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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10월 우수상 -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살면서 가장 억울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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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4개월 차 신입사원의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한 손에는 유니폼이 담긴 종이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작은 토트백을 들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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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4개월 차 신입사원의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한 손에는 유니폼이 담긴 종이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작은 토트백을 들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며 하루 동안 잊지 않고 해야 할 일을 곱씹었다. 부장님이 부탁한 우편물은 오전 중에 처리하고 오후에는 비품실을 정리해야겠다고, 일정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는 지극히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안녕.”

교복 위에 두꺼운 코트를 걸친 그 아이가 내게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는 그랬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우리 집은 무너졌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대학에 가고 싶다는 욕심 정도는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욕심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는 그럭저럭 다닐 만했다. 주변엔 좋은 아이들이 많았고, 선생님들은 따뜻했다. 문제는 ‘나’였다. 일찌감치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지원하고 싶은 학과를 결정한 게 문제였다. 그만 포기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한다고 다독여보려 했지만,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어서 마음이 공허했다.

손에 쥔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린아이처럼 몇 달을 혼자 끙끙대다가 뒤늦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스스로 이해할만한 답을 찾았다기보다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고 낯선 학과 공부에 집중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도 세웠다. 토닥토닥, 나 자신을 다독이는 방법을 처음 배운 것도 그때였다.

고3 여름 방학을 앞두고 나는 취직을 했다. 등교 대신 출근을 했고, 수업을 듣는 대신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다. 새로운 일을 익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내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마음 한 자락 줄 여유가 없을 만큼 모든 게 버거웠지만,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보며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11월, 입사 4개월 차였던 내게 인사를 건넨 교복 입은 아이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날이 수능 날인지도 몰랐던 나는 그 아이의 눈빛이 뭘 묻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내 복장을 아래위로 훑는 시선이 불편해서 교복 입은 그 아이의 모습을 똑같이 훑으며 쳐다봤을 뿐 인사 이외에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출근해서 뒤늦게 수능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장실에 숨어 한참 동안 울었다. 나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나도 꿈이 있었는데,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나는 왜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이유 없이 타인의 미움을 받거나 구박을 받아도 그리 억울하지 않았는데, 그날 수능시험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해서 눈이 퉁퉁 부을 만큼 울었다.

월급을 모아서 학비를 마련하고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게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억울한 마음부터 드는 걸 보면 나는 뒤끝이 참 긴가 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좋은 점이 많다고 열아홉의 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열아홉의 나는 포기한 것이 억울하고, 일찍 맛본 사회생활이 힘겨웠다. 현재 내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서 상처 입은 열아홉의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대신 열심히 살았다고, 잘했다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내 안에 사는 열아홉의 나를 다독여본다.




*이는봄
 
말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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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는봄(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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