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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인생책]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책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스칼렛 오하라가 되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눈치 보지 않고. 죄책감 느끼지 않고. (2021.01.05)

정아은(소설가)


이 작품을 처음 읽던 십대 때는 온통 레트 버틀러만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남자가! 잘 생기고, 능력 있고, 시대상황을 꿰뚫는 지성에, 섬세한 감성까지. 이성에 대해 한창 관심이 일던 때, 현실 속 또래 남자애들이 모두 여드름 송송 난 철딱서니로 보이던 때, 레트 버틀러는 십대 소녀의 허황된 환상과 허영심을 원 없이 채워주었다. 주인공인 스칼렛이나 멜라니, 애쉴리는 레트를 빛나게 해주기 위한 조연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특히 스칼렛 오하라라는 인물은 터무니없는 바보로 여겨졌다. 자기가 누굴 사랑하는지 그렇게 오랫동안 모를 수가 있나?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작가가 억지스런 캐릭터를 설정했구먼!



작품을 두 번째 읽던 이십 대 때,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대학을 마치고 막 사회에 나가 ‘다소곳하면서도 섹시하고, 조신하면서도 애교가 넘쳐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받던 때였다. 어디에서나 환대 받았지만, 한 편으로는 무시 받는 것 같은 이중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을 외모와 젊음으로만 보고 한 명의 온전한 성인으로 대해주지 않는 데서 오는 소외감이라는 것을 몰랐던 때이므로, 나는 도대체 이 사회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감을 잡지 못했다. 어떨 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어떨 땐 엄청나게 무시하는 것 같지? 그런 시기에 스칼렛이라는 강인한 여성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강하고, 일관되고, 자기 이익과 관련된 것 외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깡다구’가 굉장해보였다. 내게 쏟아지는 사회적 압력,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차를 대접하라거나, 기분을 살펴주라거나, 친절하게 웃어주라는 압력이 가장 강했던 때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며 사는 여성의 모습을 보며 받았던 쾌감. 만족감. 그것은 문학작품을 통한 대리만족이었다.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스칼렛 오하라가 되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눈치 보지 않고. 죄책감 느끼지 않고.

책을 세 번째로 펼쳤던 삼십 대 때, 이 기나긴 장편소설이 ‘역사’소설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남북전쟁과 흑인노예제도가 그제야 의식에 들어왔던 것이다. 첫 두 번의 독서에서 전쟁과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십대와 이십 대의 내 젊은 뇌리에서 그런 시대배경들은 모두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라는 화려한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장식하는 희미한 안개꽃으로 뭉뚱그려졌다. 시대배경이나 공간묘사가 나오는 부분은 건너뛰면서 읽거나, 읽더라도 빠르게 스캔하며 읽었고, 읽으면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서른이라는 고개를 넘어가면서, 사회에서 혹독하게 시달리며 일하고, 아이 둘을 낳아 헉헉대며 키우고, 그 과정에서 정치와 경제와 역사라는 분과가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며 살아가는 내 삶과 구체적인 연관성을 갖게 되자, 무심하게 지나갔던 전쟁 장면과 당시 남북의 경제상황, 노예로 살아야 했던 흑인들의 풍경이 의미를 갖고 다가왔다. 흑백처리 되었던 시대배경이 갑자기 컬러화면으로 바뀌며 선명하게 풍경을 완성하는 순간,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이 책이 역사소설이었구나!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는 시기부터 전쟁의 참화에 시달리는 나날, 종전 뒤 완전히 사라져버린 문명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남부 사람들의 시공간을 어찌나 촘촘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묘사했는지, 나는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설의 작가는 분명히 그 전쟁을 겪었을 거라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렇게 세세하면서도 총체적으로 완성도 있게 그려내지 못했을 거라고. 독서를 마친 뒤 책 뒤에 붙은 연표를 통해 작가가 남북전쟁이 끝난 지 삼십 오년 후에 태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쓰는 인간의 위대함을, 문학작품의 존재의미를 전율하며 느낀 순간이었다. 인간이 자기가 한 순간도 발담가본 적이 없는 시대를 이렇게까지 그려낼 수 있다니. 우리네 인간 종족은 얼마나 놀라운가. 얼마나 탁월한가.

그 뒤로 이 작품을 몇 번 더 읽었다. 삼십대 후반에서 마흔 초반 사이에, 이 책을 인물별로, 전쟁부분만 골라내서, 혹은 공간묘사만 발췌해서 읽었다. 나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되면서 이 책을 ‘테크닉’ 면에서 다시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재미를 위해 불쑥 읽기도 했고, 삶이 주는 고통과 절망감에 어딘가로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으며 며칠 동안 현실도피를 하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이 책이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여러 번 반복해 읽었지만 한 번도 지루하다거나 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번 처음 읽는 것 같았고, 번번이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읽을수록 질투하면서 선망하게 되는 작가였다. 나도 이런 작품을 쓰고 싶다!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한 질감의 로맨스가 들어가면서도 시대상황을 폭넓게 그려내는 작품을! 

그러다 어느 순간, ‘철학’이라는 방대한 인류의 보고에 빠져들면서부터, 몇 년간 소설을 읽지 않았다. 새로운 분과에 발을 들인 내게 소설이라는 분과가 갑자기 가볍고 허황되게 느껴졌고, 나는 부르짖기에 이르렀다. 그래! 내가 갈 길은 이쪽이지! 소설은 내가 위대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 잠깐 거쳐 가는 임시 정거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아, 이제야 내 운명을 알았다! 나는 위대한 철학자가 되어 인류에게 잊지 못할 유산을 남겨줄 운명이었구나. 그러니 이제부터 소설 따윈 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3년쯤 보냈을까. 어느 날 소설을 읽지 않고 철학과 사회학만을 접한 사람이 내뿜는 삭막한 기운을 느끼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알았다. 사람은 양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철학과 사회학같은 비문학 분야의 책들이 인간세상의 구조와 뼈대를 보게 해준다면, 시와 소설은 그런 구조와 뼈대에 입혀진 살과 피를 보게 해주는 장르였다. 철학과 사회학이 인간이라는 종을 관통하는 공통점과 인간 세상을 이루는 거대 구조를 보게 해준다면, 시와 소설은 실제 삶에서 개별적인 인간들이 자신에게 할당된 구조와 뼈대를 어떤 식으로 관통해 제 ‘다름’을 만들어내는지를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철학은 위대하고 소설은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철학이라는 신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의 감읍한 마음에서 나오는 과장된 제스처에 불과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의 여정에는 내가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없으리라는 예감과(철학서들 독해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무슨!) 그런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애민심이 동반되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렇게 나는 다시 소설책을 펼쳐들었다. 비문학의 세계를 탐험하고 돌아와 다시 만난 소설은 이전과는 다른 깊이와 형태를 갖고 나를 맞아주었다. 견고한 구조와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운명에 내맡겨진 인간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 살과 피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기쁨이고, 슬픔이고, 쾌감이고, 안타까움이었다. 우리네 인간들은 운명 앞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또한 얼마나 많은 경우에 탁월한 저항을 이룩해내는가! 인간의 사랑과 의지는 얼마나 원대하게 운명을 거스르는가! 비록 죽음 앞에 스러져 갈 운명이라도, 흠뻑 사랑했던 사람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사랑의 마음을 후세에 뿌림으로써, 사랑했던 대상을 물화해 남김으로써, 영원히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뭉클해진 시선으로 문학작품들을 끌어안았다. 문학이여, 그대를 외면했던 나를 용서하라. 그대가 철학과 사회학과 심리학을 아우르는 거대종합예술체임을 이 용렬한 미물이 몰라보았구나.

다시 소설의 바다에 뛰어들어 행복하게 헤엄치고 있을 때, 미국 대선철이 도래했다. 연일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하는 나이든 두 백인남성의 대결을 관전하며 문득 이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제일의 패권국 미국이 어떻게 해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맞게 되었는지를 남북 전쟁 이후의 정치 상황에서 출발해 짚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맞은 이번 차례의 독서는, 이전까지의 독서와 너무나 달랐다.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레트의 작위성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고, 너무 자기마음대로만 하는 스칼렛의 철없음과 무지함이 안타까워 가슴을 쳤다. 스칼렛 오하라. 이 멍청이. 너는 어째 가질 수 없는 허상만 그리 쫓아다니느냐. 인생 몇 번 산다고, 이 무지한 인간아! 그리고 내 마음을 채운 건 멜라니 해밀턴이라는 인물이었다. 읽을 때마다 ‘착한 척하는 천사표 여성’으로만 생각했던 여성이, 답답하고 둔한 고구마 백 개라고 여겼던 여성이, 커다란 존재감으로 엄습해왔다. 그 인물이 갖고 있는 강인함과 신념이, 가까운 이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근성이, 신뢰와 애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감싸고 종내는 변화시켜버리는 박력이,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소설에 나오는 다른 모든 인간들은 멜라니에게 기대 삶을 유지하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다가, 멜라니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 죽음이라는 등불에 비춰야만 선명해지는 생의 행로.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바보 같은 인간들의 운명. 그렇다. 이번 독서는 내게 ‘죽음’으로 다가왔다. 미국의 정치상황 같은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인간의 유한함,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내장한 생명체의 아이러니가 커다랗게 부각되어왔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멜라니 해밀턴이었구나. 그리고 이 책의 주제는 죽음이었구나. 처음엔 희대의 로맨스였던 작품이, 다음 순간엔 스케일이 큰 역사소설으로 변했다가, 이제는 죽음을 품고 태어나는 인간 종에 대한 통찰이 서린 철학적 저작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토지』 『서부전선 이상 없다』같은 작품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나란히 두어야 할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궁금해진다. 다음 번 독서에서 이 책이 어떻게 읽힐까. 나는 이 책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무엇을 보게 될까. 그리고 알게 된다. 왜 살아오는 내내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는지. 왜 이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올라 널리 읽히고 회자되는지.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책, 매번 새로운 메시지를 퍼올리게 되는 책. 그런 책을 우리 사피엔스 종들은 ‘고전’이라 부르겠지. 그리고 백 년 뒤에 이 땅에 사는 누군가도 나처럼 이 책을 읽으며 탄성을 내지를 것이다. 와우! 이런 책이었어? 놀랍군! 그때에 나는 어디 있을까. 육신을 떠난 내 영혼은 어디를 거닐고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귀결되는 건 이번 독서에서 내가 ‘죽음’이라는 필연과 강렬하게 조우했기 때문이리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
마거릿 미첼 저 | 안정효 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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