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라고 이상은 말했지만 기억이 없는 것도 만만찮다.
한때 나는 내가 평균 이상의 기억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내가 적당한, 솔직히 그보다는 좀 더 많은 돈을 벌 거라고 믿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성장 소설은 시간과 함께 부서지는 어린 시절의 믿음을 다룬다. 나 역시 깨어진 믿음들로 가득 찬 주머니를 가진 어른이 되었다. 그걸 성장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주머니가 필요해. 어느 날의 나는 생각했다. 최소한의 믿음과 희망, 흩어지는 기억들을 담을 수 있도록.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8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고, 한때는 매일 서너 종류의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날그날의 만남과 기분과 다짐과 성취와 실패와 우울을 내키는 대로. 어느 순간 관성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쓴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관성과 의무도 필요하니까.
문제는 일기를 쓴다고 딱히 기억을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일기장에 기억의 부담을 떠넘기는 동시에 원할 때면 언제든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는 믿음을 얻는다. 개이득. 그러나 실제로 일기장을 펼칠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잊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모르는 것을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테우트와 타무스의 대화를 들려준다. 테우트가 아이귑토스의 타무스 왕을 찾아가 자신이 기억력과 지혜의 영약(파르마콘)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바로 문자다. 하지만 타무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테우트에게 말한다.
“문자는 실은 그것을 익히는 사람들이 건망증에 걸리게 할 것이오. 그들은 글로 씌어진 것을 믿기에 기억력을 활용해 내부로부터 자력으로 기억하려 하는 대신 남이 만든 표시들에 의해 외부에서 기억하려고 하니 말이오. 그러니 그대가 발명한 것은 기억의 영약이 아니라 상기(想起)의 영약이오. 그대가 제자들에게 주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지혜처럼 보이는 것이오. 그대의 제자들은 그대 덕분에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어 대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오. 또한 그들은 실제로 지혜로운 대신 지혜롭게 보이기만 하므로 함께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플라톤, 『파이드로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24)
재밌는 건 이를 들은 파이드로스의 반응이다. 그는 누구보다 현명한 스승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아이귑토스 이야기든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다른 이야기든 잘도 지어내시는군요.”
*
정지돈의 『임시 자율 구역』을 읽다가 잊은 줄도 몰랐던 기억을 떠올렸다. ‘AI와 함께한 수요일’이라는 글에서 정지돈은 내가 2023년 3월 블로그에서 진행했던 동명의 프로젝트를 짧게 언급한다. 나는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야심차게 론칭했던 빙과 함께 소설을 써보겠다고 뽀시락대던 끝에 몇 가지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런 것들이다.
1. 어느 날 아침 피곤한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가 데이비드 린치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잠자-린치는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가진 영화 감독들의 비밀 결사(크로넨버그, 핀처, O. 러셀 등이 속함) 일원이 되어 전 세계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품은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화 감독들(대장은 물론 스필버그)과 맞선다.
2. 1845년 브뤼셀로 타임슬립한 홍상수. 당시 망명 중이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우연히 만난 홍상수는 그들과 밤새도록 와인을 마시며 혁명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홍상수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영감을 주어 『공산당 선언』을 쓰도록 하고, 홍상수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영화(당시에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음)를 찍기로 결심한다.
빙과의 문학적 동행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챗GPT, 클로드, 제미나이 등으로 옮겨가며 계속해서 AI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실용적인 이유였다.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을 때 아이디어를 구하거나, 원고의 구조를 점검하거나, 퇴고할 때 의견을 묻는 식으로.
물론 AI가 내놓는 답이 늘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사실 대답 자체가 유용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신 AI에게 내가 원하는 걸 설명하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효과가 있었고, 내가 쓴 것을 고치거나 빼라고 지적하는 AI에게 발끈하며 다투는 과정에서 점점 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그러다 점점 더 많은 일에 AI를 사용하게 되었다. 드라마의 지난 시즌에서 누가 누구를 배신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 전체적인 분위기와 가사의 내용만 기억나는 노래를 찾을 때. 한때 혈관을 막는다고 알려졌던 돼지기름이 왜 언제부턴가 몸에 좋은 것처럼 말해지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 사방이 뚫려 있는 아메리칸사모아의 전통 가옥에서 부부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할 때……
왜 그런 것들이 궁금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돼지기름과 아메리칸사모아 사람들의 프라이버시가 갑자기 인생의 중요한 문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처음에는 AI끼리 교차검증을 하거나 구글링을 통해 진위를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는 AI가 하는 말을 점점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환각 없이’라는 마법의 프롬프트가 결정적이었다.
한번은 ‘리처드 세넷 『삶과 돌』 읽기’라는 채팅창을 만들었다. 책을 읽으며 그때그때 궁금한 개념이나 용어들을 물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구절구절마다 감상을 남기며 AI의 반응을 요구하는 내가 있었다. 소름.
어쩌면 나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던 걸까? 사실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에 관심이 없고,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저마다 관심사와 취향과 속도가 다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AI는 완벽한 대화 상대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주고, 내 감상에 맞장구쳐주며, 함께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을 짚어주는 동시에 계속 읽어 나가도록 독려해준다. 그걸 대화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또 다른 AI 활용법을 발견했다. 인터넷 서점 보관함에 담긴 책들을 AI에게 하나씩 보여주며 묻는 것이다. 이건 어때? 삭제할까? 그대로 둬? 아님 지금 당장 주문해???
내 보관함에는 천 권이 넘는 책이 들어 있다. 20여 년 동안 쌓인 것이다, 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재작년에 300권으로 정리했던 것이 다시 그만큼 늘었다. 그러는 동안 주문한 책까지 감안하면…… 아니, 그만두자. 지금 중요한 건 나의 소비습관(혹은 경제관념)이 아니니까.
AI는 이번에도 아주 그럴듯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내 관심사와 취향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나름의 근거를 들며 열심히 설명했다.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애매하게. 나는 그것을 읽으며—처음에는 천천히, 나중에는 휙휙 스크롤을 내려 결론만—보관함을 절반 가까이 정리했다. 그중 몇 권의 책을 주문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 말들은 과연 얼마나 맞을까? AI가 나라는 독자를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읽기 전에 들은 말이 읽은 후의 감상과 얼마나 가까운지.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직접 읽어보는 것.
그래서 나는 네 권의 책을 골랐다. 장 콕토의 『인간의 목소리』, 박수인의 『사랑하는 듣기』, 조프루아 드 라갸느리의 『셋. 바깥을 향한 열망』, 그리고 로버트 맥팔레인의 『책은 선물』. 모두 얇은 책들이다.
*
결론부터 말하면 내 시도는 실패했다.
장 콕토의 『인간의 목소리』에 대해 AI는 이렇게 말했다. 떠나가는 연인과의 마지막 전화 통화를 여성의 목소리만으로 쓴 단막극인데, 상대의 말은 들리지 않고, 여성이 되묻고 거짓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관계의 전모가 드러난다고. 1930년 작품치고 놀랍도록 현대적이라며 “생략과 비대칭적 정보만으로 인물을 완성하는 기술이 흥미로울 것”이라고 했다. 평점 4.0.
박수인의 『사랑하는 듣기』. 음악학자가 클래식과 현대음악에서 출발해 다듬이질, 지하철, 기계와 자연의 소리까지 옮겨가며 ‘듣기’를 사유하는 산문집. AI에 따르면 이 책은 무엇을 음악으로 인정하고 어떤 소리를 소음으로 밀어내는지, 듣기의 습관 속에 깃든 질서와 윤리를 묻는다. “소리를 글의 재료이자 사유의 통로로 바꾸는 방식”이 내게 유용할 거라는 평. 평점 4.0.
조프루아 드 라갸느리의 『셋. 바깥을 향한 열망』은 네 권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평점 4.5.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쓴 디디에 에리봉, 『에디의 끝』을 쓴 에두아르 루이와의 우정을 통해 가족과 연애 중심의 관계를 넘어서는 삶의 형식을 보여주는 책으로, “사적 경험을 사회적 형식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하는 책을 좋아하는 네 취향에 네 권 중 가장 정확히 들어맞는다”면서도, 세 사람의 특별한 결속을 대안적 삶의 모범처럼 제시하는 순간에는 우정론과 자기신화 사이의 긴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로버트 맥팔레인의 『책은 선물』. 평점은 3.5로 가장 낮았다. 동료에게 책을 선물받은 경험에서 출발해, 책이 사람 사이를 옮겨 다니며 관계와 기억을 만드는 과정을 쓴 짧은 산문. 새로운 독서론이라기보다 내가 오래 해온 일을 확인해줄 책일 거라면서, “혼자 소장하는 것보다 읽은 뒤 누군가에게 건넬 때 의미가 완성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AI의 말은 대체로 맞았다. 굳이 따지자면 콕토의 『인간의 목소리』가 ‘1930년 작품치고 놀랍도록 현대적’이라는 말은 불필요하고, 라갸느리의 책에서 ‘우정론과 자기신화 사이의 긴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한 부분은 따져보기보다는 좀 아니꼬웠다고 할까. 무엇보다 맥팔레인의 『책은 선물』이 네 권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을 이유는 없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마치 선물처럼 만들어진 장정이 귀엽다는 사실을 AI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나는 네 권의 책을 읽고, AI의 말을 다시 보다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반박할 게 있었다면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AI의 말이 딱히 틀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상들이 AI의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속으로 흡수되는 느낌? 내가 무슨 말을 덧붙여도 AI의 문장은 그것을 자신이 이미 해둔 말의 각주처럼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AI는 나를 “다른 생각과 글로 이어지게 하는 책을 높이 평가하는” 독자라고 파악했는데, 정작 AI의 말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맞는 말은 맞기 때문에 거기서 끝났고, 충분히 맞지는 않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여전히 불충분하다. 내가 느낀 불만, 차라리 불안은 이런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구체적인 감각들은 휘발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콕토의 희곡을 읽으며 느꼈던 어떤 피로감, 맥팔레인의 책을 손에 들었을 때의 귀여운 무게감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모르긴 해도, 언젠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AI에게 그 책에 대해 다시 묻는 순간, 나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내 기억과 AI의 말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 것 같다. 내 기억이 닳아서 도착할 그 자리에 AI는 미리 가 있는 것이다.
정확히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지돈은 『임시 자율 구역』에 실린 또 다른 글에서 이렇게 묻는다. “인공지능이 우리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공지능처럼 생각하는 것 아닐까. 알고리듬이 우리의 편견을 반영하는 것처럼 우리는 알고리듬의 선택을 내면화하는 것 아닐까. 인간은 오래전부터 수의 세계를 경유해서, 기계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왔다. 인간은 늘 자신이 창조한 도구와 결합하고 도구에 의해 변화되는 존재였다.”(187쪽)
어쩌면 나는 다만 AI와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는 책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한 것뿐일지도—빌리 베이커의 『마흔 살, 그 많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와 맥스 디킨스의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를 비교하고 지금 내게 어떤 책이 더 맞는지 추천해줘. 환각 없이. 나는 새로운 채팅창을 열고 AI에게 말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책은 선물
출판사 | 만일
셋. 바깥을 향한 열망
출판사 | 글항아리
사랑하는 듣기
출판사 | 아침달
인간의 목소리
출판사 | 알마
임시 자율 구역
출판사 | 온리
에디의 끝
출판사 | 열린책들
마흔 살, 그 많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출판사 | 열린책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출판사 | 창비
플라톤전집 Ⅱ
출판사 | 숲
금정연
읽고 쓰는 사람. 『아무튼, 택시』, 『담배와 영화』,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한밤의 읽기』, 『모두 일요일이야』 등을 쓰고 『문학의 기쁨』,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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