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어떤 일이든 최악의 결과를 미리 상상해보는 버릇이 있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늦어지면 ‘저번에 내가 말실수해서 정이 떨어졌나?’ 곱씹으며 생각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면 인도로 돌진하는 차를 상상하면서 듬직한 가로수 뒤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긴다. 여행을 떠날 때도 최악의 상상은 마치 여행 계획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외국에서 죽으면 유해를 송환해야 할 텐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 가족 중에 내줄 사람이 있을까? 괜히 돈 쓰지 말고 현지에서 화장해달라고 유언장에 남겨둬야 하나.’ 각종 사건사고를 시뮬레이션해보다가 내 목숨값이 3억 정도는 되어야지 싶어 더 비싼 여행자보험에 가입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데도 주변에서 느긋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친구에게 답장이 오면 빠르게 안심하고, 외출했다가 무사히 집에 돌아오면 그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행기가 연착되거나 수하물을 잃어버리는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의 일이어서 여행을 망치지 못한다. 내 마음의 평화는 대개 ‘그래도 최악은 아니니까.’에서 시작된다. 한 마디로 나의 긍정은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거나 당장의 행복을 찾는 비결은 못 된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지 않는 수동적인 현실 인식에 가깝다. 이런 행태를 이다와 나는 ‘강제긍정’이라고 부른다.
이런 강제긍정은 타고난 성격이라기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습관에 가깝다. 비위를 맞추기 힘들었던 아버지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최악의 상상은 언제든 현실로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내 주변을 기웃거렸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갈까, 아니면 누군가 울게 될까. 어린 나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최악이 아닌 것들을 되새겼다. 문을 잠글 수 있는 내 방이 있는 것, 굶지 않아도 되는 것, 밤에 몰래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을 들을 수 있는 것, 학교에 가면 만화책을 돌려볼 친구들이 있는 것…….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못 견딜 만한 최악을 겪은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나는 사사건건 걱정하고 실패부터 상상하지만 덕분에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는다. 기대치가 남들보다 지하 5층 정도는 낮은 것 같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다.
이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보다 강제긍정의 레벨이 높았다. 현실에 빠르게 순응하는 것이 1레벨이라면, 단점을 창조적으로 미화시키는 능력은 한참 높은 수준이다. 동거를 시작했을 때 나는 쪼렙이었고, 이다는 중급 이상의 강제긍정 고인물이었다.
“이 동네에 이만한 집 없어.”라는 말은, 거들먹거리는 집주인 아저씨보다 이다에게 먼저 들었다. 처음에는 집주인에게 세뇌를 당했나 싶었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애잔했다. 스무 살에 포항에서 서울로 상경한 이다는 대학 기숙사에서 고시원으로, 고시원에서 하숙집으로, 하숙집에서 반전세 옥탑으로 터를 옮겨왔다. 그의 입장에서는 거실이 있는데 월세가 20만 원이라니, 거저나 다름없었다. 공용 화장실이 아닌 단독 화장실을 가졌는데 불 좀 안 들어온들 어떤가. 비가 올 때마다 천장이 뚫릴까 걱정이지만, 알람이 울릴 때마다 벽을 치는 옆방 고시생이 없다면 그 정도 고난은 견딜 만한 것이다.
광주광역시에서 경기도 부천으로 독립을 하면서 나도 원미동 옥탑방의 일원이 되었다. 옥탑의 면적은 광주집에서 내가 지내던 방만 했고 이웃들은 주차 문제로 매일같이 언성을 높였지만 덕분에 외로울 틈이 없었다. 적막하고 넓은 방에서 자기연민과 한탄을 일삼던 20대의 나르시시스트는 밤낮으로 시끄러운 동네와 어두운 골목길의 공포를 체감하면서 눈앞의 현실에 발을 디뎠다. 얼마 안 가 내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왔다. “이 동네에 이만한 집 없겠는데?” 그렇다. 탁 트인 전경으로 원미산의 사계절이 보이고, 맑은 날 빨래를 널면 수건에서 나른한 볕 냄새가 났다. 유성우가 쏟아지던 새벽에는 옥상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침낭에 들어가 밤하늘을 구경했다. 강제긍정의 레벨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사람은 낭만을 추구한다. 낭만은 현실의 악조건을 외면하고 ‘지금 이 순간’을 미화하는 최고의 연료이다.
이다와 나는 부실하고 초라한 옥탑을 열심히 꾸몄다. 빛이 잘 드는 창가에 식물들을 키우고, 얼마 없는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며 분위기를 바꾸고,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예쁜 천을 끊어다가 작업 공간과 살림 공간을 분리했다. 동선이 비좁아 무언가의 모서리에 허벅지나 정강이를 찧는 일이 많았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밥을 하고 빵을 굽고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원미동 옥탑방은 우리에게 충분한 보금자리였다. 적어도 그 집에 살 때는 그랬다.
임차계약이 끝나는 순간, 강제긍정의 마법은 풀렸다. 견딜 필요가 없어지자 그동안 외면했던 단점들을 곱씹게 됐다. 젖어서 구멍이 뚫린 천장, 기울어진 바닥,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곰팡이 벽, 해마다 무당집이 늘어가는 동네, 전두환 집권 시절에 돈을 많이 벌었다며 자랑하던 집주인 아저씨……. 좋은 추억도 많지만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울 성북구의 주택에 빠르게 적응했다. ‘양한재(養閑齋:한가로움을 기르는 집)’라는 멋스러운 이름이 붙은 붉은 벽돌집은 지은 지 50년이 다 된 구옥이었지만 안팎으로 단정하고 말끔했다. 거실이 넓고 교통 여건이 좋아 워크숍을 열거나 손님들이 방문하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이사한 뒤 얼마 안 가 옆집에서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학로 배우들의 연습실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원치 않는 문화 생활이 지속되었다. 집 앞에는 배달 음식 쓰레기와 마시다 만 음료 컵이 쌓였고, 지저분한 환경은 동네 흡연자들에게 내 한몸 부릴 곳은 바로 이곳이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한 마디로 흡연 명소가 되었다는 말이다. 담배 냄새에 익숙해지려고 차라리 내가 담배를 피울까 고민하기도 했다. 사람이 오가기 좋은 동네는, 온갖 소음과 담배 연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2년 만에 양한재를 떠나 은평구의 한 빌라로 이사했다. 영화 <인셉션>의 뒤집힌 도로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미러 디멘션을 연상케 하는 가파른 언덕에 놀랐지만, 막상 살아보니 언덕 빼고는 단점이 거의 없었다(반박 시 내가 맞음). 베란다에 들이치는 빗물은 반려식물들에게 이로웠고, 탑층이라 층간소음 걱정도 없었다. 바람이 거센 날이면 집을 뒤흔드는 벤틸레이터(돔 모양의 은색 날개가 달린 회전식 환풍기) 소음에 기겁하곤 했는데, 익숙해지니 별것 아니었다. 급기야 “저 소리 계속 듣다 보니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데?”라는 말을 뱉었을 때, 이다가 보인 어이없는 표정이 생각난다. “나도 나지만, 너도 너다…….” 음, 나도 이제 강제긍정 중급 레벨쯤은 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강제긍정의 원조 격 인물이 있다. 디즈니 프린세스 신데렐라다. 하루 종일 고된 집안일과 괴롭힘에 시달리고, 쥐들과 다락방에서 잠드는 신세가 그리 희망적이고 즐거울 리 없다. 신데렐라의 미소와 너그러움은 수행하듯이 단련해온 강제긍정의 부산물이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신데렐라는 어떻게든 만족했을 것이다. 낭만을 좇는 사람의 특권이니까.
결국 낭만을 잃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미화할 수 있고, 움푹 팬 장판처럼 어차피 견뎌내야 할 환경이라면 무엇이든 긍정할 수 있다. 지금 사는 집의 좋은 점을 들자면 지면을 가득 채워도 모자랄 것 같다. 그것이 실제이든 강제긍정이든 이다와 내가 내릴 결론은 늘 같다.
“지금 사는 집이 제일 좋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포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 내내 쉬지 않고 다이어리를 썼다. 지은 책으로 『이다의 자연 관찰 일기』, 『이다의 도시관찰일기』, 『어린이 탐구 생활』이 있으며, 『내 손으로, 치앙마이』, 『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 100퍼센트 손으로 쓰고 그린 여행 노트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모호연
평소 가까운 물건의 생애와 쓸모에 관심이 많다. 우산수리팀 ‘호우호우’ 소속으로 우산수리 마스터가 되기 위해 매주 우산을 고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반려공구』, 『반려 물건』,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공저)가 있다. 공구를 체험할 수 있는 공방을 만들어 수리 문화를 확대하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다.
![[책 읽는 아이들] 어서 와, 서점은 처음이지? | 예스24](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4/20260406-1d2ee6b9.jpg)
![[더뮤지컬] <THE WASP> 예측할 수 없는 | 예스24](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3/20260311-734b92b1.jpg)
![[에디터의 장바구니] 『깨닫다!』 『텍스트 기억 연습』 외](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2/20251224-39995f16.jpg)
![[최현우 칼럼] 우리의 매직 캐슬](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2/20251209-2b16cf22.jpg)
![[김해인의 만화절경] 올해의 만화](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2/20251208-f7342428.jpg)
11층달팽이
2026.07.09
누구나에게 있는 소심함과 대범함을 끄집어 가시화해주는 이다님과 모호연님께 감사드립니다.
mini79pink
2026.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