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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김용택의 서재 시인
“35가구가 전부인 마을에 살면서 책이 무슨 물건인지도 몰랐어요. 초등학교 때 교과서는 읽었지만, 책을 읽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죠. 책 코빼기도 구경할 수가 없는 동네였어요. 그러다가 중고등학교를 순창에서 다녔는데, 책보다는 영화를 봤어요. 순창극장에 걸린 영화는 다 봤지요. 나도 모르게 생겼던 문학적 욕망을 영화를 통해 해소한 셈이 된 것 같아요. 고3 때 <007> 영화가 처음 나왔어요. 원작이 이언 플레밍인 007.”

“교사로 처음 부임했을 적 일인데, 신발 벗고 도랑 다섯 개는 건너야 하는 그곳까지 월부 책장사가 왔지 뭡니까.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들고 왔는데 장정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방학 내 읽었지요. 이렇게 작은 책 속에 이렇게 많은 사람과 사건과 기쁨과 사랑과 분노와 슬픔이 담겨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책을 덮고 나자 세상이 달라 보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얻게 됐어요. 매일 보던 강과 물과 풀이 전부 새로 보이게 된 거예요.”




책을 읽고 세상과 사랑에 빠지다

“그 월부 책장사가 방학 전마다 헤르만 헤세 전집, 이어령 전집, 박목월 전집, 앙드레 전집을 들고 왔고 나는 사서 통독을 했어요.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특히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러고는 다른 학교에 부임했는데 여교사가 담임인 다른 반에 어문각에서 나온 5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이 있더란 말이죠. 이광수, 최남선을 그때 읽기 시작해서, 그 교사가 안 읽는 것 같기에 아예 내게 전집을 넘기라고 했어요. 3만 원 주고 샀는데, 그때 월급이 5만 원쯤 할 때였으니까…. 그러고는 그때부터 책 읽기에 허천난 거지요.”

“한국문학을 섭렵하기 시작했어요. 전주를 갔는데 헌책방이 있더군요. 책이 너무 싸서 잔뜩 사려고 방학이면 지게를 지고 갔어요. 전주에서 서점에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가서 내리면 집까지 30분을 걸어야 했거든요. 문학 계간지들을 많이 봤지요. 《현대문학》 《월간문학》부터 해서 70년대 《창작과 비평》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문학과 지성》(현재의 《문학과 사회》 《뿌리 깊은 나무》까지 잡지 탐독의 순례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계간 미술》을 읽으면서 미술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요.”

“다 사 젖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책방에서 하루 종일 시를 읽었어요. 종일 책을 읽고 있으면 서점 주인이 의자도 내다주고 했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고은의 시들, 황동규의 『산남에 내리는 눈』은 지금도 좋고, 내 몸에 박혀 있는 시들이에요. 그러고는 등단을 했는데 전주에서 사회과학 서점을 발견했어요. 이것도 책값을 다 치르지를 못하니까 1995년까지 외상으로 받아다 읽었어요.”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집디다. 몰랐던 걸 새로 알게 되는데 왜 생각이 많아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일기를 썼는데, 쓰다 보니까 어느새 시를 쓰고 있었어요. 정규적인 문학 수업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지만 그렇게 우선 무작정 쓰기 시작한 거예요. 보여줄 사람도 없이 한 7, 8년 시를 쓰고, 그러다가 등단을 했어요. 내가 혼자 써놓은 시를 보니 감동적인 거예요. 글은 자기가 써놓고 자기가 감동해야 합니다. 단 그 감동을 남들도 느끼도록 객관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훈련이 필요해요.”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는 그곳이 모두 서재

“영화는 존 웨인이 주연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처음 본 외화였는데, 스크린에 펼쳐지는 장면이 실제 같고 현실 같아서 흥분을 했지요. 〈벤허〉는 지금 봐도 놀랍고 감동적인 영화구요. 6.25전쟁에 나간 사나이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사나이들의 애잔함과 씁쓸함이 느껴지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라는 영화도 좋아합니다.”

“시골 우리 집에는 1980년대까지 모아놓은 갖가지 시집과 인문학 책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그렇기는 해도 내게 서재란 책을 품고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우리 동네예요. 어머니가 책이고, 징검다리가 책이고. 그 책을 나는 늘 읽고 있어요. 그런 뜻에서 이름을 관난헌이라고 붙였어요. 마루에 서서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퇴계 이황의 시에서 따왔지요.”

“힘들다는 게 무슨 뜻일까? 젊은 사람들이 힘이 들지 않은 시절이 있었을까? 무엇이 힘든 건지 질문을 제대로 해봐야 무엇을 해결할 수 있어요. 돈이 없는 것이 힘들다면 돈을 벌 방법을 찾고, 또 얼마나 벌어야 행복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해요. 또 생각을 하다 보면, 무작정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런 공부를 해야 해요. 세상과 인생과 행복에 관한 관점을 달리할 만한 공부 말입니다. 책뿐만 아니라 논두렁을 걸어가는 촌부, 흘러가는 강물, 살아가는 게 하루하루 공부의 재료이지요. 공부란 지식을 통해 나를 바꾸고 더 나아가서는 결국 세상을 바꾸게 하는 거예요. 또 한 권의 책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해도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결국 공부란 어딘가에는 꼭 써먹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지요.”

인터뷰 내내 시인의 얼굴은 장난스럽고 생기 넘치는 동시가 씌어지고 그려지는 도화지 같았다고나 할까. 그 얼굴에서 개울이 흘러가고 꽃이 피어나고 아이들이 뛰어놀았다. 그런 시인에게 책은 강물이고 꽃이고 도랑에 놓인 징검다리이고 어머니의 얼굴이다. 평생 교직에 몸담고 있을 때도, 정년을 채워 퇴임을 하고 나서도 흘러가는 강물처럼 나날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용택 시인이 이번에는 섬진강 이야기를 집대성한 여덟 권의 책을 묶어서 돌아왔고, 자신의 책과 서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떤 관심사를 놓고 책을 읽는가…. 사회적인 관심도 물론 많지요. 새로 들어서는 정부가 잘 되기를 바라고, 힘없고 빽 없고 죄 없는 사람들이 속상할 정치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제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는 늘 크지 않았다고 말한다. 선생을 오래했고, 선생이 삶이었다. 시인은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책을 읽고 풀과 강물과 산 아래 핀 꽃을 시인은 오늘도 공부한다.

글/문은실 사진/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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