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바깥으로 내몰린 존재들은 질서를 뒤집기보다 바깥에 남아 서성이다 서로 사랑을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사랑만으로 질서가 무화된다.”(105쪽)는 문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변호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비평을 쓰’는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 작가의 에세이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2021년 첫 출간 이후 5년의 시간이 지나, 여섯 편의 산문을 더한 개정판이 출간되어 반갑기만 했는데요. 목정원 작가는 “지나간 슬픔들을 다시 만나는 일이 애틋했”다고 개정판 작업의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 이야기에 어딘가로부터 멀어졌다는 느낌, 조금 멀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슬픔의 모양을 오래 어루만지는 어떤 사람의 등을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면서요. 그 사람이 앉은 작업실의 풍경과 향, 소리 같은 것들도 모두 궁금했습니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개정판 출간 후기를 들려주세요.
무엇보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도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해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들이 더욱 멀어져 버렸고, 글을 써 내려가던 시절마저도 까마득해졌다는 걸 체감했어요. 그때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쓴 장면들이 지금의 제게 더 이상 생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책에 쓰인 만큼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낯설어진 기억을 따라가며, 지나간 슬픔들을 다시 만나는 일이 애틋했어요. 뒤늦게 무언가를 달리 이해하거나, 예전의 저와 화해하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런 저의 시선 때문인지, 개정판에는 초판을 초과하는 또 하나의 세월이 담겼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분들께 무엇을 더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간 써왔던 짧은 원고들을 추가했는데요. 제각각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의뢰받고 쓴 글들이라 잘 어우러질까 싶었지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보니 그 새로운 글들이 세월의 푸른 바람처럼 쉬어 갈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느껴졌어요. 맥락을 모르고 만날 수 있어 더 멋대로 머물다 갈 좋은 기슭이 될 수도 있겠다고요. 부디 그렇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가장 아낀다고 밝히셨던 사진이 표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초판에는 뒤표지에 실렸던 사진이기도 하고요. 이 선택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요?
본문 사이에 배치된 사진들은 저마다 이유를 갖고 골랐던 반면, 초판에서도 그 표지 사진은 사실 이렇다 할 설명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그것이어야만 할 것 같아서, 이미 정해진 뜻을 따르듯 그저 놓아둔 것이었어요. 이유는 도리어 후차적으로 조금씩 찾아온 것 같습니다. 이유라기보다, 그 사진 속에 머무는 저의 감각들을 오래 생각했달까요. 도망치듯 떠났던 바다. 처음 넣은 흑백필름. 꿈결 같은 해안사구. 걸어 올라가던 이들의 행렬. 맨발에 닿은 모래의 차가움과 가느다람. 푹푹 빠져 제자리를 허우적대던 걸음. 그때 그 서늘하던 모래의 다정. 마침내 다다른 언덕 위가 아득히 넓어 또 하나의 광활한 세계 같던 것. 나란히 앉아 일몰을 기다리던 사람들. 떠오르던 달. 개정판 표지는 그 사진이 전체를 감싸고, 종이에서도 어딘지 모래 질감이 나서, 우리를 더욱 먼 데로, 미래 같기도 과거 같기도 한 시간 속으로 데려갈 것 같은 꿈을 줍니다.
ⓒ 목정원, 2017년 겨울, 아르카숑의 모래언덕
“무언가를 오래 좋아해온 사람이 지닌 자신만의 역사와 그 섬세한 애정의 방식”(181쪽)이야말로 이 책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궁금해져요. 작가님에게 새겨져 있는, 남과는 조금 다른 섬세한 애정의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삶에 들이는 것, 알아가는 것, 감히 좋아한다 말하게 되고, 깊이 껴안아 나의 일부로 삼는 시간 속에는, 무엇보다 육체가 관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저의 비법 같아요. 사실 인지하지 않아도 그 일은 이뤄지고 있지만, 인지하면서부터 더욱 섬세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기타를 연주하거나 차를 우리는 작은 반복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요. 손의 모양이 어떠한지, 모양에 따른 감각이 어떠한지, 어떻게 힘을 주고 빼야 하는지, 호흡과 동작의 상관관계는, 편안함과 불안함의 차이는 무언지, 온도와 무게에는 어떻게 익숙해질지, 맛과 향이 온몸에 번지는 기운을 어떻게 더 깊이 감지할지. 궁금해하면 할수록 세계는 비밀을 드러내요. 몸과 세계가 서로 접속합니다. 그것을 믿고 계속 궁금해하다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어요.
“세계를 파열시키는”(167쪽), “위험하고 비천한 바깥”(152쪽)의, 그러니까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을 옹호·변호하는 작가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소중하기만 합니다. 우리를 멈춰 서게 하는,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타격을 주는 진실은 불편하고 불쾌하죠. 그럼에도 질서 바깥을 들여다보는 일은 왜 중요할까요?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동시키는 걸까요?
그 일이 불편한 가장 큰 이유는 부끄러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알게 되는 순간에는 늘, 그간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지니까요.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받아들여야만 진정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때 우리는 알게 된 세계로 이동합니다. 거기서는 다시는 모를 수 없어져요. 돌이킬 수 없어져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주위에 먼저 도착한 동료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과 함께 아주 조금씩 세계를 물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는 세계로요. 모두가 제 부끄러움을 인지했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애쓸 수 있는 세계로요.
「김동현 선생님께」를 읽으며 참 뭉클했습니다. 한편 작가님은 이 편지를 쓰는 내내 망설였다고 하셨어요. 어떤 고민이 있었던 걸까요?
개정판 맨 뒤에, 삽입된 글들 각각이 쓰인 경위를 새로 정리해 실었는데요. 「김동현 선생님께」를 쓴 배경을 서술하면서 무척 슬펐습니다.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모든 마음이 그대로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날 새벽 잠이 오지 않는 호텔방 창가에 붙박인 듯 서서 메모장에 편지를 써 내려가던 시간. 망설였던 것은, 문장으로 정리해버리면, 정말로 정리될 것 같아서요. 단정하게 매만져진 한 시절로 매듭되어 선생님과 함께 했던 모든 날들이 과거로 덮일 것 같아서요. 어떤 죽음은 때로 영원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애도하지 않은 채 영영 아프기를 택하고 싶으니까요. 그 밤 그 기로에 저는 서 있었고, 글을 씀으로써 어쩔 수 없이 애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못내 슬펐습니다.
개정판 서문의 ‘슬프고 강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읽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74쪽)고 한 문장과 연결해서, 2026년의 작가님은 어떤 슬픔에, 어떤 죽음에 마음을 떼지 못하고 계신지요?
노동자들의 죽음, 그중에서도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청소년들의 자살, 장애인과 성소수자, 여자 들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세상이 살릴 수 있었던 목숨들을 생각하고, 그 세상에 몫이 있는 어른으로서 부끄러워하고, 그럼에도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서, 저보다 더 슬프면서도 저보다 더 강한 사람들, 그 죽음들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 싸움이 살려내고 있는 또 다른 목숨들을 생각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 함께 한 반려 [ _______ ]
글 앞에 앉을 때 주로 차를 마십니다. 고요한 집중의 기운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때 제가 필요로 하는 건 차의 맛이나 카페인이 아니라, 일상의 의례와도 같은 그 행위들이에요. 물을 끓이고, 보온병에 채우고, 찻잎을 넣고 우려, 거름망에 걸러, 긴 잔에 부었다가 낮은 잔에 옮겨, 비어 있는 긴 잔에 남은 차의 향을 맡고, 작은 잔을 손에 쥐고 홀짝이는 것이요. 그 일의 하릴없는 반복이요. 그것에 기대어 글에 빠져들어가곤 합니다. 맛과 향이 옅어져가는 동안. 그 행위 속에서 어쩐지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작업은 거실에서 하고 있어요. 거실과 면한 주방 식탁에서 할 때도 있고, 사진 속 책상에서 할 때도 있습니다. 참고할 수 있는 책들이 곁에 널려 있는, 어지럽고도 아늑한 상태를 좋아합니다. 아침에 깬 직후 맑은 머리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고요. 아침 차는 카페인 걱정을 덜 해도 괜찮으니까요. 글은 아주 느리게 조금씩 쓰는 편인데요. 우선 전날 쓴 부분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한참 매만지고, 그 끝에서 이어 갈 길이 마음에 환히 보일 때 비로소 이어 씁니다. 그렇게 매번 지난 시간에 다음을 잇는 방식으로 쓰게 되어 속도가 더딘 것 같습니다. 개정판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새로 쓰는 것은 느리지만, 그만큼 꼼꼼히 살피면서 쓰기 때문에 교정에는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깊이 들어갔다 와야 했으니 큰 품이 들긴 했어요. 책 전체를 소리 내어 천천히 읽으면서 고쳤습니다. 독자분들마다 다르게 읽으시겠지만, 그래도 저는 문장 속에 제 말의 리듬을 얹어 두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호흡과 리듬이 편안한 길잡이가 되기를 빌고 있어요.

이번 책 출간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작년 초부터 새로운 책을 쓰고 있는데, 아마 내년 말까지는 써야 할 것 같아요. 그 집필이 하염없던 중에 아침달의 제안으로 개정판 작업을 하게 됐어요. 잠시 숨 돌리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래서, 개정판이 나오고 나면, 책 쓰던 걸 멈추고 전국의 작은 책방들을 다니면서 개정판으로 행사만 몇 달을 하고 싶다고, 속없이 꿈꾸었던 적이 있어요. 즐거운 도피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저는 다시 집필로 돌아왔어요.
작업 중 특히 인상깊게 본 타인의 작품은 무엇인가요?
새 책은 관객의 역사에 관한 학술서예요. 연극이 처음 만들어지던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해, 지금은 17세기 프랑스에 당도했습니다. 개정판 작업을 하던 즈음에는 코르네유의 <르 시드>라는 작품에 대해 쓰고 있었어요. 거기 ‘쉬멘’이라는 여성이 나오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그럼에도 그를 계속 사랑하거든요. 초연 후에 그 여성의 행실을 두고 <르 시드>를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고, 작가는 이후 평생에 걸쳐 그녀를 변호했어요. 개정판을 작업하면서 내내 쉬멘과 그녀의 사랑을, 그 사랑 속에 그녀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명예와 미덕을 생각했어요. 그녀를 변호하는 마음으로 아침마다 눈을 떴어요.
인류가 처음에 추었다는 춤.
삶으로부터 미처 격리되지 못한.
그것은 고작 사랑하기. 애도하기.
그로부터 오늘의 이 춤은 얼마나 먼가.
얼마나 가까운가. (53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출판사 | 아침달
신연선
읽고 씁니다. 장편소설 『구름이 겹치면』, 에세이 『하필 책이 좋아서』(공저)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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