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문장 소설 – 『자화상』
김뉘연 시인이 들려주는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 이야기
글: 김뉘연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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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은 읽히면서 쓰인다—쓰인 문장을 계속 읽고 싶다는 바람에 다음 문장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겹쳐진다. 『자화상』은 이러한 이중적 상황의 작품 중 하나다. “작은 격자창 앞에서 내 눈은 풍경보다 나무틀을 더 본다. 통창 앞에서 내 눈은 풍경만을 본다.”1 격자창의 나무틀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이 격자창이 열릴 수 있음을 깨닫고, 그걸 연다. 통창이 펼쳐진다. 나는 창문을 잊는다. 


『자화상』은 ‘나’를 둘러싼 사실과 단상을 문장 단위로 적어 내려가는 책으로, 문장은 자연히 주로 “나는”이라는 주어로 시작된다. 알려진 전기적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글쓴이는 화자인 ‘나’가 자신임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읽히는데, 그럼에도 쓰인 ‘나’는 읽는 ‘너’로 치환되어 읽히곤 한다. 다시 말해 글을 쓴 너의 말이 글을 읽는 나의 말로 읽히는 상황이 생긴다. 이것은 공통의 사실이라는 문제를 벗어난다. 글쓴이/화자에게 사실인 문장이 읽는 이에게도 반드시 사실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두 살 때 살바도르 달리에게 말한 적이 없다.) 물론 글은 공감의 영향 아래 있기도 하다. (“나는 소설만큼이나 내러티브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가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며, ‘나는 내러티브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전개되는 예술은 시간을 정지하는 예술보다 즐거움을 덜 준다.”) 하지만 쓰인 문장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해서 그 점이 주어진 글을 스스로 쓴 것처럼 여기게 하지는 않는다—그렇다, 『자화상』에는 읽는 이가 눈앞의 글을 자신이 쓴 글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면이 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문장과 문장이 이루어 가는 ‘자화상’이라는 형식은 설명 없이 나열을 거듭할 뿐이다. “나는 미니멀리즘 조각보다 공사 중인 집에 더 흥미를 느낄 수도 있는데, 후자에 대한 흥미가 우연적이기에, 그 ‘작품’의 관객이라기보다 작가인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열거되는 문장을 뒤따라 본다. 계속 “공사 중”인 이곳은 “우연적”이며, “관객이라기보다 작가인 듯한” 기분을 안긴다.

 

문장과 문장은 때로 잠시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는 듯 읽히기도 하지만 대개 서로 무관하다. 가끔 “텍스트를 거꾸로” 읽고, “관련이 없는 두 가지”가 병치될 때 아이디어를 얻으며, “어떤 텍스트에 나오는 명사를 사전에서 그 단어로부터 일곱 항목 뒤에 나오는 명사로 바꾸는 ‘S+7’이라는 [울리포식] 게임”을 즐겼던 글쓴이/화자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자화상』의 모든 문장은 그 순서가 바뀌거나 다른 문장으로 바뀌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읽으면서 실제로 일어난다. 분명히 선형적으로 읽어 내려가고 있는데 계속해서 아무 곳이나 펼쳐 읽는 것 같은 비선형적인 상태에 놓인다. 문장은 하나의 단위로 완성되어 있으면서 글을 미완의 상태로 이어 간다. 문장에 계속 걸려 멈춰진다. 시에서 단어가 해결되지 않는다면,2 이 글에서는 문장이 해결되지 않는다. 『자화상』을 ‘문장 소설’이라 부르고 싶다.3 문장 소설에서 시간은 문장마다 정지하며, 거듭 정지해 가는 시간이 문장의 해결되지 않음을 지켜 갈 것이다—문장 소설에서, 문장은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너로, 이 문장이 저 문장으로, 『자화상』의 요소가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가령 이런 말이 된다. “나는 풍경이 길에 의해 형성되는지, 길이 풍경에 의해 형성되는지 궁금하다.” 답이 없거나 모두가 답일 때, 궁금함은 궁금함으로 충족된다. “나는 비닐봉지가 빌딩 사이로 날아다니는 걸 보기를 좋아하는데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특히 좋다.” 언제 어디선가 본 듯한, 아마도 그리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말이 불현듯 눈에 띄기도 한다. “나는 눈을 떴을 때보다 감았을 때 더 잘 그린다.” 그림을 잘 못 그린다는 말일까, 우연의 편에 서는 걸까? 이 말은 사실일까, 농담일까? “나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화상』의 문장들을 읽어 가며, “눈을 감고 컴퓨터로 글을 쓰며 쓴 것을 읽을 때 나타나는 오타”를 기대하는 화자처럼, 어딘지 어긋나 보이는 낯선 문장을 기대한다.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나 있는 거의 모든 문장이 서로에 기대어 기대에 부응한다. 문장이 놓인 상황이 문장을 낯설게 만든다. 『자화상』의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정영문은 말한다. 이 문장이 저 문장 다음에 와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 문장이 저 문장 다음에 오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이중의 ‘없음’이 이루는 상태는 어쩐지 사이 공간, 중간 지대, 연옥, 바르도가 소설이라는 상태로 펼쳐지는 모습과 겹쳐진다. 물론 화자는 “내가 쓰는 모든 것은 사실”이라고 밝혀 두지만, 뒤이어 덧붙여 둔다. “하지만 그게 뭐?” 사실과 사실의 사이가 사실을 낯설게 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본다. 그리고 화자 역시 이를 알고 있다고 보인다. “나는 백색의 글쓰기를 꿈꾸지만 그런 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주관적인 판단에서 벗어난 중립적인 ‘백색의 글쓰기’란 결국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에 강하게 이끌리는 여러 모습을 계속 내보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사실과 사실의 사이가 계속해서 생겨난다—이곳에서, 이 책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자화상』은 ‘백색의 글쓰기’를 향한 시도 자체로만 읽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책이기도 하다. 예컨대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시학을 분명히 밝혀 두는 자의 진술. “시에 있어서 언어적 작업을 좋아하지 않고, 시에 담긴 사실과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나는 고유한 언어를 만들려는 시인의 시도보다는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의 중립성과 익명성이 더 흥미롭고, 사실적인 보고서가 가장 아름다운 비(非)시적인 시로 보인다.” 그는 사전을 ‘읽는’ 자이기도 하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고유명사에 매혹되는 ‘나’는, “고유명사 사전에서 정확한 정보를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책장(冊張)을 뒤적이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사전과 같은 사실적 글쓰기에 남달리 매료되는 그이기에, 그는 의학 전문 서적은 읽지 않는 편이 낫다. 어떠한 질병의 증상을 묘사하는 구절을 통해 그러한 질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것이 자신의 안에서 퍼져 나가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된 진술처럼 읽히는 이러한 문장은 ‘사실’로서의 글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사실에서 시를 읽고, 사실이라는 글을 읽는 그를 뒤따라 감지하고 싶어진다. 사실을 적극적인 읽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의 품이 더 흥미롭고 넓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렇게 했던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불필요한 것은 제거한다”는 한 사람의 말에 기대어 한 문장 한 문장을 필요한 것으로, 동시적으로 받아들인다. 해결됨을 벗어난 문장들을 건너 다니며, “난데없이 떠오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문구에 대해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경이롭다’라는 말은 경이롭다”라는 말의 당연함에 감탄하며, “나는 다음으로 넘어간다”. 

 

문장 소설을 읽는 방법은 문장 소설에 밝혀져 있다. 




1 이 글에서 큰따옴표로 직접 인용된 문장은 에두아르 르베가 쓰고 정영문이 옮긴 『자화상』(은행나무, 2026년)에서 왔다. 

2 김뉘연,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년), 101쪽.

3 사진작가였던 작가의 마지막 소설 『자살』은 『자화상』 말미에 글로 쓴 사진처럼 실린 친구의 장면을 확장한다.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자살』은 대부분을 단락별로 떼어 읽어도 받아들이기에 큰 무리가 없는 ‘단락 소설’이라 할 만하다. 글쓴이/화자가 청소년기에 가장 아름다운 대화를 나눴다고 기억하는 친구의 돌연한 자살은 그에게 해결되지 않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에 대한 현재형의 『자화상』을 쓴 그는 ‘너’에 대한 과거형의 『자살』을 쓰고, ‘너’를 뒤따른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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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저/<정영문 > 역

출판사 | 은행나무

자살

<에두아르 르베> 저/<한국화> 역

출판사 | 워크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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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뉘연

시인, 편집자.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실유령에서 일한다. 시집 『모눈 지우개』 『문서 없는 제목』 『제3작품집』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흰흑』 , 소설 『부분』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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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르베

사진과 글을 주요 매체로 삼아 활동한 프랑스 작가. 1965년 1월 1일 파리 근교에서 태어난 르베는 20대 중후반에 그림을 그렸지만, 서른 즈음 인도 여행을 다녀온 후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들과 이름이 같은 이들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찍은 「동명이인」, 꿈을 현실에서 재구성한 「재구성된 꿈」, 공포, 불안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마을을 기록한 「앙구아스」, 신문에 실린 회담, 공식 방문, 준공식 등의 사진에서 고유명사 등을 제거하고 전형적인 인물들의 포즈를 재구성한 「뉴스」, 포르노그래피 속 자세와 구도를 옷을 입은 채 재구성한 「포르노그래피」, 일상복을 입은 인물들이 럭비선수의 포즈를 취하는 「럭비」, 회화를 사진으로 재구성한 「이전(移轉)」, 유럽의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미국의 도시를 촬영한 「아메리카」, 흑백사진 연작 「픽션」 등 개념적인 사진 작업에 매진한다. 한편 2002년에는 533개 작품 아이디어를 모은 『작품들』을 프랑스 출판사 P.O.L에서 출간하면서 문학가로서 남다른 이력을 시작한다. 이어 2004년 『저널』을, 2005년 『자화상』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낸다. 2007년 10월 15일, 파리에서 자살한다. 이듬해에 자살 며칠 전 송고된 글 『자살』이 출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