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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요즘 즐겁게 읽은 첫 시집이 있어요 | 예스24
첫 단추가 어떻게 시작되었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의 옷깃을 만들어가는 일. 첫 시집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글: 서윤후
2026.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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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를 잘못 꿴 잠옷을 입고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나서 거울 속에 비틀어진 옷깃을 보고 그제야 알아차렸다. 지금 나의 피곤한 얼굴과 매우 잘 어울리는 오류라고 생각했다. 잘 어울린다면 그것은 또 다른 실행이 아닐까? ………첫 단추를 잠그면서 동시에 열리게 된 세계를 생각했다. 내게 첫 시집들은 그렇다. 돌아갈 수 없이 시작하게 된 그 길을 함께 걷고 싶어서다. 조금은 너그럽게, 조금은 넉넉하게 읽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의 첫 시집을 읽었어요. 단추가 어디에 맺혀 있든 간에 읽는 동안 나와도 잘 어울렸어요. 하고 인사를 보내고 싶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속으로만 생각한다.

 

시인선이 많이 생겨나고, 그만큼 첫 시집도 많아졌다. 첫 시집만큼은 놓치지 않고 챙겨 읽는 편인데 요즘엔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챙겨 읽고 싶은’ 어떤 종류가 있다는 것은 나를 언제나 좋은 기다림에 서게 만든다. 외로운 독서가에게 기쁨을 준다. 첫 시집이 활짝 열어젖혀 보여준 세계를 입장할 때엔 평생을 각오한다. 당신을 계속 만나고 싶어요. 조용히 따라가고 싶어요. 그런 응원은 왜 첫 시집에게서 유독 생기는 것일까? 읽는 동안 혼자 걸쳐두었던 어깨동무를 풀고 나서도 어쩐지 누군가 옆에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까?

 

긴 잠을 통과하고 일어난 얼굴. 막 깨어나 세상의 빛에 온통 찌푸리기도 선명한 시야를 찾아 눈을 마구 비비기도 하는 것. 첫 단추가 어떻게 시작되었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의 옷깃을 만들어가는 일. 그것은 곧 살아갈 준비. 첫 시집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유원지 왔니?

강상헌 저 | 봄날의책

 

네 길을 가라! 그 말을 조그맣게 되뇌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작게 써보기도 했다. 힘든 날, 내가 무서워하던 이들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소리 지르는 날이면 그 말을 외치며 보냈다. 나는 느낌표를 좋아했는데, 이 말에 붙은 느낌표에는 내가 좋아하기 전부터 이어져왔던 좋음이 완벽하게 담겨 있었다.


(「일방통행로」 전문, 『유원지에서 왔니?』 33쪽)

 

이 시집에서 나는 많은 느낌표를 읽었다. 새로운 느낌표를 받아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시는 느낌표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부분이 있다. 함께 길을 가는 일이 아니라, 제 갈 길을 가는 데 쓰이는 이 느낌표는 어떤 모양의 점에서 솟아오른 것일까 내내 궁금했다. 나는 물음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천진한 질문을 던지고는 읽는 이를 곤란하게 하는 일을 즐겨했다. 이 시집의 느낌표는 적어도 적재적소에 쓰였다는 생각, 물음표보다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묻게 한다는 생각. ‘좋음’이 완벽하게 담겨 있는 기호로서의 ‘!’는 시인에게 많은 것을 여는 열쇠가 되었을 것만 같다. 이 시집은 입김 서린 창문에 그린 느낌표 하나가 지워지지도 않고 한 사람에게 새겨져 시작하게 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시집 속에 자리잡은 다양한 장소들은 턱을 괴고 생각을 만들면서 건너게 된 머나먼 이야기들이다. 자세를 고치면 다시 다른 위치로 옮겨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상헌 시인이 빚는 이야기의 굴절률이 불친절하길 바라며 읽게 되었다. “혼자 있고 싶어!” 자유에게마자 곁눈질하게 되는 신비 속에서.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송하얀 저 |교유서가
 

불은 강 너머 민가를 덮치고 며칠을 더 태웠다. 불 사이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강 쪽을 향해 앉아 너는 불구경을 했다. 불이 물속에서 살아 있어. 타는 집을 타게 두고 그런 말들을 나누었다. 그 강 위로 우리도 타고 있었다.

 

두 눈에 불씨를 들인 사람들이 서성인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날, 나는 잠금쇠를 풀고 쇠문을 연다.

 

화 없는 사람이 올 거야. 빈터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땐 따라가야 해. 폭설이 내리는 동안에도 연기가 보인다. 눈과 잿더미와 낙엽과 흙을 파는 사람들. 각자의 구덩이를 만든다. 그날은 오래 묻어둘 수 있다면 좋겠지. 빨간 장갑이 검게 되도록.

 

(「불씨」의 부분,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82쪽)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그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시로부터 알게 되었다. 두 눈의 불씨는 서로를 알아봐주는 빛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를 태워버리고야 마는 자폭기제가 되기도 한다. 희망은 그렇다. 한 사람을 반짝이게 돕다가도, 한 사람을 바싹 마르게 타오르기도 한다. “화 없는 사람”이란 누구일까. 화가 발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키우지 않는 사람일까? 아니면 자신을 모두 소진해버리고도 살아 남은 사람일까? 이들을 모두 만나본 사람 같다. 시인은. “오래 묻어둘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만이 여기에서 유일한 불씨처럼 느껴진다. 송하얀 시인의 첫 시집에는 이렇듯 형체가 분명한 존재보다 형체들이 무너지면서 벌어진, 뒤엉킨, 그러다 희미해지고 만 소진된 마음들이 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따라 읽는 것이 아프면서도 이렇게라도 미열을 지키며 남아 있는 통증이라 다행이라고도 느껴졌다.

 

크런치 모드

이자연 저 | 아침달

 

당신 눈에 드러웠던 먹구름은 어디 갔어요?

나는 그거 좋았는데

 

바람꽃이라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산책로를 걸어 다니고

꽃을 빤히 바라보곤

잠시 뒤 그곳을 떠난다

 

오늘도 바람꽃들이 산책로에서 꽃 한 송이를 둘러싼 채로 앉아 있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보면 꽃은 없고

두껍고 더러운 손톱이 놓여 있었다

 

산책로에선 아주 가끔 사람 시체가 발견된다

어제는 하필 내가 발견했다!

 

조금만 일찍 왔다면 달랐을까?

시체에게 물었다

그는 이런 말을 건넸다

 

너는 길을 잃은 자구나?

나는 너처럼 길을 잃은 자가 좋아

 

(「불의 발걸음」의 부분, 『크런치 모드』 123-124쪽)

 

이자연 시인의 첫 시집에는 말을 걸어오는 이, 말을 거는 이 모두 자유자재로 그려진다. 게임의 세계에서 ‘플레이어’의 방향키 따라 만나게 되는 그 누구든,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무척 흥미롭다. 모든 장면들이 픽셀로 구현된 현실 바깥의 현실처럼 다가와서 자유도가 상승한다. 화자의 무자비한 질문에도 대답해주는 스님과 수녀가 있고,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는 친구를 이야기하니 “친구가 물고기예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시적 논리를 도미노처럼 쓰러뜨리며 나아가는 전개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너처럼 길을 잃은 자가 좋”다는 고백으로부터, 이 시집은 길을 잃은 자들이 모여 걷는 지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읽는 누구든 가능태가 된다. 백 번의 목숨을 잃어도 영원히 실행될 수밖에 없는 ‘크런치 모드’에서 과로한 생각을 피처럼 흘리며, 누적된 피로를 철갑처럼 두르며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시라는 것은 이미 결말로 남겨진 세계를 뒤집기 위해 뛰어드는 일이 아닐까.

 

 

마콤

신동재 저 | 파란

 

옛 6학년 제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갑자기 핸들이 굳었다

이렇게 경직돼 버린 건 무엇이 아픈 탓인 걸까

 

자동차의 앞 유리는 미울 만큼 감정이 없어 보였다

내가 투명한 사람을 어렵게 여기는 까닭

 

길차에 차를 세우고 긴급 출동을 부른다

출동 요원이 보닛을 열어 보더니 제너레이터가 고장 났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스스로 살아날 수 없게 된 것

 

그건 너무 맑은 설명인 듯해요

 

(「제너레이터」의 부분, 『마콤』 36쪽)

 

신동재 시인의 첫 시집을 읽다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데, 교단에 선 화자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선생님이라는 구체적인 화자가 상정되어 있는 시들 속에서 진심의 향기를 품은 문장을 유독 마주할 수 있어 아프기도 하다. 미성년 화자가 바라보는 선생들이 시에 자주 등장했던 것과 달리 이 시에서는 선생 자체의 괴로움 속에서 진동하는 화자가 등장하는 게 매력적이다. 이 시는 제자의 부고를 받고 가속페달을 밟으며 달려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차가 멈추게 되어 부른 긴급 출동이 차를 진단하고는 제너레이터 고장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살아날 수 없게 된 것”의 진단은, 우리를 한 번 더 죽이는 것 같다. 그 “맑은 설명”에 화자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말해지는 진실에 과도한 눈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마치 헤드라이터가 눈동자를 쏘아대는 일처럼. 시인의 시집에서 진심을 밝히는 방식이 대개 그렇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뜨면 이상하게 시집 속 시의 잔상들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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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