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연의 장면의 전환
[이자연 칼럼] “너 선 넘었어”, <호프>가 정의한 인간 존재의 필요성 | 예스24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 크리처 서스펜스로 역동하던 영화는 범석(황정민)을 관통하며 완전한 드라마가 된다.
글: 이자연
2026.07.15
작게
크게
공유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호프> 스틸컷


이유를 알 수 없는 잔혹한 죽음이 발생하는 이곳은 호포. 영화 제목과 발음이 비슷한 작은 항구 마을이다. 영화 중간에도 등장하는 호포항 표지판이 무색하게 <호프>는 바다를 일절 보여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한 산속을 조명하길 선택한다. 바다가 드넓게 퍼져 나가는 이미지의 공간이라면, 산은 모든 것을 끌어안고 품어내는 공간으로서 정반대의 이미지를 구가한다. 따라서 영화 <호프>는 항구 마을이라는 구체적 설정을 지니고 있지만 도리어 산기슭을 탐색하며 은밀하게 감춰진 이야기, 문제, 사건, 행적을 좇겠다고 공간적으로 선언한다. (실제로 호포 마을이 외계인의 소행에 비상 사태에 빠지면서도 여전히 고립된 채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이유도 산불이 났기 때문이다. 산맥은 호포 사람들이 미스터리를 추적해나가는 곳인 동시에 문제가 바깥으로 퍼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곳이기도 하다.)

 

<호프>의 줄거리는 심플하다. 갑작스러운 가축과 마을 주민들의 떼죽음. 외계인의 등장. 마을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순경 성애(정호연), 사냥꾼 성기(조인성)의 전투. 그리고 끝없는 추격, 추격, 추격. 영화는 겉으로 인간과 외계인의 싸움을 주요하게 보여주지만, 진짜 핵심은 인간의 '행위와 결정'에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 왜 존재해야만 하는가. 인간이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영화는 이 행위와 결정의 총합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프>는 인간을 미화하지 않는다. 사건을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정면 돌파해야 하는 범석을 보자. 보통 총과 칼로 무장한 영화는 관객이 심리적으로 동행해야 하는 프로타고니스트를 우아하고 근사하게 그린다. 하지만 범석은 어떤 인물인가. 출장소장으로서, 어른으로서, 마을 구성원으로서 재난 상황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고 실행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겁쟁이다. 이 쑥대밭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길 없는 초반 45분 동안 영화는 초조함과 불안함을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혼자 가기 싫어하고, 현장에 뛰어들길 망설이는 쫄보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다리 밑으로 몸을 숨긴 노인이 말한다.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이 저쪽으로 갔다고. 목격담을 따라 달려나가려던 범석이 주춤거리며 묻는다. "여기 계실 거예요? 그냥 궁금해서요..."

 

영화 <호프> 스틸컷


범석은 그런 사람이다. 자기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란 걸 잘 알지만 두려움을 딱히 숨기지 못하는 인간형. 모든 것을 타고난 운명처럼 척척 처리해내는 히어로가 아니라, 무수한 망설임을 몇 번이나 딛고 일어서야 그제야 해내는 인간. 하지만 여기서 잠시 정지. 그렇다면 영화는 범석의 나약함을 친근하고 온기 있는 인간적임으로 치환하고 싶은 것일까. 그건 아니다. 공포심이 극에 달한 범석은 결국 총기를 아무렇게나 난사한 끝에 친구 경석에게 중상을 입히고 만다. 오직 지구 생명체만을 공격하는, 동족끼리는 결코 위해하지 않는 외계인들과 달리 두려움에 내몰린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을 난처하게 만든다. 

 

범석은 그중에서도 <호프>가 정의 내린 인간의 의미를 가장 중심부로 종횡하는 인물이다. 마을 청년 양배(음문석)가 자신이 외계인을 잡았다고 시신을 자랑할 때 범석은 그것을 보고 이상한 점을 간파한다. 자신이 잡은 외계인과 다르게 작고, 둥글고, 가녀리다고. 그리고 말한다. "아... 어린 애구나?" 청년은 자꾸만 히죽거리며 반문한다. "인간도 아닌데 이게 뭐 문제 된대요?" 집 앞마당 곳곳에 온갖 가축을 박제하는 것은 물론 여성 신체 훼손을 암시하는 마네킹 전시까지 한 양배는 자신보다 물리적으로 열등한 모든 것을 납치해도, 겁박해도, 과시해도 된다고 믿는 인간상이라면 범석은 그것에 일일이 제동을 거는 인간상이다. "웃어? 어린 것을 죽여놓고 미안하지도 않아? 네가 인간이냐?" 

 

따라서 단순 크리처 서스펜스로 역동하던 영화는 범석을 관통하며 완전한 드라마가 된다. 스펙타클이 정점에 다다르는 호포 시내에서의 카체이싱 시퀀스. 첫 번째 외계인과 목숨 건 혈투를 벌이던 중 외계인의 눈물을 목격한 순간, 배우 황정민은 느닷없이 서사를 제 몸으로 체화해내고 만다. 일순간 풀려버리는 얼굴 근육, 느슨해지는 미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동자. 이종(異種)의 공포와 억울함을 읽어버린 인간, 그게 범석이다. 

 

영화 <호프> 스틸컷

 

인간의 원죄, 도덕, 윤리, 인륜을 범석이 짚어낸다면 외계인의 소행은 누가 판단할까. 황홀한 드리프트로 영화의 새로운 챕터를 여는 인물, 바로 성애다. (실제로 칸영화제에서 정호연의 등장신에서 첫 번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온 마을이 초토화가 된 상황에서도 성애는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질문을 건넨다. "넌 선을 넘었어." "아무리 괴물이라도 이런 법은 없는 거예요. 이건 너무하잖아요." 성애는 순경으로서 순경의 일이 아닌 것까지 감내하는 헌신적이고 봉사적인 사람인 만큼 제 안에 명백한 도덕적 기준이 있기에 외계인의 행동까지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영화가 범석을 인간의 윤리적 원죄를 짚어내는 사람으로 그렸다면, 성애는 인간이든 괴물이든 외계인이든 우리에게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농촌 매드맥스로 재현되는 <호프>에서 크리처를 잠시 제거하고 나면 인간과 이종의 전투라는 비극적이고 참담한 현상이 눈에 들어오고 만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재앙을 스스로 불러올 만큼 비윤리적이고 어리석고 잔혹하다. 동시에 제 죄를 빠르게 인지하고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적군의 마음까지도 이해한다. 결국 이 양가적 모순이 역설적으로 <호프>가 남긴 인간의 희망이고 유산이다. 이 지리멸렬한 싸움은 종국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건 아마도 본능적인 공포심에도 끝끝내 총기와 운전대를 손에 놓지 않았던 '진짜 인간'을 목격한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여기에 기록돼 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Writer Avatar

이자연

가족들이 일터로 떠난 빈집에서 텔레비전과 한 몸처럼 지내다가 어느덧 대중문화 비평을 말하는 어른이 됐다. 페미니즘 미디어 비평서 『어제 그거 봤어?』를 썼고, 한겨레신문 칼럼니스트 공모전에 당선되어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성 문화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 《씨네21》>의 영화 기자로 활동 중이다. 목동불주먹이자 <슬램덩크> 사랑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