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인간이 만들어 낸 유일하고 연약한 방패 | 예스24
“이야기란 말이 안 되는 것들을 모아 말이 되게 만드는 일이다. 인생이란 말이 되던 것들도 말이 안 되게 돌변하는 곳이다.”
글: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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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한국어』

문지혁 저 | 민음사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나와 걷던 중이었다. 식당에서 나누던 창작과 이야기에 대한 대화를 마저 이어가던 중에,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글 쓰는 걸로 정확히 뭘 하고 싶은 거야? 조금 망설이다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내 복잡성이 복잡성 그대로 살아가게 하고 싶어.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고 치워버리지 않고, 그게 그냥 살아가도록. 정작 그렇게 말해놓고 나도 조금 놀랐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그걸 문제라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래, 복잡한 건 늘 문제였고 그게 내 ‘하마르티아’였다. 

 

하마르티아(Hamartia), ‘비극적 결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이야기란 하마르티아(결함)를 가진 주인공이 수많은 여정 속에서 페리페테이아(위기 행동)를 반복하며 힘겹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아나그로리시스(발견)를 통해 섬광처럼 자기 자신이라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마르티아는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에 불과할지 몰라도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하마르티아는 필연적인 서사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문지혁 작가의 하마르티아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것”이다. 그것이 소설 『실전 한국어』 주인공으로서 문지혁의 일종의 자질이고, 바로 그 덕분에 이 소설은 시작될 수 있다.

 

*

 

『실전 한국어』는 2020년 출간된 『초급 한국어』와 2023년 출간된 『중급 한국어』에 이은 문지혁 작가의 ‘한국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작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설가가 화자로 등장하고 작가의 실제 경험이 서사의 주요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자전 소설, 오토 픽션의 계보에 놓이는 작품이다. 작가 스스로도 전작들을 두고 “그건 그냥 내 얘기”, “실화였고 일기였고 한풀이”였으며, 좀 더 자세하게는 “오토픽션의 틀 안에서 강의와 육아, 창작과 일상을 결합한 콜라주 형식”이라고 소설 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전작에서 문지혁은 이민작가를 꿈꾸며 뉴욕에서 한국어 알파벳과 인사말을 가르쳤고(『초급 한국어』), 바다가 보이는 사립대에서 한 학기 동안 ‘나’에 대한 글쓰기를 지도했다. (『중급 한국어』) 그리고 이번 『실전 한국어』에 이르러 그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가르친다. 구청의 성인 대상 프로그램인 ‘나도 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뽀개기’ 수업은 이전보다 장소도, 수강생의 면모도 한층 소박해졌지만 다루는 주제만큼은 결코 소박하지 않다. 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부터 플롯과 하마르티아(비극적 결함)와 아나그노리시스(발견)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전개에 따라 이야기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구성된다.

 

‘실전’에 이른 만큼, 소설 속 문지혁의 삶의 ‘플롯’도 한층 복잡해졌다. 둘째 아이의 탄생으로 육아의 난도는 높아졌고 실직과 악플, 아내의 수술, 코로나 후유증까지 삶의 자질구레한 역경과 좌절도 쉼 없이 이어진다. 아무리 이야기의 법칙을 잘 아는 소설가라도 삶이 던지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구를 매번 의연하게 받아 내기는 어렵다. 문지혁 역시 “실전에서 어디 그렇습니까? 현실은 이야기처럼 단순하지 않잖아요.”라고 수긍하고 말 정도다.

 

『실전 한국어』가 이야기로써 도약하는 대목은 바로 이 수긍 뒤에 나온다. 이야기를 잘 만드는 법을 설명하던 강의는 어느새 이야기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삶의 영역에 다다른다. 수업 시간마다 몰래 막걸리를 마셔서 신경에 거슬리던 문제적 학생이 어느 날 문지혁에게 묻는다. “이 세상엔 말 안 되는 얘기들투성이 아뇨? 내 아들놈 인생부터가 그렇지 않습니까?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놈이 죽었어요.” 

 

죽을 이유가 없는 아들이 죽었다는, 그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 소설가이자 선생님인 문지혁은 섣불리 어떤 답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이런 문장을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이야기란 말이 안 되는 것들을 모아 말이 되게 만드는 일이다. 인생이란 말이 되던 것들도 말이 안 되게 돌변하는 곳이다. 스토리텔링은 우주의 진실이 무의미에 있다는 것을 훔쳐보게 된 인간이 만들어 낸 연약하고도 유일한 방패다. 우리를 저 비정하고 가혹한 무의미로부터 지켜 주는 것.” (204쪽)

 

이야기는 늘 삶의 가장 적절한 비유다. 탄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삶의 유한성은 첫 장에서 마지막 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간과 닮아 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삶의 주인공이고 고난과 역경은 주인공이라면 으레 겪기 마련인 시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생이란 종종 어떤 인과로도 명백하게 설명되지 않는 무자비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불가해함 앞에서 이야기는 충분한 설명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야기를 붙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연약하고도 유일한 방패’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 방패가 결코 전능하지 않다는 것. 이야기는 죽음을 되돌리지 못하고 상실을 설명하지 못하며 무의미를 제거하지도 못한다. 다만, 우리를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을 뿐이다. 『실전 한국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야기와 삶 중 어느 쪽이 더 강한지가 아니다. 삶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도 끝내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에 가깝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가르침은 거장들의 거창한 스토리텔링 이론이 아니라 문지혁이 딸 은채와 주고받는 끝말잇기에 담겨있다. “아빠 우리 끝말잇기 하자”는 은채의 메일이 도착하면 문지혁은 무조건 그 놀이에 응해야 한다. 다람쥐, 쥐구멍, 멍게, 게시판…으로 이어지는, 의미도 목적도 불분명해 보이는 이 기약 없는 이어 말하기가 어쩌면 이야기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지도 모른다. 쥐구멍이라는 단어가 도착하면 ‘멍’으로 시작되는 또 다른 무슨 말이라도 내어놓는 것. 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저녁, 멀리 환하게 빛나는 편의점을 가리키며 아이는 말한다. “우리 모험을 떠나는 것 같애.” 그 여정에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이야기라는 방패가 있는 한 삶이라는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삶과 이야기에 대한 비유를 좋아한 나머지 그런 비유들만을 따로 모아놓은 노션 페이지가 있다. 예컨대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김연수, 『소설가의 일』), “우리는 늘 우리 삶의 허구적 판본들, 서로 모순되지만 얽혀 있는 이야기들을 쓰고 있고, 그 이야기들은 아무리 은근히 또는 터무니없이 날조된 것이라고 해도, 현실을 지탱하게 해주며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가운데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필립 로스, 『왜 쓰는가』) 같은 문장들.

 

그 페이지가 계속해서 길어진 이유는 삶이 늘 내게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럼에도 늘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조금 더 알게 되면 조금 더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반대로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실전 한국어』를 읽은 뒤 새로 옮겨 적은 문장은 이것이다. 

 

우리의 사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인생이란 결국 자기 단어장에 적힌 어휘를 늘려가는 과정에 불과하다”(233쪽)

 

그러니 계속-쓰기는 계속-살기일 수 있고, 이 이야기는 아마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써보지 못한 문장이 내게도 남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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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한국어

<문지혁>

출판사 | 민음사

왜 쓰는가

<필립 로스> 저/<정영목> 역

출판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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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