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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박혜란의 서재 학자
“유년기 때 저는 한 마디로 목장의 소녀였어요. 아버지가 당시 농림부 공무원이셨는데 3,4년에 한 번씩 전국의 목장으로 전근을 다니셨거든요. 경주목장에서 잉태되어 수원목장에서 태어나 일곱 살까지 살았고 그 다음 성환목장으로 옮겨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5학년 때 서울 변두리로 이사를 왔어요. 성환에서는 배달부 아저씨가 아침마다 마차를 타고 와서 우유를 한 양동이씩 갖다 주었던 기억이 나요. 우유에 밥을 말아서 푹 익은 깍두기와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죠(웃음).”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던 책이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다 주신 『밀림의 북소리』라는 만화책이었어요. 아마 『정글 북』을 번안해서 그렸던 것 같은데 그림과 이야기가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읽고 또 읽었죠. 나중엔 우리 반 아이들 모두 돌려 보다가 결국 책이 다 해져 버렸어요. 그 후로도 김종래와 박기당이 그린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고 빠져 들었어요. 만화사랑은 일생동안 이어져 요즘엔 웹툰도 거의 다 챙겨 보는 편이에요.”

“중학생 때는 같은 반 친구네 집이 학교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집에는 ‘서재’라는 것이 따로 있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에 두어 번 씩 그 친구네 들러서 세계문학전집을 빌려 집에서 다 못 읽으면 수업시간 중에 몰래 읽다가 선생님께 들켜 벌을 서기도 했어요.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뭐니 뭐니 해도 『제인 에어』에요. 특히 제인이 눈먼 로체스터를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 어찌나 뭉클했는지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한창 암기력이 좋을 때라 친구들 앞에서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외우기도 했죠. 하지만 청소년기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종류의 책을 너무 닥치는 대로 읽다보니 독서에 대한 뚜렷한 취향이 생기지 못한 게 아쉬워요.”

“고3때는 니체에 빠져서 번역이 난삽하기 짝이 없었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줄줄이 읊고 다니며 개똥철학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전공을 독문과로 선택하게 된 이유도 니체 마니아였던 덕분이에요. 정작 대학에 들어가서는 토마스 만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데, 한 교수가 교재로 썼던 단편 『토니오 크뢰거』가 그 촉매였어요. 예술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시민적 기질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선망과 심리적 갈등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던 시기였기거든요.”

“대학원에 들어가 시몬느 드 보봐르의 『제2의 성』과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읽었어요. 보봐르의 책은 한 마디로 여성학의 교과서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깊고 넓게 이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도우미 역할을 했어요. 베티 프리단은 저처럼 살림과 육아 때문에 전업주부로 살다가 다시 사회로 나간 여성이었에요. 무엇이 교육받은 미국 여성들을 ‘여성다움’에 안주시키는가에 대해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심리적 측면으로 분석한 내용으로, 그 책은 1960년대를 말하고 있었지만 80년대 한국 여성들의 상황에도 꼭 들어맞았죠. 제가 첫 책인 『삶의 여성학』을 펴낼 용기를 갖게 된 건 순전히 ‘너도 베티 프리단 같은 책을 써야지’라고 격려한 한 친구 덕분이에요. 물론 베티 프리단이 들으면 썩소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아무튼 여성학을 쉽게 풀어내겠다는 저의 계획은 그 후 『여자와 남자』로 이어졌고 지난 30년 동안 내가 해온 여러 가지 활동들은 모두 페미니즘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어요. 제가 추구하는 페미니즘은 모든 인간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며 서로를 환대하는 세상,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에요.”

최근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을 펴낸 여성학자 박혜란은 요즘 엄마들의 육아에 대한 안타까움을 풀어놓았다. 경제적, 시간적, 심리적으로 아이에 올인하면서도 늘 불안하기만 한 현재 며느리 세대에게 선배엄마로서 주고 싶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쓴 소리를 함께 버무렸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이 키우기와 나의 삶은 별개가 아니라는 것”.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곧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며,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면 먼저 엄마(부모)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녀는 “‘세상 물정 모르는 말씀’이라고 코웃음 치는 사람들까지 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할 생각은 없다. 그들도 나름 소신 있는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다가가고 싶은 독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너무 외로워서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부모들이다.”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그녀의 서재는 그냥 ‘엄마 방’이었다. 거실 한 구석에 달린 방이 서재였는데 너무 좁아서 문을 닫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라 항상 열어 놓아야 했다. 무척 시끄러웠지만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한 공간이기도 하다. 요즘은 아이들이 모두 출가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집필을 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너무 조용한 탓인지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금 서재의 이름을 짓는다면, ‘서쪽 숲’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저녁 무렵이면 해가 깊숙이 들어와 글 작업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가 하면,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안에도 그 때나마 낭만적인 기운이 떠도는 것 같아서다. 서쪽 숲에서는 해가 지면 나무가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는데, 자꾸만 처지는 그녀의 몸과 마음도 서재에서는 어쩌면 새처럼 비상할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박혜란의 최대 관심사는 ‘잘 죽는 것’(웰 다잉)이다.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다. ‘손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그녀는 우리 세대가 어떻게 힘을 모아야 하는지 궁리하는 중이다.


정리/엄지혜 사진/엄마는생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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