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 편집자의 문장 수집
[박혜진 칼럼] 명문장은 맥락 속에서 가장 아름답다
박혜진 편집자가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만들며 수집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글: 박혜진 편집자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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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한 달에 한 번 세계문학 속 명문장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한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박혜진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문장 수집을 참 좋아했어요. 시작은 초등학교 3,4학년 때 아버지가 처음 선물해 주신 손바닥만 한 속담집이었어요. 평일에 타지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금요일 밤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사 오신 책이었는데요. 문장과 그림이 같이 있는 어린이 속담집이었어요.

 

“겸손도 지나치면 거만이 된다” 같은 글귀 아래 덩치가 커다란 거인이 자기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사람에게 ‘저처럼 연약한 사람이 어떻게…….’ 하는 익살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죠.


저는 무언가 깨달은 듯 무릎을 치면서 베껴 쓴 종이를 책상 앞에 붙였어요. 그렇게 속담, 격언, 에세이, 소설, 교과서, 책에 둘러져 있던 띠지 문구까지……. 문제는 점점 감동의 역치가 낮아져서 어떤 문장이든 쉽게 감동받았고, 금세 수집한 문장들이 천장까지 닿았어요. 책상 위에 올라가서 까치발을 들고 메모를 붙이다가 엄마에게 무당집이냐고 혼이 난 적도 있었죠. 그래도 꿋꿋이 옆 벽으로 옮겨가서 행거 위에도 명문장을 붙이던, 저에게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출판사에 입사해 매해 세계문학 일력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한 문장씩 고전 속 명문장을 읽는다!’라는 콘셉트로 365개의 문장을 소개하는 일이었어요. 늘 제가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었고요. 그래도 해외문학 팀에서 가장 자주 담당자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 년 전부터는 일력이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출시되어 정말 많은 분들께 사랑을 받으면서 보람도 커졌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명문장을 새롭게 수집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책을 읽다가 밑줄 쳐 둔 문장을 그대로 가져와 달력에 넣어 보면, 분명히 명문장이었는데, 명문장이 아닌 게 되었거든요……?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인생역정이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내며 한 문장으로 모이는 순간, 그러니까 맥락 속에서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대목은 그 부분만 뚝 떼어 놓고 보면 평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독자님들께 이런 말도 자주 들었어요. “일력에 있는 문장이 너무 좋아서 책에서 다시 찾아봤는데, 그냥 지나가는 문장이던데요?”

 

SNS에 바이럴 되기 위해서는 짧고 강렬하며 감각적인 문장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고전 속 명문장들은 대개 저마다의 맥락 속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어릴 적 제가 책상 앞에 잔뜩 붙여 두었던 속담이나 격언이 아니라, 문학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 명문장을 ‘해석’ 하는, 유행에 다소 뒤처지고 살짝 구질구질 하기까지 한 글을 써 보려 해요. 설명해야 하면 이미 명문장이 아닌 게야,라고 말하는 소리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려오지만요. 한편으로는 어떤 문장이 왜 좋은지를 설명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집요하고 이상한 기쁨이 차오릅니다.

 

자, 자다가 이불킥하며 일어나게 하는 실수담으로 시작해 볼까요? 저는 이 문장만 떠올리면 너무 창피해서 숨고 싶어지는데요.


어느 해 6월 14일 세계문학전집 캘린더


“사랑을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 인간다운 사랑을 해야 돼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오, 좋다. 요즘 너무 비인간적인 사랑이 많은 것 같아, 뉴스만 봐도 무서워…… 인간적인 사랑을 해야지, 암.”

 

언젠가 밑줄 쳐두었던 문장을 달력에 옮기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다운’이라는 말은 오독의 여지없이 긍정적으로(p) 읽혔거든요. 그런데 몇 달 뒤 오랜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어 보니 내용이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작가 괴테의 분신이기도 한 소설 속 화자 ‘나’가 친구에게 편지를 통해 자신의 사랑관을 이야기하는 부분인데요.

 

“이것 보게! 내가 자네에게 비유를 하나 들어 주지. 그것은 사랑의 경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청년이 어떤 아가씨에게 연정을 품고, 날이면 날마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며, 모든 정력과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자기가 그녀를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음을 줄곧 나타내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때 속물 하나가, 즉 어떤 공직에 종사하는 남자가 나타나서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여보시오, 젊은 양반, 내 말 좀 들어봐요! 사랑을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 인간다운 사랑을 해야 돼요. 자기의 시간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일하는 데 쓰고, 다른 한쪽, 즉 쉬는 시간을 여자에게 바치도록 해야지요. 당신의 재산을 헤아려보고 꼭 필요한 경비를 뺀 다음, 나머지를 가지고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것쯤은 나도 말리지 않아요. 그것도 너무 자주 해서는 못 쓰고 여자의 생일이라든가 세례일 같은 날에만 해야지요.’”

 

여기서 ‘인간답게 사랑한다’라는 것은, 적당하게 사랑한다’ ‘계획적으로 사랑한다’ ‘합리적으로 사랑한다’라는 뜻으로 모든 정력과 재산을 쏟아붓는 화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대비됩니다. 

 

그래서 그 다음 대목에서 ‘나’는 이렇게 덧붙이지요. “만약에 그 젊은이가 그런 충고에 따른다면 그는 쓸 만한 인물은 될 것이다. 나도 그런 젊은이라면 어떤 영주에게나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추천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애인으로서의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러니까 ‘인간다운 사랑’은 화자에게는 시시하고, 관습적이며 그래서 가장 비인간적인 사랑인 셈입니다. ‘나’는 이런 세상의 흔하디 흔한 사랑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던 것이에요. 세상에, 반어법에 속다니!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 실수를 그해 6월 14일이 지나가기 전에 미리 깨닫고 독자님들의 채찍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편집자 님, 이건 그런 뜻이 아니지 않나요?’ 하지만 유월이 다 가도록 단 한 건의 독자문의도 들어오지 않았죠. 오히려 SNS에서 이 문장이 활발하게 바이럴되었어요. 음, 이 문장은 맥락과 무관하게 사랑받고 있구나. 우리 모두 자기 식대로 이 문장을 가졌구나! 그것이 결코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 문장의 진면목을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이 문장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거든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스물다섯 살 때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샤로테 부프라는 여인을 사랑했던 자전적 경험을 녹여 쓴 것인데요. 소설 속 1771년 6월 16일의 편지에 ‘나’가 샤로테를 처음 만난 날과,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슬픔과 기쁨을 자세하게 묘사해 두었어요. 그런데 ‘인간다운 사랑’을 역설하는 이 문장은 샤로테를 만나기 이전인 5월 26일에 쓴 것입니다. 즉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해 본 적 없는 청년이 자신이 추구하는 연애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얼마나 구체적이고 자신만만한지 이미 그런 사랑을 해 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귀엽죠?)

 

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 쌍방의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사랑 밖에서 사랑을 발명하는 이들보다 더 사랑에 대해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요.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에게는 ‘말’이 필요 없으니까요.) 저도 스물다섯 살에 첫 연애를 했는데요. 제 여동생은 스물다섯 살 이전에 제가 미니홈피에 썼던 글들이 단연 최고라고, 그 이후에는 그런 글들을 다시 쓰지 못했다고 놀리듯 얘기합니다. 이십 대 초반의 저는 제 삶의 맥락에서 사랑을 바라보았거든요. 그래서 그때 제가 말했던 사랑은 곧 저이기도 해요.

 

마찬가지로 1771년 5월 26일, 곧 일생일대의 사랑에 빠질 운명을 모르고 있던 청년 ‘나’의 사랑론은 곧 ‘나’의 인생론 그리고 예술론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날의 편지에서, “사랑하는 벗들이여, 천재의 흐름 양쪽 기슭에는 태연자약한 신사들이 산다.”라고 말하는데요. ‘나’는 신사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합리적이고 그럴듯하지만 이들처럼 ‘닥쳐올 위험’을 미리 대비하는 조심성 있는 사람들은 진짜 예술을 할 수 없다고 역설합니다. 반대로 천재들은 자신을 흔드는 위험에 기꺼이 몸을 던지죠. 네, 청년 괴테 그의 사랑론과 예술론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언제나 가장 비인간적인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었던 스물다섯 살의 괴테. 자기 영혼의 양쪽 기슭을 허물고, 둑을 무너뜨릴 연인을 기다렸던 괴테. 그리고 진짜 그런 사랑에 빠졌던 괴테. 어쩌면 우리는 자기가 준비해 놓은 그릇만큼만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 자신이라는 맥락을 뛰어넘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얼마 전 게스트로 출연했던 한 토크쇼에서 ‘시절 인연’을 ‘명문장’에 빗대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시절 인연은 불교에서 만남과 헤어짐에 때가 있다는 뜻인데요. 인연이 맺어지고 해소되는 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명문장과 그것이 속한 맥락의 관계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맥락과 동떨어져 있어도 아름다운 문장이 있지만, 대부분의 명문장은 맥락과 합치할 때 가장 아름다워요. 그러니 지금 그 사람과 예전처럼 가깝고 친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그 시절 내 삶의 맥락에서 완벽했다면, 그것으로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솔직한 마음은 조금은 섭섭하기도 합니다. 성숙한 태도를 갖는다고 해서, 섭섭한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닌가 봐요. 이제는 용건 없이 연락할 수 없어서, 큰 경조사는 알 수 있지만 감기가 걸리고 낫는 것은 알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 친구 안부를 물어 올 때 나도 아는 게 없어서…… 하지만 우리가 맥락에서 벗어난 옛 친구를 여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좋아하듯, 고전 속 명문장 역시 내 마음대로 오독하고 품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게 아닌지요. 

 

당신이 품은 명문장은 무엇인가요? 그 문장은 당신 안에서 어떻게 오해되고 있나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2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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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i7

2026.08.14

혜진님의 유투브속 이야기를 들으면 같은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나 하며 무릎을 치게되었는데 , 글도 역시 무릎을 치게 만드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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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tlfu

2026.08.10

저는 박혜진 편집자님 팬입니다. 유튜브에서, 이렇게 칼럼에서 해주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제 마음에 와 콕콕 박힙니다♡ 언제나 응원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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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og89

2026.08.08

저도 시도해봤는데 자꾸 감동의 역치가 낮아진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맥락에서의 감동 역시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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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볼프강폰 괴테> 저/<박찬기> 역

출판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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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 편집자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책을 기획, 편집하고 소개하는 일을 합니다. 유튜브 채널 '민음사TV'에서 '세문전 독서클럽'을 진행하고 있으며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속 작은 코너 '박혜진의 클래식은 영원하다'와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속 작은 코너 '박혜진의 고전 덕질'에 고정 출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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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