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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구병모의 서재 작가
“중학생 때는 잘사는 친구네 집 서가에 일렬로 주욱 꽂힌 아름다운 책들 가운데 뽑아서 자주 책을 빌려다 읽었고, 가끔 둘째 언니가 한 권에 천 원 내지는 천이백 원 하는 문고본 판형의 책들을 낱권으로 사오곤 했습니다. 그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어느 판본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겉장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앞뒤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꾸미고 지어내며 소설가가 꿈이라고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다녔던 아이란 당시 그 또래에 그리 흔치 않았던 모양이어서 그런지, 중2 때 담임선생님이 몇 번 불러다 『인간의 굴레』와 『유리알 유희』를 선물해주신 적이 있어요.”

구병모 작가에게는 책을 통해 영감을 받고 집필한 작품들이 있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을 읽고 얻은 영감으로 쓰게 된 단편소설 『파르마코스』. 2012년 <문학의 오늘> 가을호에 수록한 소설로 2014년 하반기쯤 단편집으로 묶을 계획이다. 물론 『파르마코스』는 희생양 모티프가 핵심이지만, 뼈대를 이루는 줄거리는 『개구리와 다이아몬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등의 민담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또한 단편집 『파란 아이』에 수록한 『화갑소녀전』은 그 외피를 둘러싼 것이 『성냥팔이 소녀』이지만 그 안에 등장한 인물들은 한병철 『피로사회』에서 재인용된 보드리야르의 ‘적의 4단계’론을 대입한 것이다.

그는 평소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다. 관심사는 한두 가지만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죽기 전에 다 못 읽을 것이 틀림없지만 지금 책상 옆에 쌓여서 제 손이 타기를 기다리는 책들은 주로 질병, 종교, 후각과 미각 등의 감각, 카발라에 관계된 것들이다.

“책 읽고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잘 모르겠어요. 재미있는 것과 행복과는 다른 문제인데,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만난다 치면 대부분은 암담하거나 분노하거나 몽롱하거나, 깊이 고민하거나. 하여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게 보통이겠죠. 고통으로 인해 엔도르핀이 분비되니까 그걸 행복이라고 느낀다면 세상 모든 책이 그 대상이 되겠네요. 그래서 그와 같은 두 단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순수한 의미의 행복을 주는 책이라면 역시 국어사전. 날마다 보물찾기하는 느낌이니까요.”


내 서재는 ‘종이 귀신의 집’

구병모 작가는 책을 고를 때, 소설은 작가를 보고 고르지만, 처음 보는 작가다 싶으면 저의 평소 취향과 일치하는지를 알기 위해 국적과 장르를 본 다음 앞부분을 읽어본다. 인문서에 한해서는 일단 제목에 호기심을 느껴서 목차를 일별하면, 그 책이 내가 관심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대강 드러난다. 그 다음 저자 이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출판사를 본다. 이 기준은 언제나 랜덤이고, 실패한 모험의 결과가 지금 집에 꽤 많이 쌓여 있기도 하다.

“서재나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그냥 생활공간 안 여기저기에 대량의 책이 무질서하게 쌓이거나 꽂혀 있을 뿐입니다. 이사를 갈 때마다 이삿짐센터의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내 서재가 언젠가 생기면 좋겠죠. 그럼 지귀옥이라고 붙일까. 종이 귀신의 집. 털면 먼지들이 귀신처럼 부유할 것 같은 오래된 서가의 이미지가 일종의 로망이죠. 그리 되면 지금보다 기침은 더 하겠네요.”

청소년문학과 성인 순수문학을 넘나들며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구병모 작가는 최근 장편소설 『파과』를 출간했다.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의 이야기. 노년에 접어들면서 느닷없이 ‘타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주인공은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읽어내며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에 맞닥뜨린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소설로 다 하는 편이어서, 가능하면 거기에 뭔가를 보태지 않으려고 하는데 매번 하게 됩니다. 『파과』는 특히 제목이 주는 생경함으로 인해 주위의 권고 내지는 우려에 따라, 독자를 배려하는 측면에서 창작의 모티프와 제목에 대한 이중의 해석 방향까지 권말 후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노출했는데요. 그것이 이해에 도움 되었다는 분도 계시고, 사고의 여지를 막아서 좋게 보이지 않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가능하면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분들의 동의를 구하고 싶었던 조급함의 소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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