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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과 살아지는 것

박맹호 『책 박맹호 자서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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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부분에 눈길이 갔다. 고인은 책 말미에 이름으로 색인을 남겼다. 이름의 대부분이 내가 아는 작가들이었다. 나는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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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를 보러 친구들과 남산 한옥마을에 갔다. 소원을 적은 종이와 부적을 새끼줄에 매단 후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하며 덜덜 떨었다. 기다리는 동안 등 뒤 마련된 무대에서는 사물패가 신명 나게 놀아 제켰으나 접시 돌리기도 사자춤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중2병이 도진 관계로 모든 우울한 상념만이 머릿속에 가득해 왜 이리 시작을 안 하나 짜증만 났다.

 

한 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달집 태우기가 시작됐다. 영하의 날씨에 발을 동동 구른 보람이 있었다. 달집은 남산을 집어삼킬 요량으로 활활 타올랐다. 바람을 탄 불티가 어찌나 사방팔방 튀던지 말 그대로 불티나게 도망쳐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 좁은 남산 한옥마을서 “넌 어디? 난 여기”, 전화를 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가까스로 친구들과 상봉에 성공했으나 시선은 달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풍경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5년 전이라는 사실을 문뜩 떠올린 탓이었다. 대체 뭔 일이 그리 많아 그간 단 한 번도 대보름을 즐기지 못했나 이것저것 따져보며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자니 당연하다는 듯 최근 쌓아두고 읽은 책더미 중 몇 권이 머릿속을 스치고 달아났다. 민음사 설립자 박맹호 타계 후 재독한 『책 박맹호 자서전』이라던가, 너무 오래 기다린, 그러나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공터에서』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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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자마자 바로 산 『책 박맹호 자서전』

 

『책 박맹호 자서전』은 출간되자마자 바로 샀었다. 민음사 하면 이 나라 출판의 역사 그 자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안 살 수 없었다. 책의 내용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간 궁금했던 민음사의 종로사옥 시절 이야기나 비룡소의 발로, 고인이 생전 등단했다는 단편소설의 전문을 기웃거리자면 어쩌면 내 과거의 일부분이 책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부분에 눈길이 갔다. 고인은 책 말미에 이름으로 색인을 남겼다. 이름의 대부분이 내가 아는 작가들이었다. 나는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누군가 내 이름을 자신의 자서전 말미 색인으로 담는 상상. 당연히 소중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괜히 히죽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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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아책방에서 발견한  김훈의 신작 『공터에서』. 반가운 마음에 한 장 찍었다.

 

『공터에서』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의 현재와 과거가 쓰여 있었다. 작가 김훈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칼의 노래』 『화장』도 아닌 ‘광화문 그 사나이’다. 『칼의 노래』의 원래 제목이 ‘광화문 그 사나이’였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북스피어 블로그에서 읽고 한참 웃었다. 내가 그토록 감동받았던 소설에 그런 유머 포인트가 있었을 줄이야, 『칼의 노래』를 재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예약판매가 뜨자마자 앞뒤양옆 재지 않고 바로 구매했다. 예약한 사람들 중에서도 선착순 한정된 인원만 친필 사인 양장본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덕후의 마음이 동하였다.

 

기다림 끝에 받은 책은 표지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대관절 저 말은 무슨 연유로 허리가 끊겼나 안타까운 마음에 보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지레 짐작하고는 이 긴가민가한 기분이 옳은가 그른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밤을 새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으니, 막장에 치달은 끝에 발견한 것은 서른아홉 인생 대부분을 살았음에도 드문드문 알았던 우리 동네 언덕 저 너머 어딘가,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를 죽음이란 이름의 삶이었다. 죽어서 한 권의 책이 되어버린 고인의 자서전을 함께 읽은 탓인가, 아니면 중2병이 심한 탓인가, 이번엔 나도 모르게 가까운 미래 누군가 내 똥오줌 닦아주는 인생을 상상하고는 살아서 뭐 하나,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말았다.

 

달집 태우기 행사를 끝내고 적당히 끼니를 때운 후 근처 찻집에 들어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울랜드 폐장 이야기가 나왔다. “30년 계약으로 시작한 서울랜드가 없어진다. 그 전에 한 번쯤 가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 가야지 하면서도 허탈했다. 또 삶의 일부분이 사라진다. 이러다 언젠가 나라는 인간은 깨져버려 죽음이란 사금파리 조각들로 낱낱이 흩어져버리겠지. 운 좋게 책이 된 누군가의 색인에 실린다면 더부살이로 남을 수도 있겠으나 내가 없는 미래에 내가 있는 게 과연 지금 이 순간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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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이 깊어져 우주의 탄생까지 파고들 무렵, 깨달았다. 내 가방 속 책 한 권을. 지금 이 순간이 이 책을 새삼 펼 가장 적절한 때라고 우주가 계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그 책을 꺼내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우리는 잠시 화가가 들려주는 점점이 찍어낸 추억의 한 귀퉁이에 골몰했다. 책은 지금 이 순간이 훗날 누군가의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없는 낙관을 품을 수 있도록 내 등을 떠밀다가도, 불안한 미래를 스스로 낙인 찍으려 들면 등짝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라고 “떼끼 이 놈!” 어린 시절 동네 단골 점방 할머니처럼 혼냈다. 스크루지 영감도 아니건만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한번에 몰아 만나고는 화들짝 정신이 들어 중2병에서 한 발짝 멀어질 수 있었으니,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이 책의 제목은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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