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 편집자의 문장 수집
[박혜진 칼럼] 산책하기 좋은 계절로 초대합니다
산책을 한다는 것은, 늘 같은 무늬로 반복되는 생각의 패턴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글: 박혜진 편집자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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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침 공기가 선득해졌습니다. 출근하기 위해 새벽녘에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까지 걷는 길을 참 좋아하는데요. 20분간의 산책을 즐기기 위해 어떤 날은 아침밥을 포기하고, 어떤 날은 빗질을 포기하기도 해요. 공복에 산발로 걸을지언정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걷는 것이 출근길 마지막 남은 낭만이거든요. 

 

혹시 저처럼 걷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있을까요?

 

저는 걷는 것을 좋아해서 살면서 민폐도 참 많이 끼쳤습니다. 사람들이 다 저처럼 걷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버스나 택시를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곳을, 상사와 함께 한 시간 넘게 걷기도 했고요. (그분이 이렇게 멀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 했다고 할 때, 뜨끔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분이랑 밤에 꽤 긴 거리를 걸었는데, 그 여름밤 산책의 상쾌함과 상대에 대한 호감을 착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K-소개팅 룰에 따라 세 번쯤 보니까 진지한 관계가 되어 버려서, 그제야 죄송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걷는 것을 좋아하신 줄 알았어요. 걸어 주신 것인 줄 몰랐죠……)

 

하지만 산책하며 좋았던 경험도 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는 고교 평준화 시절이어서 행정구역 상 같은 도시면 뺑뻉이를 돌려 학교를 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무려 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배정된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우리 동네에서 그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노란 봉고차를 계약해서 등하교한다는 얘기를 듣고 저를 바로 그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조금 유난스럽지만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밤 9시 정도였기 때문에 동네 친구들은 거의 다 봉고차를 탔어요.

 

그런데 저만 맨날 그 봉고차를 안 탔습니다.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과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걷는 시간이 좋았거든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배를 잡고 웃느라 짧은 거리를 가다 서다 오래도록 걸었어요. 불과 8~9시간 뒤면 다시 만날 친구들인데, 헤어질 때 그처럼 아쉬울 수가 없었죠. 그렇게 친구들을 전부 귀가시키고(?) 혼자 유유히 안양 1번가까지 걸어가서 찬란한 불야성 속에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그렇게 집에 오면 11시가 다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봉고차 기사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제가 너무 안 타서 저희 부모님께 돈을 받기가 미안하시다는 거예요. “제발 그냥 받아 주시는 건 어렵겠죠?” 되묻다가 너무 무례한 부탁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기사님 입장까지 차마 헤아리지 못했더라고요. 게다가 호랑이 같은 엄마가 제가 맨날 밤산책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날부터 다시 봉고차를 탔습니다. 쓰다 보니 이것도 민폐 사례네요. 

 

만약 누군가 저에게 왜 이렇게까지 민폐를 끼치며 걷느냐고 묻는다면, 너무 좋은데,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다 어느 날 울프의 『런던 거리 헤매기』라는 산문집을 읽다가 제 마음을 딱 설명해 주는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산책을 한다는 것은, 늘 같은 무늬로 반복되는 생각의 패턴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에서 사람들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정형 행동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에러에 걸린다는 설정이 나와요. ‘정형 행동’은 동물원에 갇혀 있는 맹수나 코끼리, 곰 등이 스트레스 때문에 제자리를 맴돌거나 자기 털을 뽑는 등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우리는 자아라는 거푸집 안에서 마치 동물들의 정형 행동처럼 같은 고민과 걱정을 거듭하고 자기 혐오의 털 뽑기와 자기 연민에서 비롯한 맨살 핥기를 반복하지요.

 

울프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자아에 고립되는 것은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과 그 안을 채운 익숙한 사물들의 영향도 있습니다. 우리가 집 안에 있을 때는 사물들이 끊임없이 과거의 추억을 불러내고, 그 기억 속에서 ‘자기다움’이 재현되기 때문에 우리가 자아의 무게를 더 크게 느낀다고 보았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저희 집에 있는 소파는 온라인 중고나라에서 구입한 중고품인데요. 이 소파를 찾기 위해 제가 얼마나 애태웠는지 모릅니다. 작은 집에 딱 맞는 낮고 예쁜 소파거든요. 그래서 이 소파를 볼 때마다 ①이 소파의 색과 형태가 얼마나 제 취향인지 생각하다가 ②하지만 중고품을 바보같이 거의 새것 가격에 샀다고 후회하다가 ③그럼 큰 집으로 가서 다른 큰 소파를 사려면 몇 년이 걸릴까…? 하는 근심으로 쭉쭉 뻗어나갑니다.

이럴 때가 바로 산책을 나설 타이밍입니다. 적당한 쿠션감이 있는 운동화를 골라 예쁘게 끈을 고쳐 매요. 그리고 길거리로 나서는 거죠.

 

일단 나가자! 일단 인도에 올라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상점을 지나 힘차게 걷다 보면, 여기가 자아의 직선길인지 오솔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다리에 느껴지는 리듬을 따라 걸을 뿐입니다. 그리고 걷다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요. 큰일이었던 것들이 쪼금 작게 보이고, 반대로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누군가의 표정이나 말 한마디가 갑자기 무겁게 와닿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밀폐된 공간이 환기되듯 ‘나’라는 좁고 작은 방에서 생각들이 조금씩 움직입니다. 

 

울프가 이 산문을 쓰고 발표했던 1927년 전후의 상황을 생각하면 걷는다는 것의 의미는 한층 크게 다가옵니다. 당시만 해도 ‘공공의 공간’이었던 거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울프는 산책을 나가려면 ‘쇼핑’하러 간다는 구실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문구점을 들러 연필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대죠. 그는 헌책방에 들러 죽은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하고, 문구점에서 주인 노부부와 대화했던 찰나의 순간들을 글 속에 스케치해 갑니다. “헌책은 길들지 않은, 부랑하는 책이다.” 네, 부랑하는 것들은 살아있습니다.

 

울프는 한겨울 저녁 즈음이 가장 걷기 좋은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거짓말! 한겨울 저녁은 아무리 산책을 좋아하는 저도 집에 있고 싶은 시간인걸요. 산책에 좋은 계절은 단연코 늦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이 아닐까요? 그런데 굳이 겨울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 글을 쓰던 때가 겨울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의 ‘오늘’이요.

오늘 점심시간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점심을 거를까 하다가 선배들의 권유로 회사 앞 한식 뷔페에 갔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커피를 사 들고 잠깐 걸었어요. 더 걷자고 조르지 않았습니다. 제법 사회화되었죠?ㅎㅎ 산책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실은 ‘나’로 살기 버거워서인데, ‘날씨가 좋잖아요’라는 말 한마디로 핑계를 만들 수 있는 그런 계절이니까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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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nenco

2026.09.21

에피소드들이 너무 공감되서 책 읽어보고 싶어졌어요ㅎㅎ 저도 고등학생 시절 미술학원이 10시에 끝나면 친구와 1시간 가량 집까지 걸어다니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눴던 무수한 이야기들과 가벼운 농담에도 배꼽 빠지게 웃던 기억들이 너무 소중해요ㅎㅎ 30대에 접어든 지금은 퇴근 후 혼자 30분, 1시간씩 산책하며 사색하는 걸 좋아해서 이 책은 무조건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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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송얀증

2026.09.18

저도 걷는 거 좋아해요ㅎㅎ 걷고 싶어서 집에 갈 때 일부러 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고, 버스를 탈 때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정거장보다 몇 정거장 전에 내려요.

걸어가면서 하늘의 색이 점차 바뀌는 걸 보고 새로 생긴 상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게 낙이에요ㅋㅋㅋ 그리고 신기한 게 걸을때는 흔한 사물도 새롭게 느껴지더라고요. (교통 표지판, 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풍향계 등등..)

왜 그런건지 그리고 왜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지 설명하지 못했는데 <런던거리 헤매기>를 읽으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완독한 후에 꼭 사서 읽어볼게요!!

늘 생동감 있는 책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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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gten

2026.09.17

혜진 님, 야자가 9시에 끝나는데 매일 11시는 되어야 들어오는 딸래미를 보며 어머님이 과연 모르셨던 걸까요, 아니면 밤산책의 기쁨을 위해 모른 척 눈감아주셨던 걸까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살며시 후자에 한 표를 던져봅니다.ㅋㅋ
​산책을 통해 '나'라는 좁은 방을 벗어날 수 있다는 문장이 참 깊게 와닿습니다. 저는 걷는 걸 그리 즐기지 않아서 그 방법을 택할 순 없겠네요. 대신 나름의 자아 탈출법으로 '세차'를 택하곤 해요. 3시간쯤 헥헥대며 차를 닦다 보면 복잡한 고민 따위는 까맣게 잊히더라고요. 이젠 제법 선선해졌으니 날이 덥다는 핑계로 자연 세차(폭우)에만 의존하던 게으름을 털고 조만간 세차하러 다녀와야겠습니다.
​저는 아직 사회화가 덜 되었는지 오늘 직장 회식에 불참하고 운동을 다녀왔습니다만, 덕분에 마음은 한결 상쾌하네요.
매달 넷째 주 수요일에 연재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글이 올라와 기쁩니다. 혜진 님의 새 글을 읽으니 기분이 더욱 상쾌해졌어요. 다음 연재 때까지 무탈하시기를... 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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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버지니아 울프> 저/<이미애> 역

출판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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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 편집자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책을 기획, 편집하고 소개하는 일을 합니다. 유튜브 채널 '민음사TV'에서 '세문전 독서클럽'을 진행하고 있으며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속 작은 코너 '박혜진의 클래식은 영원하다'와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속 작은 코너 '박혜진의 고전 덕질'에 고정 출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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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으로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다양한 소설 기법을 실험하여 현대문학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화주의자, 페미니즘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빅토리아 시대 소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고, 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당시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여성들의 적극적인 예술 활동 참여, 동성애자들의 권리, 전쟁 반대 등 빅토리아시대의 관행과 가치관을 공공연히 거부하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머니의 사망 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의 사망 이후 울프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다. 1905년부터 문예 비평을 썼고,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버지니아 울프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며 다작을 남긴 야심 있는 작가였다. 그녀의 픽션들은 플롯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초점을 맞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쓰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출항』,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러웨이 부인』, 『파도』,『현대소설론』 등과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과 속편 『3기니』 등이 있다. 1927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등대로』를 발표하며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올랜도』, 『파도』, 『세월』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 왔던 울프는 1941년 독일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