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만큼 달린다!” 리딩런 시즌2는 책을 읽은 시간과 도서 리뷰가 독서 거리로 환산되어 기부금이 적립되는 독서 캠페인입니다.(여기서 참여 가능!) 고명재 시인이 시라는 트랙 위에서 만난 서로 다른 보폭의 시집들을 소개합니다. 종종걸음처럼 웃으며 읽는 시집, 삶을 향해 멀리 뛰는 사랑의 시집, 그리고 용감하게 다리를 최대치로 벌려서 어딘가를 건너서는 시집까지. 그럼 지금부터 고명재 시인과 함께 시라는 트랙 위를 달려 볼까요?

안녕하세요. 채널예스 독자님들. 저는 시를 쓰며 살아가는 고명재입니다. 시와 달리기는 참 많이 닮아있지요. 예전에 제가 습작을 하다 완전히 지쳐 있던 때, 지도교수님이 산책을 좀 하자고 하셨어요. 걷는 길에 저는 이런저런 고민을 말했어요. “선생님. 시가 너무 안 돼요. 시는 항상 제게만 문을 닫아요.” 선생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명재야. 사람이란 게 참 아름다워. 온몸을 사용해서 달리는 걸 보면, 그 생생한 종아리며, 숨소리며, 나아감이며… 그 모든 게 무시무시하게 아름다워.”
그때는 선생님이 왜 그렇게 뚱딴지같이 사람의 형상이며, 달리는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몰랐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르니 알 것 같아요. 시도 그렇게 ‘온몸’을 사용하는 일이며, 종아리처럼 생생하게 ‘마음’을 쓰는 일이며, 숨소리를 동원하여 나 살아있다고 드러내는 ‘나아감’이라는 것을요. 뛸 때 성큼성큼 뛰는 사람도 있고 물결처럼 타박타박 뛰는 사람도 있지요. 강아지도 고양이도 까치도 뛰지요.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지면을 누르며, 중력을 견디는 전진을 일구어내지요. 가끔 시를 쓰다 눈앞이 캄캄해지면 반바지를 입고 무작정 뛰었습니다. 눈앞에 버드나무와 강물이 엉키고 어린이들이 지나고 억새와 낙엽이 섞이고. 그렇게 뒤섞인 채 펼쳐지는 눈앞의 세상을 ‘시가 될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저는 ‘스타터-하프-마라톤’ 코스를 ‘시적 보폭(步幅)’으로 생각하고 소개하려고 해요. 처음 시를 쓸 사람을 위해서는 강아지의 앞발처럼 조심스럽고 귀여운 시를 소개할 거고요. 무릎에 근육이 붙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먼 곳까지 달리는 시를 소개하려고 해요. 그리고 어느 날 몸이 새처럼 가벼워질 때, 우리는 내를 건너듯 훌쩍 멀리 발을 내딛죠. 큰 보폭의 시를 마지막 코스로 소개하고자 해요. 종종걸음처럼 웃으며 읽는 시집, 삶을 향해 멀리 뛰는 사랑의 시집, 그리고 용감하게 다리를 최대치로 벌려서 어딘가를 건너서는 시집을 소개합니다.
다니카와 슌타로 저/김응교 역 | 문학과지성사
시 쓰기가 막막할 때, 어떻게 쓸지 가늠도 안 될 때는 우선 창부터 열고 영혼에 구멍을 뻥 뚫는 게 좋아요. 그리고 세상을 모험처럼 살고 언어를 함성처럼 쓰는, 다니카와 슌타로를 꼭 한번 만났으면 좋겠어요. 너무나 명랑하고 투명해서 읽을 때마다 미소 짓게 되는 시집입니다. 예컨대 이런 시는 얼마나 잘 비어 있나요.
만화를 사서 나는 당신과 웃으러 간다
수박을 사서 나는 당신과 먹으러 간다
시를 써서 나는 당신에게 보이러 간다
아무것도 안 갖고 나는 당신과 멍하니 간다
강을 건너 나는 당신을 만나러 간다
(「강」 전문, 『이십억 광년의 고독』 92쪽)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랑 그 자체의 국면이 맑게 비치죠. 만화도 수박도 시도 다 핑계였던 것. 그저 당신을 만나러 강을 건너는 여름. 그 자체가 존재로 빼곡해서 자꾸 다시 읽게 되는 시지요. 실제로 슌타로는 자신의 어머니가 7년간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는 모습을 보고 이후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해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어르신을 차에 태우고 ‘돌아갑시다’ 하고 동네를 한 바퀴 슥 돈다 하지요. 저는 이토록 유연하고 순박한 마음이 슌타로의 시적 영혼이라고 믿어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저/최성은 역 | 문학과지성사
시를 쓰다 보면 꼭 한 번 만나게 되는 시인.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다 읽게 되는 시집. 바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인 『끝과 시작』입니다. 쉼보르스카 시인을 떠올리면, 저는 항상 ‘폴란드의 따듯한 할머니 시인’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요. 시집을 읽기 전에 꼭 한번, 인터넷에서 쉼보르스카의 이름을 검색해 보셔요. 담배를 들고 순박하게 웃고 계시는 이 할머니를 보면 우선 사랑부터 빠지게 될 거예요.
쉼보르스카의 시는 놀라운 힘이 있어요. 보통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시는 상당히 신선도와 빛을 잃는데요. 이 할머니의 시는 도대체 얼마나 좋은지, 폴란드어에서 한국어로 건너왔음에도 그 이상의 찬란을 품고 있어요(최성은 선생님의 번역도 너무 좋고요). 이 시인은 아주 깊은 근원적 감정과 본질 같은 것들을 건드리기도 하고, 너무나 따듯하고 현실적인 순간들을 유려하게 펼쳐내기도 해요. 이를테면 이런 구절을 함께 볼까요.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가장 이상한 세 단어」의 부분, 『끝과 시작』 368쪽)
시의 제목이 ‘세 단어’에 관한 것이니 마지막 단어는 또 무엇일지, 그걸 어떻게 표현하실지 너무 궁금하시죠? 그건 사서 읽어보셔요. 후후. 제가 좀 호들갑 떨며 말씀드리면 이 시집에는 이 시보다 훨씬 멋진 시들이 즐비하다 못해 정말 차고 넘쳐서 책전성시(冊前成市)를 이루고 있답니다.

김행숙 저 | 문학과지성사
어쩌다 보니 외국 시인만을 소개했는데요. 한국에도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시인들이 많이 있나요. 김행숙 시인은 두고두고 펼쳐보게 되는 시인입니다. 시집이 정말 좋은 게, 한 번 사두기만 하면 몇 년에 걸쳐 언제든 활짝 펼친 채로 ‘긴-다시 보기’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김행숙 시인의 전작(全作)을 다 추천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권만을 소개하는데요. 이미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이 동하지 않나요. 아니, ‘이별의 능력’이라고? 어떻게 저런 능력이 있을까. 그 능력은 도대체, 언제, 어떠한 형태로 우리가 갖추게 되는 걸까.
좋은 시는 끝없는 질문과 방향을 낳지요. 시를 한창 공부하듯 읽던 시절, 김행숙 시인님의 『이별의 능력』은 정말이지 축복 같았어요. 공부해도 계속해서 읽을 수 있는 시집. 수천수만의 갈래를 스스로 일구는 시집. 시와 언어가 어디까지를 해낼 수 있는가. 시적 언어는 어디까지 우리를 해방할 수 있을까. 김행숙 시인의 시는 그런 난감하고도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게 해요.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해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숲속의 키스」)오는 때를 발견하면서, 그 놀라운 착시와 착지에 잠겨보셔요. 용감하게 다리를 벌려 너머로 가려는, 그 시적 태도가 이 시집엔 가득하지요. 덧붙여, 이 시집의 해설(신형철, 「시뮬라크르를 사랑해」)도 너무 아름다워서 두고두고 아껴 읽던 글이었어요. 날개를 펼치듯 이 시집을 꼭 펼쳐 보셔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고명재
시와 유과를 참 좋아합니다. 시집으로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어깨에 머리를 기대던 시절』이 있으며,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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