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왔다. 유동룡미술관에서 그가 ‘이타미 준’으로 살아온 시간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물, 바람, 돌을 매개로 세웠던 수, 풍, 석 미술관에 관한 이야기부터 그가 두 이름을 끌어 당기며 살아온 시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리고 두 이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의 활주로를 떠올렸다. 그 활주로처럼 기나긴 복도를 지나면 그가 어머니를 위해 만든 의자가 있고, 나는 그 의자에 앉아서 한 가지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속내에 대해 생각했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지만 향기가 나는 삶의 묶음을 나는 꽃다발이라고 부르고 싶다. 집에 돌아와 자연스럽게 여러 겹의 시간, 여러 갈래의 삶을 언어로 겹쳐놓은 꽃다발 같은 시집을 펼쳤다. 엉겁결에 받아들었던 이 시집을 세세히 읽어 나가는 시간이 무참히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서로에게 기대어 감추어져 있던 시간을 현현하게 만들고, 서로의 비어 있는 구석에 고개를 내밀고 풍성하게 새로운 향기를 긋는 꽃다발의 시.
김선오 저 | 북다
시간은 우리를 부드럽
게 흐리고 있었지. 시간은
우리를 실수라 부르며 웃고
있었지. 꼬리가 만든 물결
돌아와 꼬리를 스치며 작
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 안
에서 웃는 달과 해와 내 사
랑하는 작은 복숭아야, 나
비야, 산아, 용아, 물아, 아
이야, 사람아, 조그만 조그
마한 몸아. 몸을 구부리는
시간이 너의 꿈과 나의 꿈
을 잠시 맞붙이고 있었지.
나의 꿈이 너의 몸을 기억
하고 있었지.
(「합창」의 부분, 『말 꿈 몸』 141-142쪽)
출판사 북다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시인선 ‘어떤시집’의 첫 순서로 김선오 시인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새로운 시인선이 많아지다 보니, 내심 시인선이라면 정체성을 분명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어떤 기대감이 생겼는데 이 시집은 그 기대감에 부응하는 충분한 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세 번째 시집을 통해 ‘꿈 말하기’ 방식을 채택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속 깊은 곳에 내려앉아 있던 근원적인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우리 안에 누적되어 가는 것은 기억뿐만 아니라 몸 밖으로 나와본 적 없는 꿈의 잔해도 있다는 것을, 이 시집으로 명백하게 깨달았다. 무의식과 내면이라는 안쪽을 향하는 모험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활성도가 매우 높은 시집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꿈을 추적하는 일에 지나지 않고,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다양한 사건들을 지나며 다양한 존재들과 ‘연결’된다. 시집 제목의 한 글자 단어들이 서로 나란히 띄어 쓰고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처럼 읽힌다면, 그것은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서 닿고자 했던 어떤 간극을 꿈이라는 재료로 이어 나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합창」이라는 시는 4인의 낭독을 요하는 시이기도 한데, 시 안에서 호명으로 열거되는 존재들이 마치 꿈 안의 존재들을 꿈 밖으로 데리고 나서는 출석 부르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꿈으로부터 해방되며 동시에 찢어진 곳을 봉합하는 시인의 입체적인 세계가 다양한 형태로 구현되었다. 나는 이 시집이 꿈에서 꺾어온 꽃들을 한 손으로 움켜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잎은 너무나도 새순이고, 어떤 꽃은 너무 오랫동안 꿈 바깥에서 시들어 마르고, 또 어떤 풀은 빳빳하고 향긋하며, 어떤 꽃들은 이름도 모른 채로 활달하다는 생각. 진행되어온 시간이 제각기 달라 꽃다발 속의 꿈들은 세밀하게 이어 붙일 수 없지만, 시인의 말하기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묶어 ‘한 권’의 야생 세계가 된다. 그 진귀한 경험이 남긴 향기를 따라 꺼내오지 못한 이야기로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비숍 저/이주혜 역 | 봄날의책
누구를 위해 음울한 박물관이
예의 바른 수컷 바우어새처럼 고분고분할까요?
누구를 위해 기분 좋은 사자가
공공 도서관 계단에 앉아 기다리다가,
기꺼이 몸을 일으켜 문을 지나서
도서실로 따라갈까요?
부디 날아서 오세요.
우리는 주저앉아 울 수도 있고, 쇼핑을 갈 수도 있어요.
값을 매길 수 없는 어휘 모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틀리는 게임을 할 수도 있지요.
아니면 용감하게 한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부디 날아서 오세요.
(중략)
하얀 고등어 하늘빛처럼 오세요,
낮의 혜성처럼 오세요,
막연하지 않은 단어들의 긴 꼬리를 달고,
브루클린에서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 이 맑은 아침에,
부디 날아서 오세요.
(「미스 메리앤 무어에게 보내는 초대장」의 부분,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 131-132쪽)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를 전집으로 처음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닐 듯하다. 우연히도 김선오 시인의 시집에서도 그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두 시집은 어떤 부분에서 같은 활주로를 쓰고 있다. 엘리자베스 비숍은 상실로 점철된 유년 시절을 지나 어느 곳에서도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살아갔다. 상실로 예습한 ‘완전하지 않은 세계’에서의 생존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끌어 안기’를 포기한 그에게 시는 수많은 주소가 유실된 지도를 복원하는 시도였을 것이다. 편지처럼 누군가에게 부치는 시들이 유독 많은 것도 일종의 그런 방법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미스 메리앤 무어’는 그가 끌어안고 있던 몇 안 되는 존재이자 스승이기도 하다. 그들이 처음 도서관 앞에서 만났을 때, 서로의 빈 곳을 알아차렸던 것은 아닐까. 비어 있는 자들이 무언가를 읽고 쓰러 오니까. 그 슬픔의 직감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보살피는 능력으로 발휘되었을 것이다. “부디 날아서 오세요”라는 당부는 느닷없이 서로에게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 한달음에 오갈 수 있다는 서로의 비행을 경험해본 적 있는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부디 날아서 오세요”라는 당부가 불가능한 삶의 은유가 아니라 서로의 광활함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인사말로 읽혔다. 꿈을 활주로 삼아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어디든 머무를 수 없었던 상실의 마음이 이 시들을 멀리멀리 보내주었다. 각자의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온 한 묶음의 시에는 이름도, 제목도 지어주기 어렵다는 것을 몇 번이고 생각했다.
강우근 외 저 | 창비
햇생강이 나오면
집에서 말린 생강이 가득
도착한다
가진 생강이 줄어들지 않는다
뜨거운 차를 질릴 때까지 마셔도
생강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너희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
멸망이 가까워지는 거다
당신이 잠시 지연시킨 멸망의 얼굴로 앉아
서로 망친 것을 이야기하며
식탁에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을 늘어놓는다
먼지처럼 일어나는 가루들
검은 봉지에 넣고 잊어버린 것들
꿀은 영원할 줄 알았는데
기한이 몇 년 지났다고 적혀 있고
여전히 달다
(남현지, 「햇」 전문, 『햇생강이 나오면』 63쪽)
앤솔러지를 몇 차례 만들면서 그 귀함에 대해 내내 느끼고 있다. 꽃다발이라는 책의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앤솔러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제로, 어떤 저자가 함께 묶이느냐에 따라서 색깔도, 향기도, 쓰임도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민첩하게 읽어보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책이 바로 앤솔러지다. ‘한국시의 가장 신선한 목소리들을 한권에 담은 앤솔러지 시집’이라는 책 소개가 마음에 들었다. 산뜻하고 청량했기에. ‘햇’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면 여리고, 신선하고, 막 태어난 존재처럼 느껴진다. 햇밤, 햇순, 햇사과, 햇곡…….
막 알게 되어 사귀게 된 사람을 ‘햇사람’이라고 부르던 선배 시인이 있었다. 그가 내게 처음 써준 편지에 ‘이 어린 햇사람아,’ 하고 시작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햇반’은 정말 잘 지은 이름이구나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이 시집을 펼쳐 읽었다. 이토록 다채롭게 펼쳐져 있는 향기를 따라 가면 ‘햇사람’ 같은 시인들의 시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얼마 되지 않은’, ‘당해에 난’이라는 사전적 정의로 이라는 뜻으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남현지 시인의 시 「햇」은 이 책의 제목이 담겨 있는 표제작이기도 하다. 시는 새로 수확한 생강으로부터 말린 생강들을 자연스럽게 불러오면서 시작한다. 너무 오래된 것들, 시간이 지나버린 것들은 셀 수 없이 넘쳐나고 수많은 ‘햇’들은 다른 얼굴로 우리 곁에서 함께 시간을 지난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오래된 것이 물러나는 시간의 섭리로만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질문을 남긴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꿀은 여전히 달고, 그래서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존재로 남아 있는 말린 생강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여기에서 생강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읽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편지일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시로 바꾸어 읽어보았다. 생강에 대한 한 편의 시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양한 존재를 끌어당겨 읽어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 이 꽃다발의 효능이 아닐까.
시집을 읽은 뒤 나는 꽃다발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다이너마이트라고 생각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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