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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조건부 승인의 알량함

‘무해한 타자’라는 환상

조건부 승인과 배제는 ‘나에게 완벽하게 무해한 타자’라는 환상을 전제로 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너를 인정해주지! 참 순진한 발상이다. 자매품으로 “부모님이 허락한 힙합”,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시어머니가 보증하는 외국인 며느리”가 있다.

이진송

6월 28일, 지난 일요일이다. 시청에서 제 16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미국에서 동성 간의 결혼이 법제화되면서 이번 축제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이를 둘러싼 논란-동성애 자체를 반대하는 혐오 세력은 잠시 젖혀두고(그분들은 어차피 북 치느라 바빠서 이런 글을 안 읽을 것이므로)-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된 기분이 든다. 퀴어문화 축제의 ‘선정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재작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어김없이 등판했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자신이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편견이 없다고 전제하는 이들이 주로 구사한다는 점에서 혐오세력과 구별된다. 퀴어문화축제의 선정성이 성소수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부추긴다는 주장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인다. 보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노출은 바바리맨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며, 성소수자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편견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이번 축제에서는 남성의 나체가 그려진 부채와 여성의 성기모양을 본 딴 마들렌(일명 ‘보지풀빵)이 대표적인 “어그로”였다. “민폐”, “없던 편견도 생길 지경”이라는 반발이 빗발쳤다. ‘이런’ 축제라면, ‘이런’ 성소수자라면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선언도 빈번하게 눈에 띈다. 이것은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준다는 산타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조건부 승인’과 ‘배제’이다. 조건부 승인과 배제는 우리 삶의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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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를 2년째 발간하고 있다. 비연애를 퇴치하거나 탈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의 자연스러운 한 상태로 존중하자는 것이 주요 메시지이다. 비연애의 결은 다양하다. 그 안에는 하고 싶어 미치겠는데도 ‘못’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정말로 그 일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아서 ‘안’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강조하고자 “나는 연애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발화자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발화자를 시험대 위에 올린다. 충분히 연애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해야만 비연애의 자발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연애 적령기의/장애가 없는/평균 신장과 평균 체중의 범위에 들어가는/적절한 화장술과 패션 감각을 보유한” 등의 조건이 제시된다. 흔히 말하는 ‘화려한 싱글’도 여기에 해당한다. 승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대번에 “그러니까 솔로”라는 비난이 돌아오며, 솔로와 비연애를 희화화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잡지를 처음 기획할 때 염려했던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면 ~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화된다”는 조건부 승인과 배제는, 결코 집단 전체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편견은 그대로 두고 타자로 하여금 자신의 기준에 맞추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일한 정체성의 집단 내부에서도 계급화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더욱 해롭다. 왜 있잖은가, ‘나빼썅’. 성공적으로 조건부 승인을 받은 이들은 같은 집단을 차별하거나 폄하할 자격을 얻는다.


덕후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덕후로 살아왔는데(꺅 덕밍아웃…은 뭘 이제와서 새삼스레ㅎ), 강산이 한 번 이상 변하는 시간동안 무수한 장르를 옮겨 다니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덕후들의 ‘차도녀 기믹’ 혹은 ‘남자친구’ 강박이었다. 아예 안 털면 안 털었지, 어느 정도 셀털(셀프 신상털이)을 한 덕후들은 일관되게 자신이 ‘겉으로 보기에는 덕후 티가 안 나고’, ‘남자친구가 있거나/있었음’을 강조한다. 덕후는 매력이 떨어지며, 이성에게 인기가 없다는 세상의 편견 때문이다. 여기에 대고 “오타쿠도 남자친구가 있다(예쁘다)”는 대응은, 마치 케이크 위의 딸기만 슬쩍 집어 올리는 것처럼, 연애하는(예쁜) 덕후만 조건부 승인의 테두리 안으로 집어넣고 전체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부당한 편견은 그대로 방치하는 효과를 낳는다. “나도 ##지만~”로 시작하는 대사 같은?

 
성소수자를 지지하지만 그들의 노출은 불편하다고 말할 때, 발화자가 상상하는 ‘성소수자’는 탈성애화된 존재이다. 이는 동성애 혐오 세력이 성소수자들을 곧장 ‘항문섹스’나 ‘에이즈’로 치환하는 것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같은 방식으로 혐오를 생산한다. 동성애 혐오가 성소수자를 오로지 ‘성’으로 번역한다면, 조건부 승인은 섹슈얼리티를 배제함으로써 성소수자의 정치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기만이다. ‘성’소수자들의 정체성은 생물학적 성별부터 성애까지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그것이 ‘왜’ 사회 규범이나 제도와 충돌하는지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의 몸(특히 트렌스 젠더나 크로스 드레서)이나, 동성애가 이성애와 구별되는 지점(동성과의 스킨십 등)을 전시하는 것은 퀴어문화축제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여기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정숙한 단체 복장을 맞추어 입는다고 해도 “안 좋은 인식을 부추길” 꼬투리를 찾아낸다는데 내 남자친구를 걸겠다. (아무 것도 안 걸겠다는 뜻이다) 부적절한 착장을 지적하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에게 그러한 ‘응시’와 ‘감별’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착각하지 말자. 축제의 참가자들은 간택을 기다리며 쇼케이스에 누워 있는 무지개떡이 아니다. 조건부 승인과 배제는 ‘나에게 완벽하게 무해한 타자’라는 환상을 전제로 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너를 인정해주지! 참 순진한 발상이다. 자매품으로 “부모님이 허락한 힙합”,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시어머니가 보증하는 외국인 며느리”가 있다. 

 

한편으로는 ‘공공장소’와 ‘시민 의식’이 방패막이로 등장한다. 공공장소에서 외설적인 물건을 판매하고 노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축제와 축제가 벌어지는 광장의 장소 특수성을 간과한 주장이다. 퀴어문화축제는 카니발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카니발은 종교적 행사나 폐쇄적이고 공식적인 축제와 구별되는 것으로, 누구나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민중의 축제이다. 카니발에서는 전통적 권위와 가치체계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용인되고, 종교적 규율, 신분상의 제약, 사회의 규범을 위반하고 전복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카니발은 이러한 위반과 파기를 적극적으로 축하하고 유희한다. 카니발 참여자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장벽이나 계급과 무관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접촉이 이루어진다. 바흐친이 카니발의 속성이라고 규정한 것들은 ‘거꾸로 된 세상의 모습’, ‘친숙하고 자유로운 접촉에 의해 가능한 규범으로부터의 일탈’,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 ‘일체의 기존의 권위와 가치에 대한 속화(俗話)’이다. 이 중 ‘거꾸로 된 세상의 모습’은 기존의 체계가 역전된 상태를 뜻한다. 카니발이 벌어지는 공간에서는 ‘당연한 것’의 기준이 뒤바뀐다. 일상적 세계에서 천시되고 터부시되었던 성소수자의 섹슈얼리티나 신체의 일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퀴어문화축제에 직접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공간에서는 아무도 성소수자의 노출이나 보지풀빵을 음란하다거나 외설스럽다거나 흉측하다고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터부시하고 성적 코드를 기입하는 것은 일상 세계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카니발을 통해 일상 세계가 성소수자의 육체나 여성의 신체를 소비해온 방식―오로지 성적대상화만이 전부인―이 폭로된다. “하나의 목소리에 익숙하고, 그런 목소리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에게는 낯선 공간이다. 그런 사람에게 광장은 보이는 도시에서 사라져야 할 공간이다. 사회의 불안정을 조성하는 공간이고, 안정적인 삶을 해치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1)


카니발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를 전복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짓을 하냐”는 의문에서 ‘그런 짓’에 방점을 찍으면 조건부 승인과 배제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오로지 동일화에 성공한 타자만을 자신의 테두리 안에 들이는 선택적 관용이며, 최종적으로는 누구도 승인할 수 없다. 승인과 시혜의 태도는,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배제하고 편견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빨간 펜으로 밑줄을 긋고 별을 그려야 하는 부분은 ‘왜’이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고 불편한 것을 그들은 ‘왜’ 하는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관념에 타격을 가하며, 나는 그것에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이 복잡하고 울퉁불퉁한 세계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러나 엄연히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1) 박승규, 「광장, 카니발과 미학적 정치공간」, 『공간과 사회』 34호, 2010,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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