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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다른 이름

독서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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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서점은 책처방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다른 서점에 비해 서가 규모가 훨씬 작다. 그러다 보니 서가에서 나의 독서 취향이 여실히 드러났다. 민낯을 드러내 보이는 느낌이었다. (201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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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살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멋쩍게 웃으며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이 학습만화 두 권을 말할 것이다. 제목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명작은 아니어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고마운 책들.

 

 

한 사람을 위한 책을 처방하는 예약제 서점. 전에 없던 특이한 운영 방식 덕분에 서점을 열자마자 몇몇 매체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사적인서점이 소개된 기사 밑에는 언제나 이런 댓글이 달렸다.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면 사람들에게 책 골라 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어떻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다 읽을까?"

 

그 점에서 나는 항상 자신이 없었다. 책을 늘 곁에 두기는 했지만 다독가라고 자부할 만큼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었고, 책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읽었을 법한 내용이 심오한 책들을 읽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고전문학, 시,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네가 뭔데 책을 골라 줘?” 왠지 사람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애서가들이 쓴 독서 에세이를 읽으면 하나같이 어린 시절에 세계문학을 통해 책 세계로 빠지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내 경우엔 달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은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학습만화 전집을 사 주셨다. 만화책이다 보니 술술 읽혔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내내 책을 끼고 살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내 독후감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처음으로 받은 상이었다. 상장을 코팅해 벽에 붙이고 동네방네 큰딸 자랑에 신이 난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어깨가 으쓱했다. “가족 중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글짓기 공부를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 지혜는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쓸까?” 엄마가 혼잣말처럼 하는 말을 듣고 곰곰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학습만화 시리즈의 1권이 『국어의 세계』, 2권이 『글짓기 교실』이라는 것이었다. 수십 권의 책 중에서도 유독 그 두 권에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책 앞부분의 대사를 거의 다 외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고 부모님께 칭찬을 받는구나.’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경험이 나를 책의 세계로 이끌었다.

 

책과 가까워진 계기가 학습만화였기 때문이었을까. 중고등학교 내내 도서관에 붙어살았지만 이상하게 나는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을 접한 경험이 없었다. 항상 그 당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일본 문화에 관심 많았던 중학교 시절에는 일본 소설에 푹 빠져 있었고,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좋아하는 인물이 쓴 에세이나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었다. 그런 탓에 편집자가 된 후로는 늘 ‘깊이에의 강요’에 시달렸다. 고전을 읽지 않았다는 건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격 미달을 뜻하는 것 같았다. 서점을 열 때도 다른 무엇보다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사적인서점은 책처방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다른 서점에 비해 서가 규모가 훨씬 작다. 그러다 보니 서가에서 나의 독서 취향이 여실히 드러났다. 민낯을 드러내 보이는 느낌이었다. 서점에 온 손님들이 서가를 둘러보고 ‘뭐야, 고작 이런 책을 읽으면서 책을 골라 준다고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할까봐 무서웠다. 서점 운영 초기에는 서가 사이사이에 어렵고 두꺼운 책을 슬그머니 끼워 진열하기도 했다. 나보다 학식 높은 손님, 독서량이 방대한 손님이 오면 주눅이 들었다. 깊이에 대한 고민들로 점점 작아져 가던 어느 날, 같은 작업실을 쓰는 아녜스 언니가 가볍게 던진 말이 내 마음에 쿵 하고 와닿았다. “독서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야.”

 

깊이 있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 유능하거나 훌륭한 사람인 건 아니었다. 그동안 읽었다는 책 제목만 봐도 입이 쩍 벌어지는 어떤 손님은 나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읽는 책이 얼마나 깊이 있는 책들인지, 요즘 사람들이 읽는 책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쉴 새 없이 흉을 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수록 자신의 세계가 더 넓고 유연해져야 할 텐데,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손님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다고 유능하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모두 자기만큼의 사람이 될 뿐이다.”
『읽는 삶 만드는 삶』 13쪽

 

책처방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과 실망스러웠던 책을 물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다른 두 질문에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린 책은 『데미안』『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였다. 『데미안』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읽는 명작이지만, 아무리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힘들어 실망스러운 책이었다고 대답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는 제목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일 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고 삶을 바꾼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자기계발서 같은 내용이라 싫어한다고 얘기하는 손님이 많았는데,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 세 권에 이 책을 쓴 손님이 있어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손님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동생이 이 책을 읽고 많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자신도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물어보면 이 책을 제일 먼저 꼽는다고 대답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책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최악의 책으로 꼽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면서 나는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책, 나쁜 책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에게 맞는 책, 맞지 않는 책만 존재할 뿐이었다.

 

책처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나는 깊이에 대한 강박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깊이에 대한 결핍을 억지로 채우려고 애쓰지 않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부족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타인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소통하는 능력이 있다. 나는 사적인서점의 강점이 탁월한 큐레이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적인서점의 영업 비밀은 공감과 소통. ‘이 사람이 진심으로 고른 책이니까 어떤 책이 와도 괜찮을 거야, 읽어보고 싶어’ 하는 열린 마음을 갖고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컴플레인도 없었다고 믿는다. 나보다 책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많겠지만 나처럼 처음 만난 누구와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진심으로 들어 주고, 필요한 책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믿음. 이건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부심. 단점을 뒤집으니 나만의 장점이 되었다. 결핍은 매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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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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