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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추혜인의 서재 의료인

추혜인은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가정의학과 의사다. 199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학년 겨울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진로를 변경해 이듬해 같은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꾸준히 여성 단체에서 활동하며 여성주의와 의료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다, 건강한 삶의 토대가 되는 의료협동조합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에서 수련을 받았으며, 여성 단체에서 만난 어라 님과 뜻을 합쳐 2012년,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조합)을 창립했다. 최근에는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을 통해, 여자, 페미니스트, 동네 의사로 일궈온 20년의 여정을 기록했다.


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어렸을 때 아빠가 책을 잘 안 사주셨어요. 공부해야지 왜 책을 읽냐시며. 언니와 저는 책을 읽고 싶은데 집에 책이 없으니, 초등학교 때 글짓기 대회 상품으로 주는 책을 노리곤 했어요. 그런데 그 책들은 반공동화라서 너무 재미가 없었고요(웃음). 그 와중에 그래도 좋아했던 상품은 <삼국유사>라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언니를 따라 책이 많은 친구집에 들락거렸는데, 처음에는 웃으며 반겨주시던 친구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인가 ‘또 책 보러 왔니?’하면서 냉랭해지기 시작하셨어요. 그 집엔 정말 책이 많았는데 친구는 사실 책을 별로 안 읽었거든요. 우리 자매가 그 친구랑 논다는 핑계로 사실은 책을 보러 드나든다는 걸 아시고 좀 얄밉게 보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눈칫밥 먹으며 책을 보다가 드디어 우리 집에 에이브, 에이스88 같은 전집들이 생겼는데, 그날 그 새 책들의 빳빳한 종이 질감과 잉크 냄새가 아직 기억날 정도예요. 그렇지만 그 전집을 빠짐없이 다 본 건 사실 우리 집에서 언니뿐이었지요.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고등학교 2~3학년 때 도서관 위원을 했어요. 도서관을 정리하고 도서 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근로장학생이었던 건데, 수업 시간에 합법적으로 도서관에 숨어 있을 수 있었어요. 도서를 정리해야 한다는 구실로요. 고등학교 3학년 초에 영어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때, 그 선생님의 수업을 피해 도망쳤던 곳도 도서관이었는데, 묵은 책들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 가득한 그 공간에 들어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다른 차원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책 읽는 시간도 저에게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책 안에 들어갔다 나와야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요즘 계속 고민인 문제는 돌보는 사람들이 갈아 넣어지지 않고도 존엄한 돌봄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이 더 필요할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하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선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을 수 있는 마을’을 만들자고 지금 한창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런 돌봄이 순환되는 마을은 아름다운 상상이지만 현실로 만들기엔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좋은 돌봄이 가능할 수 있도록 커뮤니티케어, 유니버설디자인과 관련한 책들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최근작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의사의 에세이는 사실 필연적으로 환자의 아픈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환자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그저 소재로서 활용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우리가 이 시간들을 함께 쌓아 왔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지 항상 어렵습니다. 이번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을 쓸 때도 가능하면 환자분들께 허락을 구하려고 하였어요.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분들께는 차마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 몰라서 한참 고민하다가 인쇄 며칠 전에야 겨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허락을 구하기는 했는데, 다들 마음 아프지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허락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이 책이 진짜로 저와 환자들, 주민들이 함께 쓴 책이라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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