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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떠난 듯 숨어들다

<멋진 하루>,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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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하루는 깊다. 도시는 여기저기 숨을 곳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래서 문득, 도시를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 도시의 주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 2008

도시의 하루는 깊다. 도시는 여기저기 숨을 곳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래서 문득, 도시를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 도시의 주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곳이 도시임을 잊는다. 결국 우리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기 위해 도시의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드는 셈이다.

도시의 길은 그래서,
도시에서 미끄러지고 싶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도시는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벤야민이 신성한 순례의 장소라고 말한 이 도시의 백화점과 아케이드는 상품의 성소이자 소비자들의 맹목적 숭배를 받는 신전이 되었기에, 도시인들은 그 물신物神에게 경의를 표하는 유령들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그러다가 백화점에서 신중히 고른 옷을 입고 광고가 가르쳐준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여자는, 헬스클럽에서 몸을 다지고 여자에게 줄 몇 가지 유머를 구사할 줄 알면서 약간은 자신의 연봉을 높여 부를 줄 아는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꼼꼼하게 메이크업을 한 여자는 실은 직장을 잃고 통장 잔고도 바닥난 상태일 수 있으며, 좋은 몸을 가진 남자도 방금 경마장에서 돈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열거는 끝도 없을 것이다. 어떤 남자든 여자를 좇으며, 여자는 남자를 떠나고, 남자는 여자를 버린다. 누구나 다 그러하다. 누구나 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 인용하고, 표절하고, 짜깁기하듯 그러하다.

<멋진 하루>의 ‘병운(하정우)’이 경제적으로 무능해져서 스스로 아내를 떠나보낸 것처럼, ‘희수(전도연)’도 사귀던 남자가 경제력을 잃자 그의 헤어지자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뜬금없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헤어지는 연인의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희수는 병운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문득문득 과거의 자신과 마주치고, 미래의 자신일 수 있는 이미지와 조우하며,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낯선 여자들을 어느 순간 이해하고, 오히려 충분히 연민했을 자신의 과거를 수긍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하루는, 과거와 미래, ‘나’와‘남’의 시간과 관계를 증폭시키고, 희수는 그 시간의 깊이와 도시의 미로에 더 깊이 빠져든다.


첫발은 이미 꾸깃꾸깃 희미해진 차용증서를
병운에게 내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미 직장과, 조건 좋은 남자를 잃었고(정확하게는,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의 조건을 잃어 그 남자조차 버렸고), 남은 것은 돌려받을 생각 없었던 ‘350만 원’과 끝내 버릴 수 없는 나르시시즘뿐이다. 그 나르시시즘은 “돈 갚아”라는 직설적이고 과한 어조로 드러난다. 그래서 희수와 병운은 둘 다 병운이 돈을 떼먹었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고는, 병운에게 호의가 있는 여자들에게 그가 맡겨둔 적 없는 돈을 회수하러 간다.

그러니까 병운과 어떤 관계가 있는 여성들?나이 많은 사업가 한 여사, 호스티스 미연, 마트에서 일하는 병운의 여자 동창, 병운의 대학 서클 후배, 병운의 사촌형의 아내?을 만나면서 희수는 그녀들의 어느 한 순간, 어떤 한면과 맞닿는다. 그리고 병운의 말대로 희수와 비슷한 점이 있는 중학생 여자 아이와 학교 미술실 바닥의 껌을 나란히 앉아 떼면서 희수는 잠깐 십수 년 전의 자신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 하루 동안 희수는 시공간 속에 접혀 있었던 몇 편의 과거와 몇 컷의 미래를 만나는 것이다. 과거의 시간들은 병운과 희수가 잘 가던 식당 ‘제주집’이 사라진 것처럼 이미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그 흔적은 깊게 느껴진다.

그러나 병운의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희수가 그녀들을 수긍?는 자신을 만났을 때, 아니 그녀들의 삶이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보충하는 듯 자신의 어느 빈 곳에 꼭 들어맞는 듯한 증상을 느꼈을 때, 그 당혹감은 어떠했을까. 병운을 찾아간 것에 대한 희수의 자조 혹은 자기연민은 압축되어 해체된 과거사에 번지면서 마침내 울음으로 터진다. 닫힌 감정의 우연한 비상구는 울음뿐인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희수는 그렇게 예상치 않은 장소와 시간에 우연찮게 드러낸다. 어쩌면 그 울음 속에는“누구나 상처가 있는 거야. 나도, 너도, 그 아이도, 저기 있던 수위아저씨도”라는 병운의 말이 끼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신발끈을 고쳐 메어주던 병운의 손길이 다시 스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350만 원은 다 채워지지 못했다. 그것은 희수가 자초한 것이었고, 그 잉여 때문에 둘의 만남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병운이 차에 꽂아두고 간 또 하나의 차용증, 희수의 차 속에서는 반으로 접혀져 몸을 숨기고 있던 그 차용증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작은 빨래처럼 냉장고에 널려 온몸을 드러내고 반짝인다. 차용증의 형식은 동일하다. 역시 같은 문구에, 달라진 것은‘몇 백 원’단위까지 씌어 있는 돈의 액수.

언젠가 희수가 병운을 또 찾아가 “돈 갚아” 혹은 “돈 갚지 않아도 돼”라고 말할 때, 우리도 또한, 알 수 없는 불가해한 하루에 방치될지도 모른다. 화장을 하고, 유행에 떨어지지 않는 옷을 입고, 도시를 순례하게 될 수도 있다. 도시를 떠돌다가 도시의 깊이를 가늠하며 잠시 도시를 떠나듯 도시 속에 숨게 될지도…….

***

저는 희수와 병운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과거의 시공간을 공유한 사람들이지만, 그 기억조차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다른 기억이기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른 기억들을 다시 한 자리에 풀어 놓으면서 그것을 재조립하는 새로운 연애놀이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해 저물면 놀이가 파하듯이 연애유희도 지리멸렬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당신이 희수의 처지라면 오히려 병운을 찾지 않길 바랍니다. 그 마지막, 100원 단위까지 촘촘히 적힌 차용증이 바로 사랑과 기억과 연민과 그리움이 응축된 결절점이니까요. 그 차용증이 어떤 식으로든 폐지가 되지 않으려면, 희수, 혹은 당신은 병운에게 가고 싶은 마음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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