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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이순원의 서재 소설가

어릴 때 대관령 아래 산골 마을에 살았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입니다. 학교에 가면 작은 도서실이 있고, 집에 오면 아버지가 읽는 18권으로 된 <현대한국문학전집>이 있었습니다. 신구문화사에서 발간한 책인데, 어린 시절 이 책들을 읽었는데 이게 학교에서 읽는 동화와는 또다른 재미를 줍니다. 덕분에 초등학교 5-6학년 때 덕분에 오영수 강신재 유주현 최인훈 선우휘에서부터 김승옥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그냥 재미삼아 읽었는데 나중에야 그게 한국현대소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늘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우리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 서로 자신의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고, 또 지나온 시절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책에 대해서나 독서에 대해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30분 동안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학식이 있고 부자인가 이런 것은 드러나지 않아도 이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책을 읽어온 사람인지는 금방 알게 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모여있는 교무실에서조차 일상생활 속에서는 저 사람이 중고등학교 때나 대학 때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 같은 것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몇 마디 이야기를 해보면 그 사람의 도서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세상 어떤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해도 생각의 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단순한 지식만 주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능력을 길러줍니다.

 

요즘 추리소설에 관심이 많아요. 추리소설에 처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신인작가 시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라는, 당시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문학적 경고로 추리기법의 사회 비판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계획하는 소설은 좀 더 얼개가 치밀한 추리소설인데, 이 작업에 들어가기 전 세계에 이름난 본격 추리소설들을 많이 찾아 읽고 있어요. 미국 소설도 있고 영국 소설도 있고 또 이웃나라 일본 소설도 가리지 않고 찾아 읽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나라엔 문학성(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하는 추리소설이 다른 나라만큼 발전해오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고 있고, 예전에 썼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가 그랬듯 이번에 내가 쓰는 소설이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기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소설이 장편소설 두 작품입니다. 지난해에는 대관령과 일본 삿포로를 무대로 하여 『삿포로의 여인』이라는, 우리 마음에 내리는 첫눈처럼 아련한 느낌의 연애소설을 썼습니다. 그 작품으로 2016년 동리문학상을 수상했고, 곧이어 『정본소설 사임당』이라는 역사소설을 냈습니다.

 

제가 사임당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우리 역사 속에 사임당만큼 잘 알려진 인물도 없고, 또 사임당처럼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실제 사임당의 본명은 우리나라 역사 문헌 어디에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자료에 사임당의 본명이 신인선(申仁善)으로 나와 있는 것이야말로 한 편의 역사 코미디와 같은 일이라는 것이죠.

 

학술적으로 한번 잘못된 인용이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다 보니 이후 어떤 백과사전에까지 사임당의 이름이 신인선(申仁善)으로 등재되어 일반인은 물론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한국사를 강의하고 여러 권의 역사 베스트셀러 저자까지도 거기에 나와 있는 문헌적 오류를 정답처럼 그냥 그대로 베껴 방송하고 강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런 문제가 어디 이름에서만이겠느냐, 그의 예술과 그의 삶 전부가 ‘율곡의 어머니’라는 것 때문에 실제보다 더 추앙되거나 아니면 당시 이데올로기 때문에 가려진 부분은 없는가, 그것을 제대로 살피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애초에 사임당은 자신의 시대에는 여성 예술가로 평가되었습니다. 특히나 산수도에서 조선 전기의 최고 화가인 안견 다음가는 화가로 평가 받았는데, 그러던 것이 왜란 호란의 전란을 거친 다음 100년 후 이 땅의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서인 정치가들에 의해 집 밖으로 나가야 산수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로서의 자리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율곡과 같은 대유학자를 낳은 오로지 현숙한 부인으로만 이미지 메이킹이 되었습니다.

 

후대에 나라의 사정이 위급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또 그 시대마다 모든 여성이 본받아야 할 군국의 어머니로, 해방 후 독재시절엔 세상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는 유순한 자식들을 길러내며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다하는 현모양처로, 그리고 입시지옥 속에서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한 교육의 어머니로 변해왔지요. 그러다 보니 화장품과 막걸리와 학원과 의류 패션에 이르기까지 불법도박장과 유흥업소 말고는 사임당의 이름이 안 붙은 곳이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사임당의 삶을 제대로 작품 속에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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