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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조경란의 서재 소설가
“책을 처음 읽은 이래로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은 없어요. 처음은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세계명작동화집이었어요. 한 달 만에 세 자매가 돌아가며 전 권을 다 읽었지요. 우리가 사는 이곳 말고 다른 세상이 있구나 하고 흠뻑 빠지고 말았지요. 『작은 아씨들』 『소공녀』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몇 번을 읽었는지도 몰라요.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하이디가 하얀 빵을 사서 산을 넘어 다니는 장면이 나와요. 오늘날 제가 하루에 서너 시간씩 빵을 굽고 글을 쓰게 된 것이 어쩌면 다 그 장면 때문일지도 몰라요. 『소공녀』의 다락방을 보면서는 모험을 꿈꾸고 관계를 생각하게 되고요.”

“중학교 때 학교 갔다 와서 사과 두 개를 깎아 큰 접시에 담아요. 그러고서 한 입 베어 물며 책을 펼쳤을 때만큼 달콤하고 행복했던 순간은 없었을 거예요. 친구가 별로 없었고 소통의 방법을 배워 나갈 다른 통로나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나를 책은 어디든지 데려다주었거든요. 집과 가족 외에 내가 관계를 맺는 수단은 책이 거의 유일했으니까.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화여고를 다니며 헌책방인 공씨책방에 가서 살았어요.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선생님들이 그냥 내버려뒀어요. 딱히 말썽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책만 읽을 뿐이었으니까.(웃음)”

“최승자, 김혜순, 김종삼의 시, 박완서, 오정희, 김채원, 서정인의 소설을 학교 노천극장에 앉아 어두워서 더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까지 읽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재수를 했는데 다시 실패했어요. 그리고 5년을 방에 틀어박혀서, 아니, 공씨책방과 대학가 서점 등을 오가며 그밖에는 방에만 틀어박혀서 책만 읽으며 살았지요. 작가가 될 생각은 없다고 늘 얘기했지만, 어쨌든 날마다 읽었던 생활이었어요. 그러던 스물세 살 어느 날 자다가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오규원, 김혜순 선생님 아래서 수학하고 싶은 희망에 다시 수험 공부를 해서 서울예술대학교에 진학했지요.”




헌책방과 학교 노천극장이 전부였던 시절

“대학 때 문학 공부를 하며 김현, 김병익, 김치수 등 평론가들의 책을 섭렵했어요. 김현 전집에서 언급한 책은 모조리 찾아서 읽었고요. 역사적인 더위를 기록했던 94년 여름에 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불란서 안경원」을 썼는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남독일지도 모를 독서를 거친 끝에 어쩌면, 어느새 쓸 준비가 됐던 게 아닐까 싶어요. 헤밍웨이가 그런 말을 했죠. 나의 글은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서 온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읽은 것에서 나온다고요. 영감은 모든 책에서 받아요. 왜 영향을 받지 않겠어요. 단어 하나에서도 영향을 받는 걸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내 스타일이 생긴 후에 그 영향을 내 식으로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알게 모르게 들어오는 것 같지만 내 스타일이 없으면 나를 통해 문장과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지요.”

“요즘은 제 또래의 책을 찾아 읽는 편이에요. 그중에서도 독일문학을 참 좋아하는데, 독일의 여자작가인 유디트 헤르만은 문체가 투명한 물에 비치는 것 같다고 할까? 맑디맑은데 살짝 일렁이는 물 아래로 비쳐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이걸 다 어떻게 늘어놓을까? (웃음) 코맥 맥카시도 요즘 재미있게 읽고, 아모스 오즈는 빛나는 풍경을 젊어서는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원숙함으로 그려내죠. 트루먼 카포티의 「미리엄」은 제가 그 소재로 소설을 한번 꼭 써야겠다고 별표를 해둔 단편이에요. 어른을 두렵게 만드는 아이들의 힘이라고 할까? ‘단념’이라고 제목도 이미 정해두었는데(웃음).”

“요즘 생각하는 건 여전히 빵 굽기와 조카들. 책이 나를 변화시켰다면 조카들은 생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던 나를 변화시켰어요. 한마디로 생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거예요. 빵도 우리 밀을 써서 발효 빵으로 건강하게 구워야죠, 조카들 위해서라면(웃음). 어느 정도 지나면 어떤 사람이 밉다가도 저 사람도 한때 아이였고, 사랑 받아 마땅하고, 부모와 함께 늙어가는 사람이라고 바라보게 되었어요.”

“이제 책을 고르는 건 본능의 영역이 됐어요. 이틀에 한 번씩 책을 사고 하루에 두 번씩 검색하는데, 읽다 마는 실패의 확률이 줄어든 건 분명 이제까지 읽은 책이 있기 때문이 아닐가 싶고(웃음). 좋은 책은 문이 여러 개가 달려 있어요. 읽는 나이에 따라서도 공개되는 문의 수가 달라요.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인물이 보였다, 음악이 들렸다, 미장센이 보였다 그래요. 그래서 좋은 책을 되풀이해 읽는 게 좋은데, 그게 안 되고 자꾸 다른 책을 읽게 돼요(웃음).”


책에는 여러 개의 출입구가 있다

“서재 이름은 물의 방? 서재고 작업실이랄 것도 없이 복도에 책꽂이를 빼곡히 놓았을 뿐인데, 내 방에 작은 냉장고가 있어요. 거기엔 물과 맥주밖에 없고 또 냉장고 밖에는 커피 밖에 없어요. 그렇게 물 종류 세 가지가 있다면 없는 네 가지가 있어요. 휴대전화, 인터넷, 초인종, 텔레비전.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단절되어야 해요. 내가 고립된 세계에서 작품을 만들어내야 독자에게 휴식과 안식의 시간이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떨 때는 정말로 어려운 게 글을 쓰는 일 자체보다 글을 쓰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기도 해요.”

끼니를 챙겨 먹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일일 작가에게 이런 인터뷰를 요청한다는 것이 애초에 객쩍은 일이었을까. 하지만 다독가이자 남독가에게 족집게 과외 식 대답을 요구하다시피 하면 난감할 법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경란 작가는 처음에는 난감해하다가, 땅에서 감자가 후드득 뽑혀 나오듯이 책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언제나 새로 내는 작품이 가장 좋고, 자신이 쓴 가장 좋아하는 글을 펴낸다고 말하는 작가는 최근에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을 냈다. 부모와 함께 늙어가고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간다는 그녀의 말을 잘 확인해볼 수 있는 소설집이 될 듯하다.


글/문은실 사진/김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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