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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그는 나의 첫 영웅이었다

나의 영웅, 그리고 반짝거리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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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반짝거리는 누군가를 존경하고 그 때문에 가슴 졸이고 울고 웃던 일은 까마득해졌다. 이제는 없는 ‘나의 그’를, 이 재미없는 초여름 나는 간절히 그리워한다.

어른이 된 후 나를 만난 사람들이라면, 내가 한국프로야구의 (어쩌면) 최연소 광팬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오비베어스의 모든 스코어와 경기 내용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소녀였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6/16 잠실, 베어스 : 삼성라이온즈. 투수 박철순, 포수 김경문, 1번 신경식, 2번 구천서, 3번 윤동균, 4번 김우열…….


오비베어스의 팬이 된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우리 반에서 멋진 축에 들던 남자아이들 서넛이 약속이나 한 듯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MBC청룡을 싫어하게 된 것 역시 (내 눈에) 멋지지 않으면서 멋진 척하는 남자아이들이 청룡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아 이 지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판단 근거라니. 각 프로야구 구단에서는 어린이 단원을 모집했다. 회원이 되려면, 오천 원인가 하는 돈이 필요했다. 유니폼까지 갖춰 입으려면 아마도 그 이상의 액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진짜로 멋지거나 아니면 멋진 척 하거나, 어쨌거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 좀 멋져 보이려면 무엇보다 오천 원이 먼저 필요하다는 슬픈 사실을 알아챌 감각이 당시의 내게 있을 리 없었다. 


나와 남동생이 동시에 리틀 베어스 단원이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를 곤란하게 한 것이 회원가입비였는지 아니면 나의 성별이었는지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결국 베어스의 어린이 회원이 된 것은 내가 아니라 함께 조르던 두 살 아래의 남동생이었다. 집안의 첫아이로 나름대로 대접을 받고 자라왔다고 믿었던 나에게 이것은 인생 최초로 겪은 명백한 ‘남녀차별’의 기억이다. 어쨌거나 얼마 후 남동생의 이름으로 사인볼과 비닐잠바, 제법 두터운 팬북 같은 것들이 도착했다. 책 속에는 선수들 하나하나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있었다. 활자중독 어린이이던 내가 그 속에 빠져든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를 알게 되었다. 박철순. 그는 나의 첫 영웅이었다.

 

박철순

82년도 베어스 팬북사진 [출처: 2006 두산베어스]

 

요 며칠, 다른 일 때문에 야구를 주제로 한 소설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볼 기회가 있었다. 박민규 작가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는 인천 소년들이 오비 팬들을 곰팅이라 부르며 질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꼴등을 응원하는 아이들의 눈에는 일등을 응원하는 아이들이 주류를 좇는 속물로 비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겠지. 한때 최강인 줄 굳건히 믿었던 ‘우리 팀’의 승패유전(勝敗流轉)을 오래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하는 기분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주제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아도 된다’라는 것이라면, 박철순의 팬으로서 알게 된 냉혹한 세상의 진실은 ‘꼭대기에 서더라도 반드시 내려온다’일 것이다. 


2007년 6월10일 잠실야구장. 노란 넥타이 위에 흰 유니폼을 걸쳐 입은 중년 남자가 마운드에 우뚝 서 있었다. 등판에 ‘21’이라는 숫자가 선연하다. 한때 그는 무릎을 한껏 높이 치켜세우는 투구자세를 뽐냈다. 그 자세는 허리에 치명적이었지만, 그의 손을 떠난 공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고 정확하게 포수의 글러브에 꽂히곤 했다. 이제 쉰이 넘은 남자가 망설이듯 숨을 고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얼굴이 바로 이런 찰나의 옆모습이었다는 것이 새삼 기억났다.


그 자리에 선 채 그는 22연승을 했고, 팀의 우승을 두 번 직접 겪었으며, 타자가 친 공을 정통으로 맞고 고꾸라졌다. 기립한 관중 앞에서 은퇴식을 하던 날,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다운 일이었다. 그 남자가 평생 영욕의 장소였던 마운드에 다시 서서 마지막 공을 던졌다. 공은 터무니없이 높은 곡선으로 공중을 부웅 날아갔다. 오래 전 그때, 그와 배터리를 이루었던 포수 김경문이 가까스로 그것을 받아냈다. 박철순과 김경문, 두 중년 남자는 조금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포옹했다. 나는 어느새 훌렁 벗겨진 내 영웅의 이마와 완연히 깊어진 눈가의 주름을 보았다. 


무슨 오기였을까. 좋아하는 야구팀과 야구선수를 말해야 할 때 수십 년 동안 어김없이 그 남자의 소속팀과 그 남자의 이름을 대곤 했다. 세월이 한 해 한 해 흐르며 그 오기는 일종의 버릴 수 없는 신념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 같은 것이 되었다. 가까스로 재활에 성공한 그 남자가 재기하여 다시 마운드에 선 모습을 보았을 때 가슴이 뜨뜻하게 젖어왔던 건, 그가 다시 한 번 최고가 되리라 믿어서가 아니었다. 누구의 생도 영원히 정점에 머무를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점에서 내려왔더라도, 인간은 어떻게든 죽을 힘 다해 사는 일밖엔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 신랄하고 정직한 가치를 그가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웅이라는 단어에 맥없이 코웃음부터 치는 인간이 된 것일까. 저 멀리 반짝거리는 누군가를 존경하고 그 때문에 가슴 졸이고 울고 웃던 일은 까마득해졌다. 이제는 없는 ‘나의 그’를, 이 재미없는 초여름 나는 간절히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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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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