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는 박상영 소설가가 『1차원이 되고 싶어』 이후 5년 만에 세상에 내어 놓는 장편소설입니다. 자이니치이자 가족이라곤 오직 엄마뿐이었던 주인공 ‘하나’가 갑작스런 화재로 인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며 그간 전혀 알지 못했던 엄마의 비밀한 과거와 자기 삶의 진실을 향해 달려나가는 미스터리 소설이죠. 그나저나 어째서 미스터리였을까요. 질문했을 때 박상영 소설가는 미스터리를 “저의 문학적인 본류”라고 답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탐독했던 어린 시절부터 꼭 데뷔 10년을 맞은 시점에 “아예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박상영표 미스터리 장편소설에는 아주 많은 시간이 축적되어 있는 셈입니다.
물론 고민도 많았습니다. 한국 재벌사와 현대사를 통과하는 커다란 이야기인만큼 소설가로서 내려야 했던 문학적 선택도 있었고요. 돈, 인간의 욕망, 복수와 망한 사랑 등 수많은 주제들에 대한 소설가 자신의 생각이 재설정되면서 이야기가 풀려나간 순간도 있었습니다. 다시, 356쪽에 달하는 한 권의 소설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담겨 있는지 한참 가늠해보았는데요. 그러나 독자는 그저 즐길 의무만 있을 뿐이죠. 첫 장을 열면 끝까지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강한 인력을 기꺼이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는 단연 그런 이야기니까요.
“조금 달라진 저를 너그러이 기쁘게 받아주시면 좋겠어요. 물론 또 쓰던 거 쓸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가 재미있으셨다면 이런 것 역시 또 쓸 테니까 독자 여러분들께서 적극적으로 피드백 주시면 좋겠어요. 그러면 자판기처럼(웃음) 원하는 대로 해드릴게요.”
작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는 2023년, 예스24의 크레마 오리지널로 연재했던 작품이기도 해요. 오랜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고요.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작가님의 마음이 궁금합니다.
처음으로 전작을 읽었던 작가가 애거서 크리스티예요. 그만큼 미스터리는 너무나 좋아하는, 저의 문학적인 본류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걸 잘 쓰고 싶어서 애쓰다 보니까 시간이 길어졌어요. 그 사이 『믿음에 대하여』의 드라마 작업처럼 여러 일을 병행하기도 했고요. 소설로 4년, 장편으로 5년이 지났잖아요. 소설책을 내는 감각이 너무 그리웠어요.
소설을 쓸 때, 과연 끝이 나기는 할까 생각하는데 이번에 그 생각이 가장 컸어요. 쓰는 도중 몇 번이나 중단하기도 했고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수 탄 적도 있거든요. 원래 저는 연락도 잘하고, 마감도 잘 안 넘기는 편이에요. 수요일이 마감이면 화요일 밤에 무조건 드렸어요. 기획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잡지사 에디터로 일했으니, 못 쓰는 것보다 기한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데요. 이 소설은 도저히 완성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엄청 힘들게 완성한 이야기인 셈인데,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났나요?
선배 작가님들 말씀이 도움이 됐어요. 장르에 도전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완성 못 할 것 같다고 걱정했더니, 한 선생님은 인물 한 명에게 너를 묻히면 된다고 조언해주셨어요. 원래 언제나 마음을 다 쏟아서 쓰는 건 힘든 일이라는 말씀도 들었고요. 지금까지의 소설이 스스로를 내던져서 쓰는 종류의 글이었다면 이제는 그간 읽어온 바를 바탕으로 구성도 하고, 여러 작법을 통해 완성하는 소설도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쓰다가 중단하고 안 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말씀도 있었어요.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덕분에 완성한 셈이에요. 수십 년 써온 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건 모든 작가들이 겪는 과정이구나, 생각할 수 있었어요.
올해는 꼭 데뷔 10년이 되는 해잖아요. 작가 인생으로 보아도 이 소설이 아주 중요한 변곡점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야말로 터닝 포인트예요. 그동안 발표한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삼십 몇 년 치 제 삶의 기록과 흔적, 나의 문제들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생각해요. 『믿음에 대하여』를 쓰면서는 시즌 2를 건너왔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 소설에 동시대의, 저와 비슷한 세대의 문제점을 기록하면서도 저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썼고요. 그러면서 나와 다른 세상을 쓰는 것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동시에 느꼈어요. 앞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고 싶다, 아예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어요. 그러니까 시즌 2를 화려하게 열고 싶다는 생각이 이 소설에 있는 거예요. 저에게는 굉장히 의미가 있어요.
마침내 완성했을 때의 감상은 얼마나 남달랐을까요.
사실 완성한 것은 바로 어제예요. 어제까지 완성 안 된 느낌이었거든요. 내내 마음이 불안했어요. 리얼리즘 일상물, 로맨스 소설가로서는 10년의 경력을 갖고 있지만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가로서는 경력이 길지 않잖아요. 그래서 가늠이 안 되더라고요. 이것을 완성본이라 할 수 있나,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걱정을 했는데요. 어제 최종교를 보면서 완성된 것 같다, 돈 주고 팔아도 된다(웃음)는 느낌을 받았어요. 너무 후회하거나 걱정하지 말자고, 나는 소임을 다 했다고 생각했죠.
저를 좋아하는 독자분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을 테고요. 이 소설은 그것을 어떤 면에서 배반하는 소설이거든요. 그래서 10년 동안 알토란 같이 모은 한 줌의 독자마저 잃어버릴까 걱정이 됐는데요. 어제는 내 독자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동시대 퀴어 로맨스를 써서 저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고 제 핵심적 문제나 소설적 재미에 감응해서 좋아하시는 게 아닐까, 하고요. 저 역시 그런 독자니까요.

수많은 취재와 소설적 선택
미스터리를 작가님의 문학적 본류라고 하셨는데요.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이야기의 구상이 시작됐을 때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1차원이 되고 싶어』도 스릴러 기법을 사용한 소설이죠. 성장물로 분류되지만, 데드 바디로 시작하는 소설이잖아요. 생각해보면 동시대 대부분의 좋은 소설은 스릴러적 기법을 차용하고 있기도 해요. 그만큼 독자에게 깊은 몰입감을 선사하고, 서스펜스를 제공하는 장르가 스릴러 같아요. 그 가운데 정통 추리소설은 장벽도 낮거든요. 애거서 크리스티를 초등학생이던 제가 읽을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그동안 써온 소설이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누구라도 편하게 읽을 소설을 써서 독자층을 더 넓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청소년 분들, 혹은 저희 엄마와 아빠 세대의 분들이 읽어도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할 만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항상 있었고요. 그게 이번 시도로 이어진 것이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당시는 어떤 고민이 있었던 건가요?
저는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남성이고요. 대구 출신에 비교적 가난한 집에서 자랐는데요. 소설 속 인물 대부분은 50-60년대에 태어난 재벌들이잖아요. 그들의 내면 혹은 삶의 형태를 제대로 파고 들어가기가 어려웠어요. 공부를 정말 많이 했죠. 실제로 재벌 2세, 3세 분들을 만나 인터뷰도 했고요. 관련된 논문이나 서적, 방송도 많이 봤어요. ‘소비더머니’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요. 재벌사를 다룬 코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기도 했어요. 매일 ASMR처럼 영상을 틀어놓고 공부했거든요. 보면서 이 사람들이 이런 내면을 갖고, 이런 배경에서 성공을 할 수 있었구나, 이렇게 도산했구나, 공부했고요. 그러면서 소설 속 인물들이 지난 삶의 궤적을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무엇보다 그 점 때문에 ‘하나’라는 주인공 인물을 내세운 거죠. 저와 나이도 비슷한 인물이고요. 억지로 일본으로 가서 살아야만 했던 사람의 불편감과 소수성, 울분 같은 것들에 이입하려고 했어요. 저 역시 여러 삶의 소수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동주’도 그래요. 모든 걸 다 갖고 태어났지만 여성이라는 소수성 하나로 모든 면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잖아요. 거울상처럼 두 여성 인물, 욕망 가득한 인물들을 설정하고 나니까 이들에게 이입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면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생각하게 됐어요.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결핍을 펼쳐내면서 소설을 썼던 거죠. 성공해서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도 컸거든요. 하나와 동주 역시 그러한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서 쓸 수 있었어요.
자이니치, IMF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들이 소설 전체에 점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서사와 역사적 사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도 중요했을 듯해요. 현실을 소설에 담는 과정에서, 어떤 기준을 품고 계셨나요?
일단 어느 가문, 어떤 사람의 이야기처럼 읽히고 싶지 않았어요. 지나치게 재벌 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 레벨이 중요했어요. 사실 모두가 재벌이라는 키워드를 사랑하잖아요. 대중 매체에서 수없이 다룬 콘텐츠고요. 그 맥락에서 기시감을 뛰어넘는 게 중요했죠. 내면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예요. 그러느라 소설에는 가볍게 훑고 지나갔지만, 만약 TV 드라마로 만든다면 30-40분짜리 에피소드가 될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특히 2부 내용의 경우, 이야기들을 다 다루면 16부작 드라마가 나올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과감하게 삭제하는 쪽을 택한 거죠. 소설은 내면의 창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 엄청난 대사건들은 가볍게 넘어가기로 했어요. IMF가 왔다, 호텔이 망했다, 어느 기업이 잡아 먹었다, 하는 식으로요. 그것이 가장 소설적 선택이었어요.
소설 쓰는 일이란 정말 비효율적이네요.(웃음) 그 많은 자료를 다 공부했지만 한 줄로 가볍게 써야 한다는 것이 말이에요.
나중에 어디서 잘난 척 할 수는 있겠죠.(웃음) 실은 그 자체로 너무 흥미롭기도 했어요. 끝까지 올라갔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얘기 너무 엄청나잖아요. 선택 한 번 잘못하면 인생이 날아 가는 것도 순식간이고요. 돈과 삶의 속성을 정말 깊게 성찰할 기회가 된 과정이기도 했는데요. 실은 저에게 가난을 숨겨야 한다는 콤플렉스가 있었거든요. 또 부유하게, 기복 없이 자란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요. 소설을 쓰면서 그 결핍이 저의 작가 활동에 큰 동력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만약 저들 같은 상황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이렇게 열심히 작품 활동 못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매 순간 목숨 걸고 써요. 진짜 이거 아니면 끝난다는 생각으로 쓰거든요. 그것이 제 삶에 좋은 것인지는 미지수지만, 그 덕분에 이 정도라도 해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재벌사를 공부하면서 저 자신을 오히려 긍정하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미친 여자들을 쓰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한순간 주인공 ‘하나’가 돈을 원하는 장면이 등장하거든요. "단 한 번도 꿈꿔본 적 없고 실체조차 알지 못하는 그것을 어느새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이 온갖 부정한 비리와 뒤틀린 욕망, 타인의 핏방울로 엮어 올린 왕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것을 쓰고 싶어졌다.”(190쪽)고 한 부분인데요. 인터뷰에서 밝힐 수 없지만 소설의 결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열망을 분명하게 짚어주셨다는 점에 재차 눈길이 가요. 어떤 생각을 담고 싶으셨던 건지 들려주세요.
그 이야기를 좀 더 시간 들여서 길게 써볼까 생각하기도 했는데요. 분량 문제도 있고,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얘기가 더 담겨야 하는 것이라 쓰지 않았어요. 어떤 점에서 아쉽긴 하지만 고민 끝에 딱 효과적으로 그 생각 부분만 보여주자 판단한 거예요. 실은 하나가 제 마음을 대변해 준 거죠. 저희가 어릴 적만 해도 돈 많은 걸 자랑하는 것이 천대 받는 문화가 있었잖아요. 대중 매체에서도 돈 얘기를 많이 하지 않고요. 어쩌면 그런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기도 한 것 같아요. 돈을 돈으로서 투명하게 바라보려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하나가 그 성찰을 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어요. 이 소설을 쓰면서 사회 구조 속에서 돈과 권력이 특정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를 저도 많이 성찰했거든요. 그 문제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려고 했어요.
결말에 대한 고민도 많으셨겠죠! 처음부터 지금의 결말을 확정하고 진행하신 것인지, 쓰면서 생각한 것과 다른 결말이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해요.
3장을 쓰기 전까지도 결말을 안 정했었어요. 그게 소설 쓰는 재미이기도, 어려움이기도 했죠. 범인 후보가 여러 명 있었는데요. 과연 어떤 사람이어야 제일 카타르시스가 느껴질까, 과연 데드 바디의 주인공이 누구여야 할까, 고민하면서 써 나갔어요. 한편 초반부에 결정해둔 설정이 몇 가지 있었거든요. 때문에 머릿속에서 수많은 트릭과 경우의 수를 만들어 가면서 쓰는 과정이 있었고요. 그것이 묘미였어요. 가야 할 방향성은 확실히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서사의 주축은 모두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여성의 사회 진출에 있어 문턱이 많이 낮아졌지만요. 여전히 기업인들, 특히 임원 비중을 보면 여성의 비중이 현저히 낮아요. 대졸자의 경우, 여성 비율이 거의 절반이고 사법고시 등의 합격률은 심지어 여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는데요. 기업 임원 중 여성 비율이 한 자릿수 혹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는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사어가 된 ‘남아 선호 사상’이 여전히 적용이 되는 곳이 재벌가이고요. 그 안에서 울분을 갖고 자란 여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모든 사건의 주축인 것이 저는 이 소설의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 끝에 선택한 결말이었어요.
미쳐버리는 여자들, 폭주하는 여자들 덕분에 읽는 쾌가 컸던 것 같아요.
각각이 여러 방식으로 미쳤죠. 저도 미친 여자들을 쓰면서 너무 행복했어요.(웃음) 흔히 많은 분들이 『1차원이 되고 싶어』의 ‘해리’나 『대도시의 사랑법』의 ‘영’과 같은 화자를 저라고 생각하세요.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곰곰이 따져보니까 저는 ‘재희’ 같은 캐릭터와 비슷한 성격인 거예요. 속에 화가 많고 다소 화끈한 편이고요. 아닌 건 아닌 거고 갈등을 피하지 않아요. 재희는 영화 개봉 당시에 ‘재희 병’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잖아요. 지랄하지 말라고, 내가 누구랑 섹스하든 상관하지 말라고 마음껏 얘기하는 여성에 대한 선망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요. 그래서 이번에 원 없이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깨달았죠. 여성 캐릭터에 내 자아를 많이 의탁해 놓는 편이구나, 하고요.
정말 쓰고 싶었던 소설인만큼 쓰고 나서 특별히 흡족했던 장면도 있었을 텐데요. 한 장면 꼽아주세요.
경대의 비밀번호를 많이 고민했어요. 고민을 하다가 경대 내용을 빼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도 했는데요. 그 비밀번호를 딱 정하는 순간 됐다, 내가 해냈다(웃음) 생각했어요.
한편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는 지독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해요. “모든 죄와 사랑의 한중간에 함께했던”(300쪽) 관계라는 것을 오래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사랑이기도 증오이기도 한 감정이라는 것. 감정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다채로운지 곱씹게 되더라고요. 작가님이 쓰고 싶었던 것은 어떠한 사랑이었나요?
기본적으로 망한 사랑 얘기를 좋아해요. 작가로서, 독자로서 취향이 그런데요. 사실 사랑 그렇게 아름답거나 대단한 게 아니잖아요. 싸워서 깨지거나 천천히 식어가는 것밖에 없죠.(웃음) 반면 제대로 뭔가를 못 해봤을 때 발생하는 아쉬움, 긴장 등의 감정에 작가로서 굉장히 깊이 관심 갖고 있어요. 망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이 있기도 하고요. 『대도시의 사랑법』에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다”라고 쓰기도 했거든요. 저의 기본적인 가치관이 그런 것 같아요.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도 모두가, 정말이지 모두가(웃음) 망한 사랑을 하고 있잖아요.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요. 기본적으로 저 스스로가 사랑을 비극이라고 생각하고요. 이소라 선생님께서 쓰셨듯이(웃음) 추억은 원래 다르게 적히기 마련이고,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랑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제 모든 소설의 주제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심은경 배우의 추천사가 얼마나 반가우셨을까요. 바로 그 점을 포착하고 있잖아요.
너무 행복했어요. 심은경 배우님이 예전부터 제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몇 번 영화제에서 만날 때마다 늘 너무 좋아해주셨거든요. 워낙 책 읽는 것도 좋아하시잖아요. 좋은 감상평을 써주실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직접 부탁드렸어요. 김은희 작가님께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두 분께 모두 직접 부탁드렸던 이유가 만약 이분들께 인정 받을 수 있다면 이 이야기를 내도 된다, 하는 마음이었고요. 진짜 떨리는 마음으로 드렸죠. 아역 시절부터 심은경 배우님의 작품을 다 봤고, 김은희 작가님 역시 장르물의 대가이시면서 제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를 워낙 많이 쓰셨기 때문에요. 두 분의 추천사가 오자마자 너무 좋았어요. 진짜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 다 들어 있더라고요. 너무나 기뻤어요.

박상영표 미스터리는 계속될 것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라는 제목이었나요?
원래는 ‘요정의 세계’였어요. 2부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그 내용이 소설의 에센스였고, 정말 쓰고 싶었던 거였어요. 배경이 되는 공간이 아주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층고도 높고, 무대도 있고요. 꼭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요정의 세계라는 가제를 썼는데요. 쓰다 보니까 '머리 위에 지푸라기 왕관이 얹혀 있다'고 얘기하는 대목에 닿았어요. 그 말을 보는 순간 이것이 제목이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모두가 왕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찬란한 저 위에 올라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불에 타 없어질 수 있는, 하잘 것 없는 것으로 꼬아 올려진 왕관이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어서 지금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다 쓰면서 지푸라기 왕관이라는 것에 의미가 더해진 것이군요? 이미 타버린 과거의 영광을 말할 때,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이었음을 말할 때, 간절함을 말할 때도 지푸라기와 왕관이 등장하거든요.
기술적인 차원에서 얘기하자면요. 제가 지향하는 것은 잘 읽히는 글쓰기예요. 의미화를 하고, 재정의하고, 줄 치고 싶은 문장 쓰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었는데요. 이번 소설에는 그런 형식의 문장들이 많이 들어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의미나 구조의 측면에서도요. 그래서 나도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웃음) 그런 문장들을 많이 썼어요. 물론 많이 속아내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의도했던 셈이에요. 일상어를 넘어서 독자 분들이 왠지 밑줄 치고, 사진 찍어 올리고 싶은, 삶의 어떤 부분을 담고 있는 문장을 많이 써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애도로서의 용기에 대한 이야기도 꼭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진실 앞에서,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고 그 진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하나의 내면에는 용기, 무엇보다 애도하기 때문에 간신히 쥐어보는 용기가 있다고 여기거든요. 그 발걸음이 독자에게 뜻밖의 위로가 되기도 할 것 같고요. 작가님은 하나가 어떤 인물이기를 바랐나요?
애도의 측면에서, 이 소설의 모든 인물은 애도해야 할 때 제대로 애도하지 못해서 이 모든 사건을 겪습니다. 동주도 그 어떤 애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까 복수와 성공에 미칠 수밖에 없게 됐고요. ‘안광자’ 역시 마찬가지잖아요. 어쩌면 이 소설은 애도 없음에 대한 총서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하나한테는 그런 결핍을 주는 게 중요했죠. 왜냐하면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결핍의 크기가 클수록 서사가 파워풀 해지니까요. 그냥 맹준호랑 말랑말랑하게 아이스크림 먹고 평상에 앉아서 연애했으면 이런 소설이 안 나왔을 거예요.(웃음) 근데 엄마가 죽었으니까 찾아야 하는 상황이고, 그렇게 동력이 생긴 거예요. 때문에 하나를 거의 사지로 몰아넣었는데,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영상화가 되어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집필할 때 영상화에 대한 가능성도 생각하셨나요?
드라마를 쓰면서 동시에 썼던 소설이라 더 그랬어요. 소설에서 생략하고 지나간 장면들에 대해서도 드라마로 쓰면 진짜 재미있을 장면인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이런 갈등 진짜 잘 쓰거든요.(웃음) 드라마라면 얼마나 재미있겠어, 생각했고요. 소설 작업하면서 이걸 드라마로 하면 12부작이나 16부작은 나올 것 같다, 큰 예산을 들여 만들어서 에미상 노리는 프로젝트로 들어가고 싶다, 생각했어요. 다 정해놨어요.(웃음)
실은 이미 여러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연재 끝나고도 네 군데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아마 영상으로도 만나 보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부디 넓은 세상에서 많은 분들과 만나 사랑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박상영표 미스터리는 계속 이어질까요?
아마 쓰지 않을까요? 워낙 좋아하고요. 이 소설을 쓰면서 많이 배웠기 때문에 더 잘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다만 정통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기에 이 소설에는 다른 특성이 있잖아요. 그렇듯 저만이 쓸 수 있는 미스터리를 계속 써 나갈 것 같아요. 곧, 8월부터 창비 매거진에 『여름 복숭아 파티』라는 소설을 쓰는데요. 그것도 미스터리 소설이에요. 죽음을 추적하는 소설이고,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와 아주 다른 형식의 소설이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신연선
읽고 씁니다. 장편소설 『구름이 겹치면』, 에세이 『하필 책이 좋아서』(공저)를 출간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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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의 신작 장편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에서 2020년대 한국 현대 문화의 아이콘 박상영은, 1970~2000년대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재벌가의 암투’나 ‘정경 유착’이라는 논쟁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산뜻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박상영만이 쓸 수 있는 설레는 연애와 청춘의 발랄함, 키치함 그그리고 뿌리와도 같던 퀴어 서사를 모두 비워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성취를 지우고 신인 작가인 것처럼 썼다.
박상영이라는 작가와 함께 동시대를 갈지자(之)로 헤쳐 나가며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한층 더 오묘한 즐거움이다.
“문학은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이크가 돼 준다고 생각합니다.”
― 박상영
시월Shiwol
202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