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요리를 안 하지만, 그런 주제에 내가 만드는 그림책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먹는 장면’ 또는 ‘요리하는 장면’을 넣는다. 그리고 다른 작품을 볼 때도 먹는 장면이나 요리하는 장면이 들어간 작품을 즐겨 본다. 이유가 뭘까?
하나, 먹보라서.
둘, 요리를 안 하므로 그 과정이 너무나 신비롭게 느껴져서.
셋, 오늘 새로운 이유를 깨달았다. 삶의 활력을 찾고 싶어서. 너무나 간절히…
혹시라도 나처럼 무기력이라는 불청객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 내는 것이 힘겹다면, 다음 작품들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어제 뭐 먹었어?』
요시나가 후미 글그림 | 삼양코믹스
동거하는 게이 커플 중 한 명인 변호사 시로가 매일 요리를 한다. 그는 정시 퇴근 후 장을 보고 저녁을 짓는다. 저녁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절대 무리해서 일을 맡지 않는다. 더 많은 수입보다 저녁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이 책은 한국 기준 2008년에 첫 출간된 이후, 2026년 6월 현재까지 24권이 나와 있다. 18년의 세월 동안 등장인물들의 외모도 변했다. 아무리 오랜 기간 연재를 한다 한들, 이렇게 등장인물들의 세월의 변화를 시나브로 독자의 시간의 흐름과 같은 속도로 변화시켜 가는 만화는 처음 본다. 인생의 대소사를 겪어 가며 매일매일 음식을 해 먹는 모습을 메인으로 다룬다.
그러다 15권 191번째 에피소드에서 시로의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그러고 보니 그간의 에피소드에서 어머니는 감정에 휘둘리는 편이었고, 그럴 때마다 몸져눕는 것을 아버지가 걱정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작가는 이런저런 구상을 미리 해 두고, 세밀하게 밑밥을 깔아 왔던 것이다. 마치 이런저런 세밀한 일상의 요소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인생을 결정지어 버리듯 말이다. 이 만화는 우리와 같은 속도로 현재를 살고 있다. 단지 ‘요리’라는 테마의 만화로 표현되어 있을 뿐. 그렇다면 왜 하필 요리이며, 나는 왜 이 만화가 그토록 좋은 걸까? 제목을 보자. “어제 뭐 먹었어?” 시로가 말한다. “어제 먹은 것이 오늘의 내 몸을 만든다”고. 진지하게 슈퍼를 돌며 최저 가격의 식품을 고르고, 심각하게 균형을 생각하며 반찬을 만든다. 크고 작은 사건들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이어 나간다. ‘게이 커플’이라는 주류에서 벗어난, 다소 찌질한 성격의 소심한 주인공들. 하지만 삶의 균형을 잃지 않고 일상을 살아 내는 이들의 모습은 용감한 전사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얻어 가고 싶은 것이 18년 동안 일 년에 한 권씩 나오는 이 만화를 기다리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요리라는 일상과 그 일상이 쌓여 만드는 인생. 어제 먹은 음식이 만들어 준 오늘의 나의 몸. 그렇게 씩씩하게 살아가는 거다!

〈어제 뭐 먹었어?〉 | 드라마
TV 도쿄
앞에서 소개한 동명의 만화책을 드라마화한 작품. 이런 경우 대부분 원작을 복사한 것에 불과해 실망하기 마련인데, 드라마도 재미있다. 만화책 장면들이 그대로 실사화되면서 더 절묘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보시라.

〈조용한 식사〉 | OTT 프로그램
올리브TV 제작, 티빙
평범한 사람 혹은 셀럽이 카메라를 마주하고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한다. 간혹 카메라를 향해 설명을 하는 게스트도 있지만, 조용히 혼자 식사하는 경우를 선호한다. 폐가에서 라면을, 동굴에서 부대찌개를, 한남대교 밑에서 수제비를 묵묵히 혼자 먹는다. 이따금 슬로모션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하이라이트 장면이 느리게 포착될 뿐, 아무런 플롯도 배경음악도 없다. 오로지 주변의 소음과 먹는 소리뿐.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배우 신소율 씨가 식당에서 혼자 감자탕에 있는 돼지 뼈를 쪽쪽 빨아 가며 야무지게 먹는 편. 마지막에 볶음밥까지 볶아 냄비를 박박 긁어 가며 맛나게 먹어 치운다. 배우 신세휘 씨의 ‘소곱창’ 편도 좋아한다. 예쁜 사람이 식당에 앉아 소란한 가운데 열심히 곱창을 구워 먹다가 호기롭게 이모님을 불러 맥주도 콸콸 따라 곁들인다. 이 부분은 슬로모션으로 촬영되었는데, 주변의 소음은 사라지고 맥주 따르는 소리, 하얀 거품 피어오르는 소리만 들린다. 이 프로그램은 요란한 리액션 없이 홀로 조용히, 이곳저곳에서 이런저런 식사를 하는 것이 전부다. 만족스레 식사를 마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상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나의 뇌는 쓸데없는 상념을 비우고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낀다.

『찾아라! 팬케이크!』
주혜린 저 | 샌드위치 프레스
샌드위치 프레스에서 만든 초소형 책. 오죽이나 작으면 책에 고리가 달려 있어 키링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팬케이크와 핫케이크에 대한 진지한 구분으로 책이 시작되며, 50편의 영화에 등장한 팬케이크 소개가 이어진다. 왼쪽 페이지에는 영화 제목과 국적, 장르, 그리고 설명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해당 팬케이크의 그림이 실려 있다. 마지막으로 팬케이크 굽기 팁과 작가의 Q&A가 나오는데, 팬케이크를 수집하고 그리면서 배우거나 느낀 바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팬케이크는 어렵지 않은 요리라고 하지만, 직접 반죽을 만들어 구워야 하므로 시간이나 정성 없이는 만들기 힘들다. 그래서 팬케이크를 만든다는 건, 어쩌면 나를 담고 내어 주는 일과도 같지 않을까. 아침의 특별식으로 흔히 내놓는 팬케이크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영화 속에 나온 팬케이크를 보고 있으면, 무심하게 맞이하는 아침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작가의 생각과 개성, 그리고 목적이 제대로 완성되어 표현된 작고 완성도 높은 책이다.
백희나 글그림 | 스토리보울
본인이 만든 그림책. 늘 그렇듯 요리하는 과정과 누군가 이것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온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구멍’을 달여 정성껏 ‘구멍청’을 만든다. 누가? 달에서 온 달토끼들이다. 그들은 진귀한 재료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그 재료를 손에 넣게 되면, 여드레 밤낮 긴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구멍청을 달인다. 그야말로 장인들이다. 이 귀한 음식을 헌 옷 한 벌을 받고 대접해 준다. 누구에게? 그 음식이 절실한 이에게. 그 맛은 아마도 조청과 비슷한 맛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꿀’인 조청을 누가 찾을 것인가? 밤늦게 찾아온 ‘가짜 곰’인 곰인형이다. 곰돌이는 왜 지쳤을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아기를 돌보고 재우느라 매우 고단할 터. 곰인형은 반갑게 구멍청을 먹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한다. 달토끼들은 어찌어찌해서 지구에 오게 되었고(『달샤베트』 참조) 지구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직접 요리까지 하게 된다. 나름 외계에서 온 이들은 지구의 식재료에는 문외한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생소한 것들로 요리를 하고, 생각지도 못한 효능을 얻게 된다. 이렇게 구멍청의 이야기가 시작되며 사슬을 타고 그림책으로 완성되었다. 살아가기 위한 힘, 그것이 타인의 돌봄이든, 음식이든, 마법이든, 당분간 나의 테마로 계속될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절실한 모양이다. 그리고 부디 같은 결핍을 가졌을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닿기를.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어제 뭐 먹었어? 24
출판사 | 삼양(만화)
구멍청
출판사 | 스토리보울
백희나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육공학을,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그림책을 만들어 간다. 그동안 쓰고 그린 작품으로 『나는 개다』, 『이상한 손님』, 『알사탕』, 『이상한 엄마』, 『꿈에서 맛본 똥파리』, 『장수탕 선녀님』,『삐약이 엄마』, 어제저녁』, 『달 샤베트』, 『분홍줄』, 『북풍을 찾아간 소년』, 『구름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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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