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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내가 두 번 샀던 시집 | 예스24
시집을 태워버린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뒤로 몹시 큰 후회를 하다가 다시 구매하고는 딱 한 편의 시만 귀퉁이를 접어두었다.
글: 서윤후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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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시집을 소개하는 원고를 연재하면서 가장 좋고도 낯선 경험 중 하나는 바로 읽었던 시집을 다시 꺼내어 보는 일이다. 나는 한 번 완독한 시집은 다시 읽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한 번 읽을 때 전력을 다하고 싶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넘겨 짚는 습관을 고치고 싶기에. 처음 읽었을 때의 감상을 오염되지 않게 기억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리고 오래전에 읽은 시집에서 옛날 생각이 흘러나오면 무척 곤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재하는 동안에 기쁨과 괴로움이 교차했다. 십몇 년 전에 읽고 처음 꺼낸 시집에선 먼지가 폴폴 날렸다. 귀퉁이를 접어둔 좋았던 시가 이제는 감흥이 없고, 다시 읽은 시들 중에 귀퉁이를 새로이 접어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읽지 않는 규칙을 어겼을 만큼 좋아했던 몇몇 시집들을 꺼내어 보았는데…… 이상하리만치 깨끗하다. 판권을 보니 내가 구매해서 읽었던 날로부터도 한참 지나 있었다. 복간본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아, 두 번 산 시집이구나. 이것은 두 번 산 시집에 관한 이야기다.

 

같은 책을 두 번이나 사는 일은 얼마나 될까? 책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나에게는 꽤 드문 일이다. 주변에 글을 쓰는 사람이 무척 많기에 책 선물은 더더욱 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름 사연을 간직하고서 내게 한 번 더 오게 된 시집들. 소중하다는 말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나를 다 내어주듯 건네주었던 일 뒤로 새하얗게 빛바래 있는 시집들, 그 갈피에서 꺼낸 이야기들이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저 | 문학과지성사

 

아껴라, 아껴라,

시대(時代)의 불.

살벌하고 냉엄한 때가 온다.

날카로운 석기(石器)의 연장도 재가 되고

불과 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원시인(原始人)의 눈물로도 감출 수 없던

어둡고 긴 밤의 우리들의 꿈.

 

잊지 마라,

낮게 타는 불은 산 위에 서고

빙판에 붙는 불은

우리들의 끝없는 대답이다.

 

(「빙하시대(氷河時代)의 불」의 부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26-27쪽)

 

이 시집에는 한자가 정말 많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 바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포털 사이트에서 필기 인식으로 한자를 일일이 적어 검색했어야만 했다.(옥편을 열심히 찾아보기도 했었다) 강의 중 교수님이 시를 읽어보라고 시키거든, 한자를 읽지 못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찾아 연필로 음독(音讀)해 두었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읽은 이 시집을 통해 마종기 시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일련의 번거로운 과정은 내가 스스로 시를 찾아왔다는 이상한 안도감을 주기도 했고, 암호 해독에 성공한 백만장자의 집도둑처럼 묘한 성취감을 주기도 했다. 겹겹의 시간이 쌓여 있던 이 시집을 그때 좋아하던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다. 물론 거짓말을 보탰다. 네가 읽기 쉽게 한자 음도 모두 적어놓았어. 정말? 너 너무 사려깊다………(침묵) 부모님이 즐겨듣던 전영록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처럼, 정말이지 연필로 쓴 사랑이었다. 그 사람과는 잘 되지 않았다. 그 후로 시집 선물에 대한 징크스가 생겼다. 한자는 해독할 수 있어도, 끝끝내 풀지 못하는 마음이 사람에게 있었다. “우리들의 끝없는 대답”이 여기에 적혀 있고, 한자의 음을 다시 연필로 새록새록 옮기지 못한 채로 깨끗한 시집에는 한자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그래도 이 시만큼은 읽을 수 있다. 시인이 내게 붙여준 불씨가 빙판을 가르며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제오르제 바코비아 저/ 김정환 역 | 문학과지성사

 

서리 덮인 정원의 새 한 마리,

차가운 고요 속에 겨울새가 되었다

나는 깨끗한 거리 위로 재채기를 하였다

아직 낙엽들이 모두 떨어지지는 않았다.

 

단 한번 있었다, 단 한번만 있을 것이다

하늘은 입을 다물지만, 사람은 말을 한다

오직 지금만이 다시 오지 못할 순간이라고……

이제, 깊이 책을 닫는다.

 

(「풍요」의 부분, 『납』 122쪽)

 

군대에서는 예외로 한 권의 시집을 반복해서 읽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드리웠던 어떤 기피증이 있었다. 제한된 환경에서 내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될 때의 이상한 허망함이 나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으니까. 내가 보내는 한 철의 시간이 무덤 옆에서 지내는 것처럼 어둑하다고 느껴져서 이 시집이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 시집은 언어로 세운 무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루마니아의 저녁처럼 끈적이고 지독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코비아니즘’이라고 불리는 그 특유의 분위기는 이후 내 시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와 닮은 시를 만날 때 나는 삽시간에 언어의 창틀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다시 빠져나오고 나면 내가 한둘이 아니라는 위안을 느끼곤 했었다. 오랜만에 펼친 이 시집에선 딱 한 편의 시만 귀퉁이가 접혀 있다. 그리고 한 문장에 이례적으로 형광펜이 칠해져 있다. “기침과 울음은 꿈들을 자아낸다” 이 문장에 기대어 살던 날에 홀로 열고 닫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 대문글에도 이 글귀를 적어둔 적 있었다. 흰 글씨로. 드래그를 해야만 볼 수 있는 흰 글씨의 꿈틀거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단 한번만 있을 것이다”라는 절박함 때문에 괴로운 시간이었고, 나는 미련없이 이 시집을 부대의 소각장에 태워버리고 제대했다. 시집을 태워버린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뒤로 몹시 큰 후회를 하다가 다시 구매하고는 딱 한 편의 시만 귀퉁이를 접어두었다. 그때의 기침과 울음을 기억하고 싶어서. 언젠가 자아낸 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구해주기 위해서.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저 | 창비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오래된 수틀」 전문, 『어두워진다는 것』 42-43쪽)

 

고등학생 때 나는 전국 백일장을 전전하며 시를 썼다. 상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단, 내 시를 누군가가 읽어줄 창구라고 생각했었다. 마땅히 시를 배운 적 없는 내게 교과서 같은 시집이 몇 권 있었다. 그 중에 나희덕 시인의 네 번째 시집에는 내가 애정하는 시들이 많았다. 옆구리를 찌르면 바로 암송할 수도 있는 몇 편의 시들. 그 가운데 「오래된 수틀」은 몇백 번을 필사했던 시다. 이 시를 통해 처음 상실이라는 감각을 느꼈다. 상실이란 내가 나를 완성할 수 없겠구나 예감하며 아득한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시가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가던 날에, 이 시가 나를 완전한 미완의 존재라고 믿게 해주었다. 그것이 큰 안도감을 주었다. 시를 읽고 첨언해줄 이가 전무하던 시골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나를 가르친 적도 없었지만 교무실에서 수줍게 백일장 공문을 받아가던 나를 눈여겨보고는, 쓴 시를 가져와보라고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내 시 위에 적어준 파란펜, 빨간펜 메모들은 내 언어의 신호등이 되어주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나는 교무실로 찾아가 선생님께 이 시집을 건넸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면 그저 카네이션이나 쓸만한 만년필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낡은 시집을 건네면서 저에게 전부나 다름없어요, 라고 했던 대사도 잊히질 않는다. 전부를 주는 마음. 선생님은 다행히 좋아해주었다. 그 후 우연히도 선생님은 2008년에, 나는 2009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가끔 통화로 안부를 나누며 서로의 첫 시집을 기다리던 어느 날,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고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상실을 배웠다. 선생님이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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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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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dlskfk

2026.07.07

시인님의 섬세한 기억이, 다정한 문장이 언제나 저를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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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미의관심사

2026.07.07

마지막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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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봄

2026.07.07

오늘 연재글도 너무 좋아요. 저도 예전에 좋아했던 시집들 다시 꺼내서 읽어봐야겠어요. 그때의 감상과 느낌이 전해져도 좋고 새로운 마음이 생겨도 좋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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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출판사 | 창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제오르제 바코비아> 저/<김정환> 역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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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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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부드러운 언어로 삶의 생채기를 어루만지고 세상의 모든 경계를 감싸안는 시인이다. 1939년 일본 도쿄에서 동화작가 마해송과 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 앉아 혼자 동시를 쓰기 시작했던 소년은 중학생 시절부터 일약 ‘학원’ 문단의 스타가 되어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을 도맡는 등 타고난 시인의 재능을 맘껏 선보인다. 자연스럽게 문인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으나 어려운 고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주위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의대에 진학했다. 1959년 본과 일학년때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면서 ‘의사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 병원에서 수련의 시절을 거쳐 미국 진단방사선과 전문의가 되었고,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및 소아과 교수 시절에는 그해 최고 교수에게 수여하는 ‘황금사과상’을 수상했다. 이후 톨레도 아동병원 방사선과 과장, 부원장까지 역임했고 2002년 의사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실력이 뛰어나고 인간미 넘치는 의사’로서 명성을 쌓았다. 은퇴한 후에는 연세대 의대의 초빙 교수로 본과 2년생에게 새 학과목인 ‘문학과 의학’을 5년간 가르쳤다.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보내야했던 그리움과 고독의 시간을 자신만의 시어로 조탁하여 『조용한 개선』을 시작으로 『두번째 겨울』(1965), 『평균율』(공동시집: 1권 1968, 2권 1972), 『변경의 꽃』 (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그 나라 하늘빛』 (1991), 『이슬의 눈』 (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2006), 『하늘의 맨살』 (2010), 『마흔두 개의 초록』 (2015) 등의 시집을 펴냈다. 그 밖에 『마종기 시전집』 (1999),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2004),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2003)과 『아주 사적인, 긴 만남』(2009),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2010), 『우리 얼마나 함께』 (2013),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2014) 등 수많은 시집을 펴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받았으며, 2009년에는 시 「파타고니아의 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