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바탕으로 한다. ‘오뒷세이아’라는 표기는 희랍어 발음에 기초한, ‘오뒷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의 제목이다. 희랍어-한국어 번역본은 반드시 책 제목을 『오뒷세이아』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제목은 <오디세이>인데, 이것은 『오뒷세이아』의 영어식 표기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미국식’ 변형이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뜻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행 기록은 계속 경신되는 중이며, 영화 개봉 이후 유례없는 희랍 고전에 대한 관심이 국내외 출판계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일반 독자와 관객으로서는 볼 일 없었던 전 세계 고전학자들의 (블록버스터 영화와 관련한) ‘참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번역의 적확함과 알맞음에 대한 논의는 일반 독자로서는 제대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데, 고대 희랍어 구사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영어로 ‘Greek’이라는 단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Greek to me)’는 뜻으로 통용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희랍인의 영혼과 사고 체계,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논의만큼은 특히 재미있다. 각색이 바꾸어내는 것이 때로 이야기의 심장과 영혼의 문제라는 사실을 이번만큼 잘 알 수 있게 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읽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를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인재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상’으로 ‘스토리’를 이해시키는 능력만큼은 거듭 입증되어 온 바와 같이 최고 수준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흐트러트리고 역전시키며 퍼즐을 맞추는 쾌감을 극대화시킨 뒤 드라마와 엮어내는 전문가다. 여기에 아이맥스를 점점 공격적으로 사용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일단 티켓팅에 뛰어들게 만든다. 2시간 40분의 상영시간? 오히려 좋아. 영화가 눈이 하나뿐인 괴물처럼 용사(관객)의 앞을 여러 방법으로 가로막을수록 기를 쓰고 보고, 인증하고, 감탄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생긴다. 이런 역경과 난관을 뚫고 아이맥스 상영관에 앉으면, 폭풍우도 기이한 모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끝에 ‘어느새’ 영화가 끝난다.
원작에서와 달리 영화에는 신들이 부재한다. 『오뒷세이아』 1권은 트로이아를 무너뜨린 뒤 오래 떠돌았던 한 사람(오뒷세우스)의 방랑 과정을 요약해 들려준 뒤 제우스의 한탄(“빌어먹을, 인간들은 대체 어쩌자고 이리도 신들을 탓하는가!1”)과 아테나의 응답으로 시작한다. 이 자리는 영화에서 음유시인의 좌중을 휘어잡는 언술로 대체되었다. 영화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신인 아테나는 배우 젠데이아가 연기하는데,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젠데이아의 ‘얼굴’은 신전을 지키던 사제의 얼굴임이 드러난다. <오디세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의 얼굴을 한 영화이며, 그 사실을 당연하게 다룬다.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마션> 같은 영화들의 연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저 배경이 고대 그리스인. 약간의 판타지적 요소를 곁들여서.
그런데 이게 『오뒷세이아』인가? 여기부터는 얘기를 좀 해보아야 한다. 영화 <오디세이>가 재미있느냐 재미없느냐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다.) 각색이 잘 되었는지를 따지려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잘 되었다.) 장대한 서사시를 시간 제약이 있는 영화로 만들면서 몇몇 모험을 건너뛰거나 어떤 캐릭터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다만 영화를 보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로서의 『오뒷세이아』를 떠올린다면 그건 아니라고밖에 할 수 없다. 캐스팅에 대한 호불호 의견은 다들 알아서 해소하길 바란다.
그런데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은 입장에서 “이걸 어떻게 영화로 만들겠다는 걸까?”의 궁금증이 치솟았던 부분들이 (도려내어져) 매끈매끈해진 것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폭력성. 성기 절단, 고문과 복수, 거의 자연현상처럼 느껴지는 수준의 괴물이 보여주는 폭압적 분노 같은 것들. 슬픔에 옷을 찢어발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감정) 과잉으로 보이는 요소들은 이 세계의 중요해 보이는 극적 요소 아니었나. 이런 부분이 다 ‘인간적’으로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표현된 것이 영화다. 와중에 모든 여자 캐릭터는 칼립소부터 키르케, 페넬로페에 이르기까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 오디세우스를 위무하는 역할을 맡은 것처럼 헌신적으로 그를 설득하고 품어낸다. 오뒷세우스는 키르케와 1년 정도 살았다. 오디세우스와 키르케는 돼지로 변한 부하들이라는 이슈를 제외하고 담백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오뒷세우스와 오디세우스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 ‘다름’의 정점에 죄의식이 있다.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오디세이>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묵직하게 강조되는 것이 바로 오디세우스의 죄의식이다. 이 죄책감은 이방인을 조건 없이 환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상호 존중의 규범인 ‘제우스의 법’(크세니아)을 어겼다는 데 기반하고 있다. 선물의 탈을 쓴 ‘트로이의 목마’가 사실 무기였다는 사실, 나아가 문명이 찬란했던 트로이아를 하룻밤 새 잿더미로 만든 것도 부족해 밤새 살육을 비롯한 온갖 폭력을 휘둘러 그곳의 사람들을 해쳤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만든다. 전쟁에서는 이겼으나 지도자로서는 실패했다는 점도 있다. 그의 부하는 단 한 명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단 한 사람, 오뒷세우스(오디세우스)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의 현대적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오디세이> 프로모션 중 팟캐스터이자 문화학자인 종슈는 크리스토퍼 놀란을 인터뷰하며, 놀란이 “『오뒷세이아』를 크리스천화”했다고 지적했다. 『오뒷세이아』에는 ‘속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데 영화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크세니아’가 ‘황금률’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분명한 것은, 영화를 보고 원작에서 오뒷세우스가 반성할 그 순간을 향해 읽어간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이 관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참고했다고 알려진) 『오뒷세이아』 영어판을 번역한 에밀리 윌슨이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공격적인 힐난의 글은 그 자체로 영화의 팬들을 분노하게 했고 많은 반박으로 이어졌지만 눈여겨 볼 부분도 있다. 여성 캐릭터라면 언제나 밋밋하고 단순하게 그리는 것으로 정평이 난 크리스토퍼 놀란 식의 각색에 대한 지적도 그렇다. “샤를리즈 테론의 칼립소는 아름답지만 결코 화내지 않고, 결코 웃기지 않으며, 수사학에 능하지도 않고, 초라한 인간 피해자에 대한 색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그녀는 약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초라한 오디세우스의 영혼을 달래고, 그의 앞뒤 안 맞는 비극의 이야기를 우아하게 들어주는 무급 치료사일 뿐이다.” 원작 속 칼립소 생각이 나 너무 웃기고 공감이 가는 바람에 크게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읽었다. 에밀리 윌슨은 글에서 시종일관 퀴클롭스처럼 분노하고 있어서 모든 대목에 동의할 순 없지만, 요는, <오디세이>는 뛰어난 각색을 통해 영화만의 고유함을 갖추었지만 『오뒷세이아』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런들 또 어떠한가. ‘오디세이’라는 말이 『오뒷세이아』가 책인 걸 모르는 사람들조차 ‘기나긴 (귀향의) 여로’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쓸 정도로 잘 알려진 세상에 살고 있는걸. 어쨌거나 <오디세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오뒷세이아』의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다시 쓰기 작업을 한 바 있다. 『페넬로피아드』에서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처단한 오뒷세우스가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구혼자들과 놀아나며 주인을 괴롭힌 시녀들의 처형을 명한다. 목매달려 죽은 시녀들은 오뒷세우스를 조롱한다. 매들린 밀러는 『키르케』를 통해 여신이자 마녀로서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나탈리 헤인스는 『천 척의 배』를 통해 『오뒷세이아』 속 여성들을 호명한다. 정전(正傳)은 해석되고 또 해석되며 시대를 만나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져 생명을 연장해 간다. <오디세이> 또한 그 역할을 잘 수행해 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다면 오해와 분노 역시 그 풍성함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1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이준석 옮김, 아카넷, 2023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진행.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몇몇 영화들이 얼마나 소설인지 얼마나 영화인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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