 일을 한 걸로 쪼개서 먹고 살았어요. 주변 친구들은 월급을 모아 해외여행도 가고 여러 경험을 하는 동안 저는 돈이 없으니까 대신 영화를 봤어요. 유일한 여가 생활이었는데 영화 속에는 참 많은 것들이 들어있더라고요. 미술이나 디자인의 수업이 되기도 하고 처세술을 배우기도 했어요. 여러 가지 면에서 위로를 얻었고 영화는 그런 힘이 있는 매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극장


무비랜드는 결국 사람들에 의한 극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인연이 보이거든요. 첫 번째로 영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직접 영화를 튼 팀원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소호 퇴사 후에 우리만의 팀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주체성이었거든요. 회사 생활을 10년 가까이하는 동안 누가 시켜서 하는 일 말고 내 목표를 가지고 즐기면서 했을 때 그것만큼 큰 성취감이 없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팀원들이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그런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많이 하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팀원들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각자 고민하고 지향하는 편이에요. 

 

영사기사를 따로 고용하려고 했는데 팀원이 스스로 영사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직접 영화를 틀어보겠다고 한 것도 일례예요. 1년에 딱 한 번 부산에서 치러지는 시험을 위해 저를 포함해 팀원 4명이 스터디를 꾸려 열심히 준비했어요. 장비를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한 채로 응시했기 때문에 결국 한 명만 붙었지만요.(웃음) 이후에 들어온 팀원도 자발적으로 준비를 해서 실기 시험만 남겨두고 있어요. 먼저 도전해 준 팀원이 선례를 만든 것이고, 그렇게 주체적으로 나섰을 때 얻을 수 있는 자기 성취가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문상훈, 가수 엄정화, 아이돌 버논, 랩퍼 스윙스, 화가 콰야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인물들이 큐레이터로 참여해 왔어요. 어떤 기준으로 큐레이터를 선정하나요? 
소호 무비랜드의 가장 핵심인 큐레이터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최종적으로는 ‘무기준’이라는 답이 남았어요. 이전에 주로 브랜딩 일을 하면서 일관성이나 정체성을 확고한 기준으로 삼았는데 오히려 갇히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을 찾고 나중에 돌아보면 기준이 갖춰질 거라 생각했죠. 이제 보니 우리는 만드는 사람들을 좋아하더라고요.

 

모춘 초반에는 우리의 색을 보여줘야 하니 제가 첫 큐레이터를 했지만 사실 두 번째가 진짜였어요. 당시 우리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문상훈 님이었어요.(웃음) 흔쾌히 첫 외부 큐레이터가 되어 주셔서 저희에게는 정말 귀인이자 로또였어요. 이전 회사에서 빠더너스 팀을 만났을 때는 둘 다 영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빠더너스 팀도 영화를 수입하고 저희도 극장을 운영하며 서로 영화라는 접점이 생기는 것이 너무 신기할 따름이에요.

 

실현 가능성이 낮더라도 섭외하고 싶은 큐레이터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소호 외국에도 재미있는 분들이 많잖아요. 팀원들에게는 이제 ‘해외’가 다음 과제인가 봐요. 또 한 번 작전을 짜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를 섭외해 보고 싶어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이나 직업에 대해 쓴 책을 좋아해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나 달리기에 대해 말할 때의 확고함으로 영화를 추천해 주면 어떨까 혼자 기대를 품어봤어요.  

 

모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가장 최근 큐레이션을 맡은 일명 ‘대퓨님’, 민희진 프로듀서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지금까지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고요. 

소호 막연하게 큐레이터 시스템을 꿈꿨을 때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과정이나 교감, 협업이 지금 민희진 대표님과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다섯 번의 GV도 대표님께서 먼저 제안주신 거예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를 거의 한 팀처럼 합을 맞춰 움직이고 있어요. 이 상영을 통해 사람들이 ‘민희진’의 지금까지 작업물을 좀 더 면밀히 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모춘 그러니까 단지 어떤 유명인이 선정한 영화를 상영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했거든요. 매력 있는 작업을 하는 작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에게 어떤 문화적인 토양이 있길래 저런 작업이 나오는 걸까? 영화를 매개로 이런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알고 싶은 마음이 큰 동기가 되었는데 이번에 아주 큰 충족을 느끼고 있어요.  

 

대표님에게 영화가 너무 소중한 한 송이, 한 송이의 꽃이기 때문에 꽃 모티프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셨고 직접 본인의 초상도 그려 주셨어요. 저희는 그걸로 실크 스크린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들고 모자도 제작하고 있어요. 저희가 돈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귀찮은 일일 수도 있는데, 자신의 경험과 좋아하는 것들을 나누는 일 자체가 순수하게 재미있기 때문에 열심히 해주시는 거거든요. 순수한 에너지를 나눠 받는 기쁜 경험이었어요.

 

달라지는 큐레이션만큼 다양한 관람객들이 무비랜드의 분위기를 형성할 것 같아요. 

소호 맞아요. 매달 관객의 느낌이 달라요. 뮤지션이 큐레이터일 때는 누가 봐도 음악을 좋아할 것 같은 관객이 찾아오고 디자이너가 큐레이터일 때는 예비 디자이너 느낌의 관객들이 와요. 마치 큐레이터의 친구를 소개받는 느낌이에요. 우리가 잘하고 매력을 느끼게 해서 우리 모두 친구가 되자는 마인드예요.(웃음) 노동절을 시작으로 4일 동안 『무비랜드 메이킹북』 북토크를 했는데 각 큐레이터의 팬분들이 여럿 오셨더라고요. 이제 큐레이터가 누구인지 관계없이 무비랜드 자체에 애정을 갖고 계신 분들이 오신 걸 보고 감동했어요. 

 

모춘 무비랜드가 정말 마이너하고 영세한 곳이지만 단골분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명절이면 떡을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직접 만든 술도 나눠 주시고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장미꽃을 주고 가시기도 해요. 성수동 골목 안, 오기 편하지도 않은 곳에 일부러 찾아와 주는 분들이 너무 고마워요.    

 


 

메이킹북이라는 네버엔딩 스토리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면 메이킹북이 나오는 것처럼, 무비랜드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그 과정이 담긴 책이 ’메이킹북’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점이 재미있어요. 어떻게 책을 만들게 되었나요?
소호 전적으로 제안에 따라 책을 만들게 됐어요. 일단 편집자님이 이전에 출간했던 저희 책 『프리워커스』를 재미있게 읽어주셨고, 영화를 무척 좋아하셔서 극장을 만드는 과정도 궁금하셨던 것 같아요. 무비랜드를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 제안이 왔는데 바쁜 와중에도 책은 꼭 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결국에 우리에게 자산은 기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1년 6개월 동안 쓴 버전이 있는데 건조하고 객관적인 보고서 같더라고요. 그래서 전부 폐기하고 제 관점에서 솔직하게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부끄럽고 이런 얘기까지 다 하나 싶은 진솔한 이야기들을 담았어요. 메이킹북이기 때문에 무비랜드를 실현하는 동안 생겼던 고민이나 마찰, 실패까지 정보란 정보는 최대한 다 주고 싶었어요.
 
옛날 외국잡지 같은 외형에 섹션마다 달라지는 디자인,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림이 바뀌는 플립북 장치가 책을 보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디자이너 듀오 신신의 공이 컸을 것 같아요.    
소호 무비랜드를 여러 가지 시선으로 보고 싶은 목표가 있었는데 신신이라는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신신은 실제로 무비랜드 큐레이터로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저희를 잘 알고 있었죠.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 책이다 보니 디자인적으로 엄격하고 확고한 구성이 있는 게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영상 기사 자격증 관련 페이지는 필름 콘셉트를, 담당자 노트는 청사진 컨셉트로 또 귀퉁이에 플립북 아이디어도 들어가 있어요. 이런 잡다한(?) 책을 신신 덕분에 만들 수 있었어요.

 

모춘 제호는 주물 간판을 모티브로 만들었는데 중간에 이빨 빠진 듯 평범한 서체가 들어가 있어요. 디자이너 왈, 아직 이 책은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과정에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해요. 플립북의 그림 역시 끝없이 날아가고 있어요. 신신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마침표 같은 책이 아니라 계속되는 말줄임표 같은 책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표지에 있는 도자기는 무비랜드를 시작할 때 오브제처럼 만든 거예요. 손으로 직접 빚은 투박한 도자기에 상영하고 싶은 영화를 그림으로 표현했어요. 별 대단하지 않은 것이지만 검은 배경의 중앙에 도자기를 놓아 권위적인 느낌이 나게 사진을 찍었고요. 

 

책의 앞면은 되게 그럴싸한데 뒤로 돌리면 광고 같은 이미지가 나와요. 매점에서 실제로 판매하는 나초를 광고처럼 찍어 배치했어요. 극장은 근사하고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수익을 내야 하는 상업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처음에 극장을 한다고 했을 때 어디서 투자를 받았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거든요. 매일의 일을 만드는 고군분투의 여정, 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장사하는 거야. 모든 일에는 거칠고 러프한 과정이 있을 텐데 그걸 숨기지 않고 함께 보여주겠다는 의지인 거죠.
 

모베러웍스(Mobetterworks), 즉 '더 나은 일'이라는 화두는 어느새 ‘모베러라이프(Mobetterlife)’가 되었습니다. 무비랜드를 하면서 이 화두에 얼마큼 다가간 것 같나요.
소호 어떤 일을 하든 그 안에 어려움과 고통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비랜드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재밌는 일을 꾸려가는 게 삶의 큰 의미로 다가오더라고요. 결국에 일을 왜 하는가 라고 하면 좋은 동료들과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해요. 물론 지금도 과정 중에 있고, 그래서 책의 부제에 ‘여정’이라는 단어를 쓴 것처럼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 찾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해야죠. 

 

지금까지 일본 매거진, 여러 브랜드와의 협업을 이끌어왔습니다. 앞으로의 무비랜드가 기대되는데요. 공간을 통해 또 어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가요? 

모춘 《브루터스》 매거진과 함께 하게 된 이야기를 해볼게요. 《브루터스》의 타지마 로 편집장님이 컨퍼런스 일로 서울에 왔을 때 30분 정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는 큐레이터 시스템이라는 작전만 있고 희망은 없을 때였어요. 극장도 지어지기 전이었고 주변으로부터 비관적으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듣고 있어서 우울함에 잠겨 있었거든요. 우리의 계획을 듣고 편집장님은 ‘정말 똑똑하다’고 칭찬하더라고요. 갑자기 흥미를 갖고 우리를 인터뷰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2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듣고 많은 게 달라졌던 것 같아요. 편집장님이 에디터일 때 마돈나와 쿠엔틴 타란티노를 어떻게 섭외했냐고 물으니 “물어보는 건 돈 안 들잖아”라고 답하시더라고요.(웃음) 이 마인드는 많은 걸 가능하게 해요.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1인 연극 같은 것도 해보고 싶고요. 무비랜드의 앞날은 꽤 여러 형태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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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령

여러 패션 매거진의 피처 디렉터로 일하다 지금은 자유롭게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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