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내내 ‘일 만화’만 봤다. 일 만화란? 말 그대로 일 때문에 보는 만화를 의미한다. 6월 초 도쿄 출장을 다녀오면서 현지 서점에서 한가득 구매해 온 만화들을 검토했다. 내리읽었으나 절반도 읽지 못한 사이 출판만화 위탁 판매전 ‘칸새’가 다가왔다. 올해도 우리 만화편집부는 현장에서 창작자들을 만나 원고와 작품 활동 등에 대해 상담하는 출장 편집부로 참여했기에 상담을 신청한 분들의 원고를 또 내리읽었다. 그러는 사이에 서울국제도서전이 다가왔다. (그만, 제발 그만…) 도서전에 맞추어 해외 출판사들이 한국에 미팅을 왔고, 만화편집부에 검토를 희망하거나 소개해주고 싶다는 작품들이 여럿 있어서 그것을 또 내리 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6월이 지나 7월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검토, 검토, 검토 중이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검토해야 할 작품이 쌓여가고 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받은 것 외에도 순전히 스스로 관심이 가서 검토하고 싶은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까지 포함하면 아마 7월에도 이 검토 행진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좀 편하게, 한국어로 만화 읽고 싶다고 빌고 싶은 심정이다.
칸새 출장 편집부 ⓒ김해인
‘검토’와 ‘감상’은 다르다. 감상은 그냥 맘 편하게 읽으면 된다. 주인공에게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대로, 큰 사건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주인공이 다른 등장인물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 맺는 대로, 아무 관계도 맺지 않으면 맺지 않는 대로. 오오, 그렇구나, 아이고, 그랬구나. 그래서 이러이러한 만화가 그려졌다고 합니다! 감상하는 동안의 나는 주인공에 한껏 이입할 수도 있다. 으,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살면서 그런 극단적 상황, 이를테면 한쪽 팔다리를 대가로 누군가를 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일 리가 절대 없는데도…) 마음껏 슬퍼하고 기뻐하고 욕하고 눈물짓는다. 그것이 독자의 특권이다. 내 취향이면 얼씨구나 하고 (세상에 작가님도 체면과 체통이 있는 분이실 텐데 이런 걸 그려주시다니, 하는 생각으로 정말 감사히) 읽으면 되고, 재미없으면 언제든 사정없이 책장을 덮어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독자. 읽고 맛보고 즐기면 그걸로 할 일을 다 하는 자유로운 독자.
검토할 때는 다르다. 주인공에게 사건이 일어나면 주인공에게서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충분한 사건이었는지 따져본다. 주인공이 다른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으면 그 관계가 얼마나 구체적인지도 생각해본다. 사건과 관계가 약하진 않은지, 급하진 않은지, 너무 보여준 것은 아닌지, 반대로 너무 감춘 것은 아닌지. 다른 만화랑 비교했을 때 뭐가 다른지, 또는 너무 유사하진 않은지. 그래서 이 작품이 완결성이 있는지, 뒷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면 다음이 궁금해지는지 등 검토할 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그 순간 나는 독자가 아니니까. 이 만화를 수입해와야 하는 입장, 혹은 이 만화를 조금이라도 더 재밌게 만들기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입장이니까. 제발 재밌어라(혹은 재밌어져라)! 좀 제발! 하면서 읽는 업자니까. 오이시쿠나레도 아니고 이게 뭔… 물론 너무 재밌는 작품이면 이런 걸 다 잊고 푹 빠져 읽기야 하지만, 아무리 그런 만화라 해도 “이 컷은 카메라를 조금만 더 얼굴 쪽으로 두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는 한마디가 나오는 것이 검토의 현실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검토 렌즈를 감상 렌즈로 전환하지 않았더니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모처럼 짬이 나 5월에 읽었던 『요괴소년 호야』를 이어서 읽으려고 13권을 펼쳤는데 12권까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호야가 지금 요괴가 되어서 미쳐 날뛰고 있는데 얘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났다. 그래서 12권을 펼쳤다. 그런데 11권까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대체 호야 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몇천 년 전 중국에 떨어져 있는 거니? 미안하다. 이 정도 전개면 너한테 무슨 큰일이 있긴 있었나본데 네가 엄마를 찾으러 떠나왔던 것 말곤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근데 나도 너만큼이나 많은 일이 있었어. 우리 어머니는 그냥 집에 누워 계신데도……)

단지 『요괴소년 호야』뿐 아니라 새로운 만화를 보려고 펼쳐도 전혀 감상 렌즈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비와 흙』을 읽을 때 역시 그랬다. 아아, 이 BL 현지에서 연재했을 때부터 검토했던 만화였지(뒷짐 짐). 어디 한번 봐볼까?(팔짱 낌) 으아아아악 제발 그만해 제발~~~!!! 분석하지 마. 검토하지 마~~~!!! 그냥 읽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 크나큰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다가 나 점점 검토 렌즈로만 만화를 보게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선 안 되는데… 아니 그러기 싫은데… 언젠가는 다시 순수한 만화책의 독자로 돌아가는 것이 내 꿈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이 렌즈의 가장 무섭고 끔찍한 것은, 내가 뭐라도 된 마냥 만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나 뭐 안 되는데 어디서 뒷짐 지고 팔짱 끼고 만화 보며 분석질 하고 있냐고. 이런 스스로를 느낄 때마다 진짜 패버리고 싶다. 매타작을 하고 싶다. 나가라. 만화를 그딴 식으로 볼 거면 나가라고.
하여튼 계속 이런 렌즈로 만화를 읽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7월 두번째 토요일, 나는 모든 PDF를 껐다. (보통 검토서나 출간 전 원고는 PDF 파일로 열람한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만화책을 펼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후지모토 타츠키의 『안녕, 에리』. 며칠 전에 친구가 『안녕, 에리』를 안 읽었는데 읽을지 말지 물어보길래 네가 내 친구 중에 진도도 제일 느리고, 나 너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고 호통을 쳐서 그런가, 그날따라 『룩백』 옆에 꽂힌 『안녕, 에리』가 더 눈에 들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은 『안녕, 에리』는 재밌었다. 말도 안 되게 잘 만든 재밌는 만화였다. 『안녕, 에리』는 아픈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촬영해 문화제에서 발표한 유타가 혹평을 듣자, 유일하게 그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에리가 더 좋은 영화를 찍어보자며 그와 함께 영화 제작에 나서는 이야기다. 영화를 찍으면 찍을수록 유타의 사정과 에리의 비밀이 드러나는데, 중간부터는 어디까지가 두 사람이 찍고 있는 영화의 일부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불분명해지면서 혼란스러워진다.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로 보던 첫 감상과 달리 이번엔 긴장 풀고 기꺼이 속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읽으니, 마지막 ‘그 장면’도 굉장히 깜찍스러운 엔딩으로 다가왔다. 후지모토 타츠키 만화에서 “그럼 후지노는 만화를 왜 그려?”(『룩백』)라는 대사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번에야말로 모두를 펑펑 울리지 않을래?”라는 에리의 대사가 그만큼이나 좋아졌다. 아니, 『안녕, 에리』도 『룩백』만큼이나 좋아졌다. 두고 보라는 마음, 마냥 순수함으로 이겨내기 버거워진 어른에게는 가끔 필요해서 원.

그다음으로 읽은 것은 후지타 카즈히로의 『고스트 앤드 레이디』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요괴소년 호야』를 그린 작가기도 하다.) 아직 7월인데도 내 마음속 올해의 만화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깊은 우울증에 빠진 나이팅게일과 그런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연극광(狂) 유령이다. 부모로부터 자신의 쓸모와 존재를 부정당한 나이팅게일은 종군간호사가 되어 영국의 군인과 병든 약자들을 위해 그야말로 온몸과 정신을 헌신한다. 자신은 어차피 죽고 싶고 죽어도 되니까, 정말로 절망하여 죽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 만큼 더 열악하고 큰 고통이 기다리는 곳을 찾아나선다. 그래서일까? 그 어떤 곳도, 험악한 인물도 그녀를 절망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나이팅게일은 언제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 손을 뻗는다. 내가 가장 감격했던 장면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최소한의 위생조차 허락되지 못했던 환자들이 처음으로 받아본 진실된 보살핌에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촛불에 비친 나이팅게일의 그림자에 눈물을 흘리며 키스하는 장면이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더욱 강해져가는 그녀를 오랜 시간 지켜본 유령은 이윽고 깨닫는다. 당신이 비극의 여배우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까, 지금 이대로 살아도 좋다고. 이런 만화를 볼 때면 깨닫는다. 나는 이런 것을 위해 만화를 검토하고 편집하고 만들고 있는 것뿐이라고. 별게 아니라 단지 이런 걸 만나는 순간만을 위해서.
하루 종일 수박을 먹으며 좋아하는 만화들을 다시 본 그날이 내게는 아주 짧은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다. 만화를 보는 내내 실컷 감탄했고 마음껏 울고 웃었다. 나는 내가 나를 완전히 내버려둘 수 있을지 몰랐는데 그럴 수 있더라. 만화로 뭘 어쩌겠다는 생각 전혀 없이, 순수하게 좋아하는 만화를 읽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내가 만화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마음이었다. 재밌는 만화를 읽고 싶다. 좋은 만화를 만나고 싶다. 그 재미와 좋음이 무엇인지는 이제 다시 쌓여 있는 검토서들을 읽으며 이야길 해봐야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재밌는 만화를 정의하려고 할수록 구리다. 순수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보아라.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내가 언젠가 그저 독자였던 날들처럼.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요괴소년 호야 완전판 1
출판사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루비] 비와 흙
출판사 | 현대지능개발사
안녕, 에리
출판사 | 학산문화사
흑박물관 고스트 앤드 레이디 1
출판사 | 학산문화사
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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