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리딩런
[리딩런] 닮고 싶은 장면을 수집합니다 | 예스24
오하림 카피라이터가 글을 쓰고 싶지만 모니터의 빈 커서 앞에서 머뭇거려본 이들과 나누고 싶은 책을 소개합니다.
글: 오하림
2026.07.21
작게
크게
공유

“읽고 쓰는 만큼 달린다!” 리딩런 시즌2는 책을 읽은 시간과 도서 리뷰가 독서 거리로 환산되어 기부금이 적립되는 독서 캠페인입니다.(여기서 참여 가능!) 혹시 글을 쓰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는 정확해서 아름답고 때로는 질감이 생생해서 잊히지 않는 장면들을 수집해 온 오하림 카피라이터가 글쓰기의 든든한 동력이 되어 줄 세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

 


안녕하세요, 카피라이터 오하림입니다. 

 

보통 카피라이터라고 하면 멋진 글만을 생각하지만, 광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면이 빠질 수 없습니다. 글이 하지 못한 말을 장면이, 장면이 못한 말을 글이 해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항상 고민하는 것이 글과 장면의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가끔은 장면만으로 설명되는 이야기가 있고, 또 가끔은 장면 필요 없이 글만으로 충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둘의 힘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내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부터 감정까지 남김없이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고민을 통해 탄생한 것이 저의 최근 도서 『일본 광고 카피 도감』의 표지였습니다. 이 책의 표지를 기획할 때, 유명한 사진이나 아름다운 일러스트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다소 건조한 제목이 전할 수 없는 가치를 표지가 전해주기를 바랐고, 감정이라는 것은 사람의 눈을 통해 전달된다 믿었기에 표지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필요했죠. 


 

처음엔 누구를 섭외해야 하나, 어떤 포토그래퍼와 찍어야 하나 고민이었지만 AI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대신 어딘가를 응시하는 '사람의 얼굴'을 담았습니다.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까지 독자가 표지에서 읽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미드저니와 그록을 한 달 넘게 괴롭히면서 수백 장의 얼굴을 비교하며, 마지막에 몇 가지 추려진 얼굴들은 책 크기로 프린트해 서점 매대에 놓고 시뮬레이션 해보기도 하는 요상한 작업까지 거쳤답니다. 각자가 해석한 다양한 감정이 이 장면을 통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거기에 나만의 시선으로 포착한 장면을 얹는다면 단순한 단어에 질감과 에너지가 생길 수 있겠지요.

 

본격적으로 나만의 글을 써보고 싶지만 여전히 모니터의 빈 커서 앞에서 머뭇거리는 분들을 위해, 저의 비밀스러운 '장면 수집함'에서 꺼낸 세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각기 다른 장면과 에너지를 가진 이 책은 든든한 글쓰기의 동력이 되어줄 겁니다.


『데뷔의 순간』

주성철 저 | 푸른숲

 

글을 쓰고 싶다는 부푼 마음을 품고 처음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 마주하는 가장 큰 장벽은 '시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하얀 모니터를 바라보며 막막해하는 스타터에게 저는 한국 영화 거장들의 시작을 다룬 『데뷔의 순간』을 권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거장이 된 감독들이지만, 그들에게도 단 한 줄의 시나리오를 쥐고 밤을 지새우며 흔들리던 변변치 못한 ‘처음’이 있었습니다. 돈도, 배경도 없이 오직 쓰고 만들겠다는 열망 하나로 빈 페이지를 가득 채워나갔던 이들의 뜨겁고 치열한 에너지는 책장을 넘기는 내내 제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박찬욱 감독님께는 죄송하지만, ‘자기가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할 것 같은 착각이라도 하며 살아야 그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다’라는 그의 말에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 저 거장도 처음이 있었고, 미완인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요. 모두가 멋진 성공의 장면을 꿈꿀 때, 오히려 머쓱한 시작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시작에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의 기쁨』

유병욱 저 | 북하우스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길을 잃거나, 내가 쓴 문장이 어쩐지 푸석푸석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창작의 무력감이 찾아오는 이 하프코스 길목에서 제가 부적처럼 꺼내 드는 책은 바로 카피라이터 유병욱의 『생각의 기쁨』입니다.

 

이 책은 일상의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발견들이 어떻게 단단한 생각의 뼈대가 되고, 최종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훅 움직이는 카피와 문장으로 치환되는지 그 마법 같은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저자가 텍스트와 감각을 다루는 집요하고도 유연한 태도를 보고 있으면, '나도 이토록 밀도 높고 흡인력 있는 장면을 빚어내고 싶다'는 창작욕이 다시금 세차게 들끓곤 합니다.

 

글이 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이 책을 펼치면,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어제의 기억과 오늘 아침의 풍경까지도 모두 근사한 글감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문장에 쫄깃한 리듬을 부여하고, 느슨해진 생각의 날을 예리하게 벼리고 싶을 때마다 늘 곁에 두고 펼쳐봐야 할 든든한 페이스메이커로 제격입니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저/김욱 역 | 책읽는고양이


글 한 편을 온전한 호흡으로 완성해나가는 마지막 마라톤 코스에서는, 잘 쓰는 스킬보다 '나를 지키며 끝까지 쓰는 단단한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끊임없이 남의 글과 내 글을 비교하게 되고, 그에 따라 판단력은 흐려지고, '내가 쓴 글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긴긴 고독의 마라톤 중간 지점에서 저는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를 건네고 싶습니다.

 

작가는 특유의 명징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의 내면을 직시할 때 비로소 진짜 내 삶과 보폭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재들의 출처는 저자의 순탄치 않았던 인생입니다. 쉽지 않은 인생을 버텨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읽다 보면 어떤 진리에 도달한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달할 때에는 폭발할 듯한 에너지보다는 약간의 처연한 마음을 선호합니다. 한 발짝 나의 생을 타자화하며 동시에 나에게 딥 다이브할 수 있기도 하니까요.

 

화려한 수식어를 털어내고 나만의 가장 솔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 그리하여 지치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마지막 문장까지 달려가는 법. 이 책이 품고 있는 담백하고 묵직한 태도를 꼭꼭 씹어 삼키다 보면, 어느새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가장 단단하고 고유한 세계를 흰 종이 위에 멋지게 완주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의 댓글
User Avatar

애니쌤

2026.07.25

하림님의 안내를 받으니 오늘은 글 한편 부담을 덜고 써내려갈 수 있을거 같아요
답글
1
0

생각의 기쁨

<유병욱>

출판사 | 북하우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저/<김욱> 역

출판사 | 책읽는고양이

Writer Avatar

오하림

멋진 선배들이 많은 광고회사 TBWA KOREA에서 행복하고 오랜 카피라이터 시절을 보냈다. 이후 무신사를 거쳐 29CM 헤드 카피라이터로 일했으며, 4.5만 팔로워 ‘내가 광고회사 힘들다 그랬잖아’와 6만 팔로워 ‘도보마포’를 만든 기획자이기도 하다. 현재는 1만 명이 지켜보는 ‘일본광고’ 계정에 집중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잊지 않기 위해 모아두고 싶고, 모아놓고 보면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