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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젊은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전쟁의 피해자”

문학이나 예술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다 『내 서재 속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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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공식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해주는 그런 것”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고전이란 어려운 낱말과 낯선 작가 이름으로 힘주어 읽어야 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훨씬 즐거운, 감정을 고양시키는 이미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먼 땅에서 나고 자란 동포, 여성으로 태어난 남성, 꼭 거창한 (인권과 같은)주제가 아니라도 사람에게는 모두 다양한 정체성과 주류에 편입되지 않는 비주류의 범주가 있다. 장애인의 반대말이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듯 사실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한 인간이 없다고 해도 좋겠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인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크게 다를 것이다. 서경식, 그로 말하자면 재일조선인으로 일찍이 시인을 꿈꾸던 소년이었으나 모어와 모국어가 달랐기에 겪어야 했던 혼란을 평생 동안 감내하며 살았다. 조국을 찾아 일본을 떠난 두 형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고, 형들의 구명에 애쓰느라 그는 “대학 졸업 후 10년 정도 백수”로 지냈다.


그 스스로 ‘경계인’이라 말하는 재일조선인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 주변인으로서 서경식 교수가 평생 가졌던 감각은 그에게 꾸준히 다른 세상과 ‘여기’를 함께 바라보는 힘으로 남았다. 일본인 틈에 있는 조선인, 한국어를 충분히 향유하지 못하는 조선인,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 살아야 했던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질문은 너무나 컸다.


그런 그에게 고전이란 어떤 것이었나. 그는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공식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해주는 그런 것”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고전이란 어려운 낱말과 낯선 작가 이름으로 힘주어 읽어야 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훨씬 즐거운, 감정을 고양시키는 이미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문학이나 예술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서경식 교수의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것은 이 삶의 외양을 넓히는 데도 크게 작용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실은 남에게서 주어진 것들이라는 사실, “신자유주의적인 시간 감각”이 나의 “사고나 생활양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지금 겪는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안다면 삶은 훨씬 다양한 빛깔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아주 선량한 사람”이지만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알고 “그 구도를 거절하지 않는 한 이 사람은 결국 국가 범죄의 공범자가 된다”고 말하는 서경식 교수의 말에서 다시 또 고전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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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고전


‘고전’이라는 이름이 주는 첫인상은 아마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닌가 싶어요. 머리말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교양서 목록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렇게 읽힐 위험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웃음)


우선 저 자신이 원래가 소위 지식인이 아닙니다. 물론 제가 좋아해서 글쟁이가 됐는데요. 대학교수가 되고 주변 교수들을 보니까 기본적인 고전을 다 읽고 했던, 말 그대로 고전적인 지식인들이더라고요. 저는 그렇지 않고 주변인, 경계인이어서요. 우연히 그런 자리에 있게 됐을 뿐이지요. 일반인으로서 시간이 있을 때 원해서, 좋아해서 책을 읽었을 뿐이에요. 이 책도 원래는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던 건데,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시리즈 제목 자체가 제게는 거북하다 할까 쑥스럽다 할까, 그랬죠.


기본적으로 고전 서적의 내용 설명이라기보다 ‘나’라는 사람과 그 책의 접점이랄까 만남이랄까 그런 얘기를 썼을 뿐이에요. 그런 식으로야 쓸 수 있지 다른 본격적인 방법으로는 못 썼을 것 같아요.

 

고전이라는 도구를 빌려서 나의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얼마든지 ‘저 놈은 고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다’ 하는 욕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항상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요.(웃음)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말씀처럼 목록들 역시 흔히 생각하는 ‘필독 고전’ 목록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책들이 공통적으로 선생님께 주었던 번뜩임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아요. 이 목록들이 나에게 온 이유랄까 그런 것이 궁금합니다.


연재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제 나름대로 내게 재미있었던 책에 대해서 얘기할 뿐이다, 이렇게 가볍게 생각했지요. 아시다시피 일본 사회 상황이 아주 나빠지고 있어요. 정치상황 자체도 우경화되고 있고요. 지난 2~3년 사이에도 글을 쓰면 쓸수록 심해져서, 이런 사회에서 젊은 사람들이 다시 발견하고 다시 봐야 하는 책은 어떤 책인가 하는 문제의식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저는 1951년생이고, 60년대 일본사회에서 사춘기, 청춘기를 보냈습니다. 그 시기가 지금 돌이켜보면 전쟁 후 일본의 평화주의, 민주주의, 인문학이 가장 풍요로웠을 시기였죠. 물론 그때는 그렇게 생각 안했고,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다, 더 좋아져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요. 1970년대 후반 이후 계속해서 사회가 안 좋은 방향으로 왔기 때문에 60년대,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대학교 1~2학년까지 일본에서 배웠던 고전의 가치를 젊은 세대에게 얘기해놓아야 한다고도 생각했지요. 일본 분들 중에도 물론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저 같은 일본의 소수자로서의 느낌이 또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나에게 휴머니즘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인권 등을 가르쳐준 일본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죠. 그런 문제의식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이 책에 기본적으로 있는 바탕이라 할 수 있죠.

 

처음 연재 당시에 ‘재미를 주었던 책들’을 쓰자고 가볍게 생각했다고 하셨는데, 그 재미라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어떤 책을 ‘재미있다’고 느끼시는 건가요?


어려운 질문입니다.(웃음) 사실 저는 재미있게 책을 읽는 사람인데요. 하나는 일본의 시대소설류가 있죠. 에도 시대를 다룬 소설들도 재미있는 것들이 있어요. 또 저는 등산이나 모험을 다룬 다큐나 소설도 많이 봐요. 공부라든가 자기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기 위한다는 고상한 의식 없이 읽는 거죠. 대학 졸업 후 10년 정도 백수 시절이었는데 그때 그런 책도 많이 읽었어요. 그런 것 중에도 제 기준으로는 고전인 것도 있어요. 그 얘기를 한국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 고민하다 연재가 끝나버렸어요. 사실 저는 그런 이야기까지 가고 싶었어요. 몽테뉴, 칸트뿐 아니라 아주 대중적인 책들 중에도 고전이라 할 만한 책들이 있다고 해야 어떤 것은 고전이라 하고 어떤 것은 아니라 하는지 기준이 보이잖아요. 그것까지 해야 재미가 있을 텐데 못했습니다.


제게 뭐가 재미있느냐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 고정관념을 무너지게 하는, 해체해주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제 사고의 외양을 넓혀주는 그런 것이에요. 공식을 외워서 어딜 가나 그 공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공식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해주는 그런 것이 제게는 고전이에요. 그런 것은 사회과학서, 철학서뿐 아니라 대중소설도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에요.

 

얼마 전에 『시의 힘』이라는 책도 출간이 되었는데요. 시도 그렇게 읽으시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읽어요? 몰라요. 저는 그렇게 읽었을 뿐이지요.(웃음) 저는 중학교 때 시인이 되려고 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자비로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죠. 한 인터뷰에서 한 얘기인데요. 우리에게는 50년이란 세월이 별로 긴 세월이 아니다, 엊그제 같은 얘기다, 라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그런 얘기를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는 거죠. 젊은이들은 모르지만 어제의 세상 풍경이 이런 것이었다, 전쟁은 이런 것이었다, 전쟁 후는 이런 세상이었다, 를 말해야 해요. 그걸 왜 시로 써야 하느냐면, 너무 로고스적인, 언어이성적인 얘기로만 하면 포함될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저 자신은 그렇게 쓸 재주가 없지만 시가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한국말로 시를 쓰거나 한국의 시를 진짜로 이해하는 경지까지는 못갈 것 같아요. 그냥 직역해서 어떤 의미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시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언어의 리듬이라든가 울림이 의미가 있지요. 그런 걸 맛볼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채 아마 세상을 떠날 것 같아요. 안타까운 일인데 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시에 대해서 조금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런 처지여서이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시에 대해 다시 관심 갖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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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고전은 프리모 레비


에드워드 사이드, 프리모 레비, 루쉰 등에 관한 글들은 특히 선생님께서 그간 해왔던 이야기들과 맞물려서 질문거리들을 줍니다. 제 경우, 프리모 레비로 들어가는 입구가 선생님의 책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였거든요. 선생님이 갖고 계신 ‘전달자/질문자’로서의 정체성이 궁금합니다.


죄송합니다. 항상 똑같은 사람들로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웃음) 전달자로서의 정체성이 프리모 레비만큼 있는지는 모르지만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프리모 레비 책을 통해서 저 자신의 정체, 위치를 알게 됐다 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가장 소중한 고전이 프리모 레비라 할 수 있지요.


1989년에 감옥에 있던 형 둘이 모두 석방됐어요. 석방될 때까지 저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저 자신의 길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어요. 언제 석방될지도 몰랐으니 말하자면 임시의 삶이라 할까요. 그냥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었죠. 그런데 석방됐다, 자, 내일부터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가 던져진 거예요. 정체성이랄까 진로에 대해 처음 아주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 <아사히신문사> 출판부에서 글 청탁이 들어왔어요. ‘20세기의 천 명’이라는 짧은 평전집의 필진 중 한 명으로 글을 쓰게 됐어요. 그때 쓴 글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으로 묶였어요. 그 중 다섯 사람 정도에 대해서는 좀 더 본격적인 평전을 쓰자고 생각했었어요. 프리모 레비만 그것이 이루어졌죠. 그렇게 제게는 가장 소중한 고전이 됐어요. 말하자면 저의 여러 사유의 척도가 됐다고 할 수 있지요.

 

재일조선인이기에 더 가깝게 느낀 부분도 있었겠지요.


물론 재일조선인과 유대인은 다르죠. 하지만 경계인, 소수자, 피차별자라는 공통점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생각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 출간되고 읽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면 제게도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프리모 레비 외에 본격적으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가는 또 누가 있나요?


시인 파울 첼란이에요. 파울 첼란의 문제는 그대로 저 같은 사람이 일본 사회에서 맞서 싸워야 하는 문제기도 했어요. 보편적으로도 특히 아우슈비츠 이후 인간에게 던져지고 있는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요. 파울 첼란은 유대인인데 모어가 독일어죠. 시를 모어인 독일어로 쓸 수밖에 없는데 그 독일인들이 부모를 수용소에 살해했어요. 너는 적들의 말로 시를 쓰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파리로 망명해 시를 쓰고 소르본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데 독일어로 해요. 아시다시피 프랑스는 독일어를 잘 안 읽어요. 그러니까 주변에 자신의 시를 읽어줄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예요.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시를 쓴 사람이에요. 또 독일에서 상을 받게 됐는데 수상식장에서 누군가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했죠. 진짜 반유대주의 발언이었는지는 지금까지 의문이에요. 하지만 첼란은 그렇게 느꼈다, 그것이 중요하죠. 수상식장에서 첼란은 도망쳐버렸어요. 독일어로밖에 못쓰는데 독일에서도 도저히 못 견디는 사람이에요.


그런 처지가 조금 과잉되긴 하지만 제가 일본에 있는 처지와 비슷하게 보여요. 제가 겪어온 경험, 내 본의를 아무리 전달해도 상대방인 일본인 다수자가 그걸 왜곡하거나 오해하거나 자기 멋대로 해석해버리거나 하는 상황에 대해서 느끼는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첼란도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걸 느껴요. 그래서 첼란에 대해 공부를 더 하고 동유럽에 첼란의 흔적을 찾아 가는 순례 여행도 하고 싶었어요. 이제는 좀 무리일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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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 중요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시선을 꾸준히 말해오셨잖아요. 어린 시절과 달리 “벽 바깥으로 나온” 지금, 여전히 절망감이 있다, “피로감과 공허감에 침식당하는 감각”이라고 적으셨는데요. 인간 존재에 대한 절망도, 게다가 희망(고전)도 모두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요, 인간 존재에 절망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인간이면서도 인간에 절망할 수 있는 존재예요. 절망조차 안 하면 완전한 절망이죠. 제게 고전이 된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절망적인지에 대해서 얘기해온 사람들이죠.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에요.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갖고요. 그것이 교양이죠. 또 지금 이 순간만 보는 게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 이렇게 있게 된 유래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 말이에요. 이런 존재조차 없어지면 절망도 못하게 된 인간, 그냥 동물화, 기계화된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리지요. 절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희망이 여기에 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고요. 얼마나 희망을 찾아내기 어려운지에 대해 바로 보고, 그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인간이다, 이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희망을 말하기는 쉽지만, 절망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희망으로 가는 어려움을 말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마르크 블로크라는 사람이 나치에 저항해 나이 50세 넘은 대학 교수면서도 저항에 가담해서 총살을 당했죠. 이것을 겉으로만 이해하면 형식화가 되고, 그의 맥락,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게 돼요. 어떤 사상이라든가 사유가 생긴 지 불과 한두 세대 만에 거의 그렇게 형식화, 형해화가 돼요. 이 사람이 무엇을 외쳤는지, 무엇을 요구했는지, 왜 이 이념을 갖게 됐는지를 봐야 해요. 만약 마르크 블로크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이 사람의 사상은 어떤 식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계승해야 하는지, 이것이 문제지요. 마르크 블로크가 애국주의자였기 때문에 우리도 애국주의여야 한다고 해선 안 된다는 거죠.


고전이나 책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느끼는 게 이런 거예요. 우리의 사유, 사고를 끊임없이 형식화, 형해화 시켜버리는 힘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그것에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가 가장 어렵고 필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 책도 아주 조심해서 썼는데요. 서경식이란 사람이 이런 목록으로 이 책을 추천하고 있다, 이걸 다 읽어야 한다, 이걸 알아야 교양이 될 수 있고 모르면 안 된다, 그런 뜻이 아니죠.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결론이 아니라요. 그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가 제게는 가장 어렵기도 하고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말씀처럼, 불과 한 세기 또는 반 세기의 이야기들조차 너무 빨리 잊혀요. 그 곁에서 절망을 얘기하는 것조차 너무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맞습니다. 일본 지식인 중에 아주 쉽게, 아주 흔히 그 절망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벌써 절망했기 때문에 아무 꿈도 없습니다’라든가 ‘선생님은 아직 절망 안 하시니까 그렇게 저항하시는데, 저는 벌써 절망했기 때문에 안 합니다’하는 식이에요. 그건 자기 보신의 다른 표현일 뿐이지 진짜 참된 절망 아니지요. 이런 절망적 상황에도 아직까지 자기의 위치, 삶을 진짜로 위협받지 않은 사람들의 표현인 것이죠. 


일본 사회의 대부분 사람들은 에도시대, 메이지시대, 식민지, 전쟁, 민주화, 민주주의 하는 식으로 책장 넘기는 듯한 시간 감각으로 있어요. 저처럼 반 세기 이상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한쪽도 안 넘어간 느낌인데 말이에요. 단편화되어 있는 것은 대중들뿐이지 지배층은 계속되고 있다는 거죠. 우리의 사고 자체가 단편화되어 있고, 아주 짧은 문장으로 정답인지 오답인지 알아야 하는 식이니까 그런 척도로만 생각해요. 지금 당장 답을 못 내더라도 끈질기게 생각하는 태도 자체가 파괴당하고 있다는 거죠. 거기서부터 저항해야 해요. 그거 어려워요. 제가 이런 얘기하면 ‘선생님, 그럼 희망 갖게 될 만한 정책이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그런 거 없어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일상적인 생활 태도부터 우리 자신을 다시 우리 것으로 자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유하는, 고독한 시간에 대해 많은 작가들이 말하는 이유기도 한 것 같아요.


시간 감각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요. 일본을 비롯한 식민지 세력들이 들어오면서 철도에 시간표가 등장해요. 정확한 시간에 기차가 출발해서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선조에게는 너무 신기한 일이었죠. 농촌 공동체 생활이었기 때문에요. 산업식민자본주의, 아침 8시부터 공장에 들어와서 8시간 혹은 12시간 집단적으로 일하게 하는 자본주의적인 시간 감각은 영국에서 시작해서 식민지주의와 더불어 일본의 강제로 이곳에 들어왔던 거예요. 그것이 지금은 신자유주의적인 시간 의식으로 됐죠. 여행을 할 때도 목적지, 출발지만 넣으면 컴퓨터가 가는 길을 알려줘요. 이 방식은 도중이 없어요. 도중에 멋진 공원이 있다든가 가지 말고 여기서 놀자든가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어있어요. 5시간 걸리던 것을 30분에 갈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이 우리 거냐? 아니죠. 지배층의 것이에요. 남은 시간에 일해야 하죠. 19세기 말 산업자본주의적이던 시간 감각이 지금은 신자유주의적인 시간 감각이 되어 사람들의 사고나 생활양식을 지배하고 있어요. 지배가 가장 심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에요. 노예화가 된 거예요. 저도 노예죠. 철도를 안 탈 수는 없고요. 시간대로 안 되면 짜증이 나고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구도 속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언제든지 접속해서 언제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종속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그 자각하는 것이 잘 되지 않아 또 문제고요.


학자들도 그래요. 학문이라는 행위 자체가 그렇게 편성되어 있어요. 국가, 기업에서 연구비를 얻고, 1년에 몇 번 논문을 냈다면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문제죠. 쉽게 말하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방법을 조금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거예요. 책에 소개한 가토 슈이치 선생도 그런 사람이에요. 물론 아주 부자층이고, 저도 개인적으로 반감 안 느끼는 건 아니지만요.(웃음) 선생이 한 얘기 중 재미있는 건요.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 교수로 계셨을 때 베트남 전쟁이 벌어졌어요. 학생들이 일어나서 반전운동 했어요. 교수들은 처음엔 거의 아무것도 안하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학생들이 열심히 하니까 조금씩 교수도 가담하기 시작했죠. 그중 정치학, 경제학 교수들이 제일 마지막에 가담했대요. 자신의 연구로는 승산 없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던 거예요. 베트남은, 반전 운동은 승산이 없다고요. 학문적으로 그런 결론밖에 안 나오니 개인으로서는 참여 못 하지요. 학문이라는 게 그렇게 아주 역설적인 것이라는 거예요.

 

문학,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달랐나요?


승산이 없어도 참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던지는 폭탄 아래 베트남 아이가 있다는 걸 상상만 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사람부터 일어서기 시작했다는 거죠. 문학이나 예술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죠. 그걸 지닌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돼요. 가토 슈이치 선생님은 도쿄게이자이대학에서 강연하셨을 때, 문학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왜 읽고 왜 재미있어하는지 하는 얘기하셨는데요. 그것이 문학사상 명작이라 읽어야 한다든가 이것을 읽어야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알게 된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거죠. 그것을 읽으면 일본인인 우리가 순간적으로 프랑스인이 될 수 있고,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19세기를 살 수 있다는 거였어요. 우리 상상의 틀이 이렇게 확장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미다, 그렇게 얘기하셨어요. 그것이 고전이라는 거예요. 그걸 알면 세상이 조금 더 나을 거라는 얘기를 하셨어요. 가토 슈이치 선생이 그렇게 얘기했다고 일본 사회가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그런 얘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희망이라고 하면 희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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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이 되고 있는 사람들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에 관한 뉴스가 연일 뜨겁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를 규탄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많고요. 일본 내부도 마찬가지겠지만 막상 ‘주변’에서는 이런 내용에 무섭도록 무관심한 것이 또 사실입니다. 사회, 정치 현상에 무관심한 선량한 사람들, 그들도 희생자지만 만일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또다시 그들이 타자를 해치게 된다, 라고 적은 대목이 떠오르는 장면이에요.


일본은 이중기준의 나라, 자신은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서 전쟁하는 나라이죠. 원래도 그랬는데 공공연하게 그렇게 된 국면에 왔어요. 이건 전후 일본의 근본적 문제예요. 일본인 대다수가, 진보적인 사람조차 자신들은 평화주의 국가라고 생각해요. 지금 헌법 9조 개정 반대 운동하는 사람도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전통을 지키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어요. 우리는 과연 그런가 하는 의심으로 보고 있죠.


패전했을 때 일본 지배층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천황제 문제였어요. 천황제를 지키려다 오키나와전도 그렇고, 원폭도 던져지고 했지요. 괜히 수십만의 사람들을 그 때문에 죽였어요. 결국 상징 천황제라는 식으로 정치적인 권한은 없이 국민의 상징으로 남겨요. 그것도 이중기준이죠. 그 대신 미국은 일본이 또다시 군사력으로 자신들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헌법 9조를 만들었어요. 이 두 가지가 전후 일본의 이중기준의 시발점이에요. 일본사람들이 참된 평화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천황제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지, 자기 나라가 평화주의라고 하면서 사실은 뭘 해왔는지에 대해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척도라고 보고 있어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외치며 싸우는 게 좋은 일인데, 지나치게 기만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건 이중기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지 이중기준 자체를 그만두자는 얘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어요.

 

무척 어렵고, 뿌리 깊이 복잡한 문제기도 하네요.


특히 이번 여름에는 젊은 학생들이 많이 일어서고 운동했어요. 친한 다카하시 교수가 도쿄대에서 30년 동안 있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얘기도 했어요. 그 정도로 새로운 흐름인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앞으로 어려운 싸움을 해가면서 우리는 아주 자기본위적이었다, 우리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런 것을 알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돼야 새로운 사회가 될 수 있어요.

 

한국은 지금, ‘한국이 싫어’ 이민을 고민하는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건 대단한 꿈이 아니라 아주 낮은 수준의 희망 정도에 불과하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숫자가 말하고 있죠. 한국은 출산율이 가장 낮고, 자살률이 일본보다 높은 나라죠. 그러니 그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네요. 삶의 모든 시간을 국가나 기업에 지배당하고 있어요. 학생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부터 0교시부터 밤 11시까지 공부하고요. 언젠가 무리가 와서 파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모두가 너무 정신이 없어요. 차분하게 생각하고, 천천히 얘기 나누고, 책이나 볼 새도 없이 사는 상황처럼 보여요. 젊은 사람들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없지만 어디로 가나요? 


어느 정도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니까 더 이상 말씀드릴 수 없는데요. 인간이라는 게 난민이 되거나 망명을 하거나 고향을 버리거나 하는 것은 고전적으로는 못 먹게 되거나 전쟁이 터지거나 그런 상황을 상상하죠.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전쟁이죠. 신자유주의 전쟁의 피해자라 할 수 있어요. 이 사람들이 당장 못 먹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교육도 받았고, 노력하면 해외에 나갈 방법도 아니까 고전적인 난민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난민화가 되는 거죠. 이들에게 자네들은 한국 사람이니 한국에서 버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사회를 조금 더 있고 싶은 나라로 만드는 것밖에 대책이 없는 것 같아요. 민족주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살기 좋은 나라가 되면 외부에서도 사람이 많이 들어오니까요.

 

2011년,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는 일’로 원전사고를 꼽으셨어요. 그렇다면 지금, 가장 크게 관심 쏟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일본의 소수자로 지내면서 소수자의 시선으로 비판을 해왔는데요. 그걸 더 깊이 파악하고, 극복하려는 언어행위, 표현행위가 어떤 것이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언어적인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장 폴 사르트르가 그런 말을 했죠. “반유대주의는 하나의 정열이다.” 그런 정열이라는 것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가 풍요로웠을 때는 잘 안 보였어요. 극복이 돼서 일본이 좀 더 합리적인 나라가 될 거라는 근거도 없는 낙관주의가 있었는데요. 60~70년 대 그 순간만 다른 모습이 보였을 뿐이지요. 일본을 비합리적인 정열로 서로를 유착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볼 때, 이 집단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 비판을 심도 있게, 심각하게 해야 해요. 그것이 오히려 문학적인 행위, 예술적인 행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거의 일본에 대해서만 말씀 드렸는데, 거의 대한민국과 공통점이 있는 얘기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법을 개정해서 표면상 허용되지 않는 해외에서의 무력행사를 합법화시키는 해석을 했죠. 말하자면 일본의 자위대가 실제적으로 군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어요. 대한민국은 어떻게 보면 일본의 모범이에요. 군대가 있고, 병역제가 있고요.

 

대한민국에 있고 일본에 없는 것은 국가보안법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일본에서 국가보안법이 생기지 않을까 해요. 일본에 있고 한국에 없는 것은 천황제예요. 한국에 천황제가, 일본에 국가보안법이 생기면 이 두 나라는 쌍둥이 같은 나라가 돼요. 미국이 제일 좋아할 거고요. 그러니까 서로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신 차려야 한다, 그런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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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속 고전서경식 저/한승동 역 | 나무연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 서경식, 그가 자신의 서재 속 책들 가운데 마음에 품고 있던 열여덟 권의 고전을 세상에 꺼내놓았다. 자신의 독서 이력과 사유를 한껏 드러낸 이 글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순간 그 책을 만났으며 어느 구절에 밑줄을 치며 성찰했고 또 어떤 깨달음과 위안을 얻었는지를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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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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