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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데뷔작으로 한국을 찾아오다 - 『피아노 교사』 재니스 리

소설 속 여주인공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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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붙은 추천사는 중매쟁이 말처럼 한 반 정도 덜어내고 듣는 게 좋다. 괜한 기대감에 독서를 잡치기 싫다면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아주 드물지만) 추천사의 호들갑이 작품의 무게에 걸맞을 때가 있다. 재니스 리의 첫 장편소설『피아노 교사』가 그런 작품이다.

소설에 붙은 추천사는 중매쟁이 말처럼 한 반 정도 덜어내고 듣는 게 좋다. 괜한 기대감에 독서를 잡치기 싫다면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아주 드물지만) 추천사의 호들갑이 작품의 무게에 걸맞을 때가 있다. 재니스 리의 첫 장편소설 『피아노 교사』가 그런 작품이다. 섬세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문장은 육감적이고, 세 남녀의 파멸적인 사랑이 욕망과 배신 사이에서 얽히고설키는 구성은 손으로 바느질한 샤넬 슈트를 떠올리게 한다.

1940년대 향락이 넘치는 창녀 같은 도시 홍콩에서 영국인 윌 트루스 데일은 중국인 아버지와 포르투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트루디 리앙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전쟁 중에 연인 트루디는 세상을 떠나고 10년 후 비밀스러운 침묵에 휩싸인 윌 앞에 영국 여인 클레어가 나타난다. 얼핏, 다시 전쟁 전 활기를 되찾은 듯한 홍콩이지만 그 내면은 일그러져 있다. 최악의 상황과 생존을 위한 배신,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야만 했던 그 시절의 역한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숨죽인 가운데 무엇인가 폭발할 듯한 긴장감이 전면에 흐르고, 결국 이야기는 예정된 파국으로 흘러간다.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서울에 온 재니스 리를 가을빛이 깊어가는 정독도서관에서 만났다. 미국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 세인트폴과 하버드 대학 영문과를 거쳐 「엘르」의 피처 에디터로 일하다가, 소설이 쓰고 싶어 헌터 대학 대학원에서 들어가 이창래 교수 밑에 소설 창작을 배웠다. 5년 동안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써 낸 첫 소설 『피아노 교사』로 세계적인 호응을 이끌어낸 그는, 자기 소설이 번역된 여러 나라 중에서 한국을 가장 먼저 찾았다.

생각보다 한국말을 잘하셔서 놀랐습니다. 한국에는 자주 오시는지요.

어렸을 때에는 매년 한 달 동안 한국에 왔어요. 부모님이 한국말과 한국 문화를 배우길 강력하게 원하셨거든요.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자주 한국을 방문합니다. 그래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저에겐 익숙한 편이에요.


첫 장편소설 『피아노 교사』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이것을 쓸 당시에는 이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쓰고 싶다고 생각해 온 주제를 소설로 옮기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요. 작품의 성공은 물론 기쁩니다.

「엘르」에서 피처에디터로 일하다가 소설 공부를 시작했는데요. 「엘르」라면 많은 젊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장이 아닌가요? 에디터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뉴욕에 사는 20대 여성에게 「엘르」의 에디터는 최고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에디터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친구도 사귀었어요. 그 일을 무척 좋아했어요. 하지만 제 꿈은 소설가였지 에디터가 아니었어요. 어릴 적부터 소설가가 되길 꿈꾸었지요. 에디터로 일하다가 어느 날, ‘내가 원하는 건 소설가인데 왜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실패하더라도 에디터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몇 년 동안 피처에디터로 일했나요?

94년에서 99년까지, 5년 정도 일했습니다.

피처에디터로 일한 것이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피처에디터로 많은 작가들을 만났고, 글이 쓰이는 프로세스를 알게 되고, 단 두 페이지의 기사를 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작가들도 많이 만났을 텐데, 특별히 글쓰기에 영감을 준 사람은 없나요?

작가들보다는 그들의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작가는 혼자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 고독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카리스마가 있다기보다는 조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말이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기보다는 역시 그들이 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습작기를 거쳐서 데뷔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나요?

아주 어릴 때부터 저는 소설가가 되길 바라고 글을 써왔습니다. 그러니까 데뷔까지 30년이 걸린 셈이네요. (웃음) 이십 대 때에 제 또래 친구들 중에서 책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많이 부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아이까지 갖게 되니까 ‘앞으로 영영 글을 쓰지 못할 지도 모른다.’라고 절망하기도 했어요.

한인 2세들의 소설들의 대표적인 주제는 ‘정체성’ 문제입니다. 그만큼 정체성 문제를 고민하고 그것을 소설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당신은 홍콩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한국인 2세인데요, 정체성 문제로 고통받진 않았나요?

발표하진 않았지만 정체성의 문제나 한국인에 대한 자전적인 글을 여러 편 썼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대해 아직 제대로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저는 어디에 있든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저는 사고방식이나 유머 감각이나 일을 처리하는 방식 등은 미국인에 가깝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어디를 가든 집처럼 편하게 느껴집니다. 어디에도 완벽하게 속하진 못했지만 동시에 다양한 문화에 노출될 수 있었습니다. 또, 홍콩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으면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라는 가치관의 교육을 받은 것도 좋았습니다.

대학에서의 전공을 영문학으로 정하셨는데, 그때부터 작가나 저널리스트로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아주 어릴 때부터 제 꿈은 작가였고 독서를 너무 좋아해서 영문학을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영문학과가 작가로 가는 직접적인 길은 아닙니다. 예술학 석사라는 코스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로스쿨처럼 자격증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보증을 해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어떤 시절의 작품에 마음이 끌리셨나요?

고전이 모든 것이 기본이므로, 고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는 항상 지금 현재의 문학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지금까지도 현대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는 걸 좋아하고, 소설을 쓸 때도 최근 5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글을 많이 썼고요.

그런데 『피아노 교사』의 배경은 1940년대에서 50년대입니다. (웃음)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시공인데요. 소설로 쓸 만큼 이 시대에 특별히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 홍콩의 역사를 읽다가 흥미가 생겼는데요, 제가 흥미가 있다면 다른 사람도 재미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가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소설 속에 나오는 크라운 컬렉션은 실재하는 건가요? 소설을 읽고 궁금해져서 웹 서핑을 해봤는데 찾을 수가 없더군요.

제가 창작한 것입니다. (웃음) 크라운 컬렉션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문화재 수탈이 있음 직한 상황이었어요. 그 비슷한 일이 실제로 있긴 했고요. 글을 쓸 때 그 시대에 대해 많은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게 되는데, 그런 사실들을 토대로 새로운 사실을 만드는 작업을 『피아노 교사』에서 시도해 봤습니다.

『피아노 교사』의 인물들은 모두 독특한 내면세계를 가진 이들입니다. 윌, 트루디, 클레어라는 세 인물 중에서 어떤 인물을 형상화하기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윌과 클레어가 힘들었습니다. 윌은 오랫동안 잡히지 않는 캐릭터였어요. 윌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동기로 그 일을 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어요. 클레어는 소설 앞부분에서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입니다. 인종차별적? 생각도 강하고요. 하지만 클레어는 소설 속에서 점점 변화를 겪는 인물입니다. 발전하는 캐릭터지요. 클레어라는 인물의 변화를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보이는 것이 힘들었어요.

『피아노 교사』에서 클레어는 유일하게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미래로 나아가며 희망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아닐까 합니다. 윌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요.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피아노 교사』입니다. 클레어의 이야기로 작품이 시작되었다가 클레어의 이야기로 작품이 끝을 맺지요. 클레어는 유일하게 변화하는 발전하는 인물이지요. 클레어가 처음 홍콩에 왔을 때는 평범한 영국 여성이었지만, 그곳에서 클레어는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저는 클레어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이 넷을 키우면서 소설을 쓰는 건 힘들지 않으시나요?

이 책을 쓰면서 네 명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차기작은 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피아노 교사』는 굉장히 천천히 쓰인 소설입니다. 글쓰기 외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았거든요. 가사에 육아에 남편 뒷바라지에. 전업주부들이 하는 일을 다 하면서 글을 써야 했으니까요. 물론,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제일 큰아이가 여섯 살인데, 아이 넷과 함께 사는 집이 어떤지 아마 다들 상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난장판이지요. (웃음)

첫 작품이 크게 성공하면 두 번째 작품에서 부담을 느끼는 작가가 많은데요.

일단 글을 쓰려면 잡념을 버리고 집중해야 합니다. 글을 쓸 때 그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까? 베스트셀러가 될까?’ 하고 생각을 한다면 글에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아마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겠지만 글을 쓸 때는 글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럼, 첫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좋은 점은 뭔가요? 대부분의 작가는 ‘인세’라고 대답하시는데요. (웃음)

가장 좋은 건 책을 읽을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작가에게 독서는 업무의 일부니까요. (웃음) 이전에는 애들도 돌볼 시간에 책을 읽는 게 왠지 죄스러웠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읽습니다.

동양에서는 삼다(三多)라고 해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글 쓰는 사람에게 이런 비슷한 조언이 있는지 궁금한데요.

저는 작가가 되려는 사람에게 ‘책을 많이 읽어라.’라는 조언을 합니다. 많이 읽어야 글에 대한 식견이 생기고 제대로 된 문학을 볼 줄 아는 눈을 기를 수 있으니까요. 또, 글쓰기를 직업 내지 일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작가가 해야 될 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만의 싸움을 하면서 자기 한계를 뛰어넘으며 글을 쓰는 겁니다. 그게 작가의 일입니다. 저 역시 아이들을 재워두고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는 동안은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한 사람의 고독한 창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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