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홉 소리 나무가 울었다』 『팬텀 시그널』 『소금 비늘』 등 네오픽션을 통해 독보적인 장르문학의 세계를 구축해 온 조선희 작가가 이번에는 모든 것이 파괴된 오픈 월드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대지진으로 멸망해 버린 서울 은평구 일대를 배경으로, 전망대 화장실에 고립된 65세 여성 ‘혜령’의 경이로운 생존기를 그린다. 폐허가 된 마트를 털어 물자를 수집하고 거대해진 돌연변이 곤충 크리처들과 사투를 벌이는 혜령의 고독하지만 의연한 일상은 한 편의 정교한 서바이벌 게임을 방불케 할 정도로 흡인력이 넘친다. 나아가 욕망에 갇혀 각기 다른 생존 방식을 택한 생존자들과의 심리전, 그리고 하늘과 땅의 섭리가 뒤틀려버린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시간의 미스터리는 읽는 내내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모든 것을 잃은 세계에서도 삶의 퀘스트를 포기하지 않는 한 노년 여성의 눈부신 모험이 지금 시작된다.
네오픽션의 기존 작품들에서 매력적인 환상 세계를 선보이셨다면, 이번에는 철저히 파괴된 현실 세계의 은평구로 무대를 옮겼습니다. 신작 장편소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한 문장으로 소개해 주신다면요?
“그러니까 세상은 진짜, 확실히 멸망했다.”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인공 ‘혜령’의 생존 방식이 무척 치밀하고 흥미롭습니다. 무너진 이마트에서 요가 매트와 뽁뽁이를 챙겨 방한 대책을 세우고, 산에서 주운 작대기로 거대 곤충 크리처를 퇴치해 베이스캠프를 구축합니다. 마치 잘 짜인 오픈월드 생존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몰입감이 느껴져요. 폐허에서 살아본 사람만 알 수 있을 법한 디테일을 어떻게 구상하셨나요?
글을 쓰는 동안 저는 그냥 혜령이었기에 상황에 몰두해 열심히 살아남고자 애썼습니다. 세상이 망해도 일상을 살자니 해야 할 일들이 많더군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전망대와 텃밭, 오가는 산길과 정자, 하천과 다리, 편의점과 이마트 같은 장소들은 대부분 실제 장소입니다. 제가 봉산 가까이 살기에 구체적으로 방법을 기록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정말 세상이 망하면 요긴한 생존 정보 수첩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실전처럼 임했습니다.
작품 속 혜령의 베이스캠프가 된 봉산 전망대 화장실의 실제 모습
재난 직전, 평생 운이 없던 혜령이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비밀을 독자와 공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진이 나며 세상이 멸망하죠. 이 지독한 아이러니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멸망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혜령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인류 마지막 생존자인 당신의 장례식》의 곡들보다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의 노랫말에 마음이 더 사무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로또 당첨은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소망이죠. 그 특별한 소망을 성취한 재난의 날과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 중에서 우리는 분명 후자를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을 유지하는 힘도 생을 유지하는 힘도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별것 아닌 일상이라는 것을 이미 아니까요.
혜령 외에도 버스형 캠핑카에서 살아가는 청년 ‘노바’, 무너진 아파트에서 금붙이를 모으는 ‘안섭’과 ‘윤주’가 등장합니다. 같은 멸망의 세계를 공유하면서도 플레이 스타일이 전혀 다른 인간 군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토록 다채로운 인간 욕망의 지도를 그리면서 특히 신경 쓴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모든 이에게는 각자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혜령과 노바, 안섭과 윤주의 관계는 상반됩니다. 전자 커플은 서로의 것을 나누나 후자 커플은 각자의 물질과 마음을 감춰서 관계를 유지하지요. 혜령과 노바의 관계는 이상적으로 보이나 실상이 벌어지면 지극히 현실적인 관계들이 펼쳐질 겁니다. 인간이 귀해진 망한 세상에서는 윤주의 진절머리 나는 언행도 안섭의 불편한 집착도 조금은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관계에 지칠 때면 이 망한 세상을 떠올려보셔도 괜찮겠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소설 중반부를 넘어가며 독자들은 오로라와 기묘하게 긴 낮, 그리고 혜령의 신체에 생기는 변화를 통해 거대한 미스터리에 직면하게 됩니다.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계관을 만든 발상의 원천이 있을까요?
저는 최강 N형 인간이라 가만히 앉아서 눈만 껌뻑이고 있어도 머릿속에서 온갖 장면이 펼쳐집니다. 나무 틈이나 글자 하나만 보고 있어도 이내 세계가 만들어지는데, 거기에 한동안 이어진 봉산 나들이 풍경이 합쳐지면서 차곡차곡 쌓여 이야기의 배경을 이뤘습니다.
고독하고 거대한 자연의 섭리 속에서도, 혜령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생존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혜령을 살게 하고 사랑을 알게 해준 딸 이레입니다. 그러므로 딸 이레를 향한 사랑이 혜령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지요. 죽음이 슬픈 이유는 다른 이별과 달리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레를 다시 만나겠다는 의지가 혜령을 계속 살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폐허가 된 은평구를 함께 탐험하게 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봉산이 참 예쁩니다. 한 번쯤 나들이해 보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전망대에 서면 북한산과 백련산, 남산서울타워와 63빌딩이 보입니다. 그 모든 보이는 것들이 동해물이 마르고 닳도록 내내 일상의 풍경으로 버텨주면 좋겠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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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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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서울에서 물자를 모으고 자기만의 생활권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정말 좀비 영화처럼 생생하고요. 이제 혜령이 앞으로 누구를 만나게 될지, 이 이상한 세계의 비밀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합니다. 쓸쓸한데 이상하게 따뜻하고, 무서운데 또 계속 머물고 싶은 세계예요. 다음 화 빨리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