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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손에 쥐고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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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집들을 나는 시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시인이 된 이후로도 항상 읽고 또 읽어왔다. 그리고 13년 만에 그의 새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이 도착했다.

황인찬 시칼럼 사진.jpg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좋아하게 된 시는 혼자 노는 아이가 등장하는 시였다. 대학에 들어가 시를 처음 읽으며, 이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난감해 하던 무렵에 처음으로 공감과 이해를 얻었던 것이 바로 그 고독한 아이들이 등장하는 시였다. 아마 나의 유년의 기억들에 비추어 이해하기 쉬운 시들이었기 때문이리라.

 

90년대에 발간된 박상순 시인의 첫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는 바로 그런 혼자 노는 아이들의 세계를 완성시킨 시집이다. 처음 그 시집을 읽고 느꼈던 경이와 희열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언제나 느껴온 정서들을 표현해내는 그 탁월함이라니! 숫자와 사물이 연관 없이 연결된 시집의 제목이 암시하듯, 그 시집에는 의미를 상실한 기호들을 고독한 아이가 혼자 쥐고 노는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서 그려지는 그 천진하고 투명한 슬픔과 고독들을 나는 지금까지 깊게 사랑한다.

 

박상순 시인이 그리는 그 고립과 슬픔의 세계는 2시집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을 거쳐, 3시집 『Love adagio』에 이르러 아이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놀이에 도달한다. 그 깨진 인식들의 세계는 이전의 시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먹먹한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시라는 양식이 지금 도달할 수 있는 한 극점과도 같은 것이었고, 내가 그의 두 시집을 가슴 깊게 사랑했다면, 세 번째 시집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을 담은 채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집들을 나는 시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시인이 된 이후로도 항상 읽고 또 읽어왔다. 그리고 13년 만에 그의 새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이 도착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옆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신발장 앞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날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거울 앞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옷장에 숨깁니다.
어젯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침대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오늘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의자 밑에 숨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딱딱하게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알알이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슬픈 감자 200그램」

 

여기 알알이 손에 쥐어지는 슬픔이 있다. 왜 감자이고, 왜 200그램이며, 왜 그것은 슬프기까지 할까, 그런 까닭을 밝히는 것은 이 시를 읽는 데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손에 쥐어지는 것이고, 매우 흔하고 투박한 것이며,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는 데 있다. 이 시는 그 딱딱한 슬픔을 이리저리 옮겨본다. 그러나 감자 200그램을 어디로 옮긴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신발장도, 거울도, 옷장도, 침대도 의자도 모두 감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런 의미가 발생하지 못한다. 덩그러니 감자가 남을 뿐.

 

그의 시가 만들어내는, 이 의미를 발생하지 못하는 운동들은 의미를 남기지 않기에 비로소 아름답다. 현대시라는 양식이 추구해 온, 의미를 탈각하는 일종의 순수함의 지평을 그의 시는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무의미한 운동의 반복을 통해, 시는 의미를 버리며 관념을 버린다. 슬픈 감자 200그램이라는 말이 슬픈 것이 아니다. 슬픔은 무엇인가가 다른 모든 것과 무관한 채로 남아있다는 데서 온다. 그의 시가 꾸준히 만들어내는 슬픔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한다.

 

겨울, 왕십리는 보았음.
가을날의 그녀가 목도리를 두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
언덕 아래 누워 있던
목 없는 겨울 아줌마의 어떤, 누구라고 들었음.
그녀에게 들었음.
그해 겨울,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목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눈보라 골짜기에
가을밤을 하얗게 밀어넣을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중략)

 

울긋불긋 단풍 들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쓸쓸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무너질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물결치는 왕십리, 그래봤자 왕십리. 리얼 왕십리
- 「왕십리 올뎃」

 

모든 것과 무관해진 채로 빙글빙글 자리를 맴도는 말들이 펼쳐지는 시다. 여기에는 무엇 하나 명확하게 지시되는 것이 없고, 그저 둥둥 떠다니는 말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의미의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왕십리라는 구체적인 지명마저도 이것을 지명으로 볼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을 어떤 언저리를 겨우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 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 시집을 집어 들고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박상순 시인의 시는 굳이 문장이 지시하는 것의 너머를 읽어야 하는 시가 아니다. ‘왕십리 올뎃’은 결국 ‘왕십리’라는 기호, 즉 표면이 마음껏 미끄러져가는 시이고, 그것이 왕십리의 전부가 되는 시인 것이다. 그러니 굳이 어렵게 시를 해석하려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쓰인 것을 쓰인 대로 읽으며, 이 시의 언어들이 천진하고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것을 감상하면 족할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의미 없는 운동들과 반복들을 따라 읽다 어느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시가 덩그러니 남겨둔, 그 어느 것도 아닌 ‘왕십리’를, 그것을 보며 묘한 슬픔을 느끼게 될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그 슬픔과도 같고, 감자와도 같은, 그 딱딱한 것을 손에 쥐고, 홀로 있는 것, 그것이 당신이 이 시집을 읽으며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으며 낯섦을 느끼고, 이런 것이 무슨 시냐고 물어볼 독자도 분명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낯선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 그것이 시라고.


 

 

슬픈 감자 200그램박상순 저 | 난다
박상순 시인의 신작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을 펴낸다. 1991년 『작가세계』로 데뷔한 뒤 한국 시단에서는 만나볼 수 없던 독특한 개성과 그만의 리듬으로 독보적인 자리매김을 한 시인 박상순. 그의 네번째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은 햇수로 13년 만에 선을 보이는 것으로 그 오랜 시간의 침묵이 52편의 시에 아주 녹녹하게, 그러나 녹록치 않은 맛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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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인찬(시인)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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