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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할 만한, 일

앞으로 평생 돈을 벌지 않고 살 수 있어도 계속 디자인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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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내는 정교한 물건을 좋아하는데 약간 쓸데없는 물건일 경우 더욱 애착이 생기는 것 같다. 그 마음이 작업에도 스미길 바랄 뿐이다. (2018. 04. 02)

4월호-이기준.jpg

 

 

“사기꾼.”


노바가 짓궂게 굴려는 듯 말을 걸었다.

 

“아침부터 왜 이러시나.”


“오늘도 6시에 출근하지 않았어?”


“그게 어때서?”


“3:3:3이라며.”

 

3:3:3.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해 왔다. 하루를 세 덩어리로 나누어 일, 잠, 쉼에 각 한 덩어리씩 고르게 분배해 삶의 균형을 잡겠다는 뜻이니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발상이다.

 

“누가 보면 ‘워라밸’의 화신인 줄 알겠어.”

 

요새 수칙이 무너졌다. 예전이라고 빈틈없이 지킨 것도 아니지만.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자고 아침 6시 전후에 출근해 오후 6-7시쯤 퇴근하니 열두 시간 이상을 작업실에서 보내는 셈이다.

 

“일은 개인의 인격 형성이나 정신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매우 섬세한 것입니다. ‘사는 보람’, ‘개성의 창조’ 혹은 ‘나다움의 표현’이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인생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강상중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에서 마주친 구절이다. 지난 글에서 작업중인 원고 외에 읽을 시간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렇다, 그래도 틈틈이 읽고 있다. 심지어 완독한 책이 몇 권 있는데 재미도 있었다. 재미있으니까 다 읽었겠지만. 아무튼 위 구절에 한참 머물렀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을 구절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 생각에 변화가 있었나? 점검하기 위해 예전의 나로 거슬러 올라갔다.

 

20대에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대학에 진학한 것도 큰 배움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다는 목적이 있어서였다. 대학에 다니면서는 어떤 회사에 취직할까 고민했지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직장에 다니면서 비로소 ‘일’이라는 개념을 인지하게 되었다.

 

1년 남짓 다닌 디자인 회사는 주말 출근이 기본이었고 어쩌다(한 달에 한 번 정도) 일요일 하루 쉬면 행운으로 여길 정도였다. 일단 출근하면 나흘 뒤에 퇴근한 역사가 숱하다. 일에 질렸다. 20년치 일을 몰아서 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내가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을 읽었다면 “사는 보람? 개성의 창조? 그걸 꼭 일에서 찾아야 하나?” 대꾸했을 테다. 잠자는 시간조차 내 뜻대로 정하지 못한다면 일 따위 안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갈등이 심했다. 대학 다니는 내내 열심히 준비했고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는데 실상은 예상과 완전 달랐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 즈음 삼촌의 부음이 들렸다. 과로사였다. 여느 때처럼 야근 후 귀가했는데 다음날 아침 못 일어나셨단다. 일의 무서운 단면이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무서운 놈이었다. 갓 서른을 넘긴 나는 당시의 생각을 정리해 볼 요량으로 매우 단순한 심리 테스트를 고안했다.

 

“앞으로 평생 돈을 벌지 않고 살 수 있어도 계속 디자인 할래?”

 

쉽게 답하지 못 했다. 그때 일하던 방식으로 일하기 싫었지 디자인이라는 작업이 싫은 건 아니었다. ‘일’과 ‘디자인’을 분리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줄곧 ‘일’은 안 할수록 좋다고 여기면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직장생활이 길어질수록 별 의미 없이 직책도 올라갔다. 직급이 낮은 디자이너를 ‘관리’하는 일이 추가되었다. 관리자 역할은 내게 도무지 맞지 않았다.

 

“언제까지 인디자인 붙잡고 있을래? 애들만 잘 키워놓으면 야근 안 해도 되는데, 왜 그걸 못 하냐.”

 

직장 선배가 늘 달고 다니던 말이다. 일하기 싫은 마음은 다들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일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보통 하위 직급인) 다른 사람한테 옮겨갈 뿐이라면 무슨 소용이지? 회사 일이란 입맛에 맞춰 고를 수 없으니 더 하기 싫기 마련인데 동료와 합심해 나아가야 하니 스트레스가 쌓였다. 속마음은 보자기로 덮어 두고 그거 참 괜찮은 아이디어라며 기뻐해주는 척하는 연기력만 늘 뿐이었다. 일도 생활도 괴로워 몇 년의 부침 끝에 직장생활을 끝냈다. 일을 그만둘 수 없다면 직장이라도 그만두어야 나를 잃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계속 다녔으면 자신, 타인, 사회를 대하는 시선이 뒤틀려 기분 나쁜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내 인격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생기는 문제와 일을 어떻게 잘 이어갈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난 무엇을 할까? 맛있는 요리와 술로 그날의 노고를 스스로 치하하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논다. 얼마 전엔 옆 동네에 새로이 문 연 바르셀로나에 갔다가 김하나 작가와 엄지혜 기자를 우연히 만났다. 반가웠다. (합석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셰리까지 한 잔 곁들였다. 이렇게 보내는 저녁 좋다. 최근엔 도쿄 소풍을 앞두고 『Tokyo Shop』 을 훑어보며 인터넷으로 도쿄의 옷 가게를 탐색한다. 여행 예정이 없을 때도 거의 매일 구경하지만. 살 생각은 없어도 갖가지 발상의 옷을 보면 흐믓하다. 가끔 렌즈를 열여섯 개 장착한 카메라 라이트 L16을 구경한다. 이미 촬영한 사진의 심도까지 나중에 조절할 수 있다는 신기한 물건이다. 또는 융한스의 태엽 감는 막스 빌 손목 시계를 검색해 감탄하며 몇 분씩 시간을 보내는데 사분의 일 초씩 움직이는 초침을 동영상으로 보며 인간으로 태어난 덕분에 별 호사를 다 누린다는 생각을 잠깐 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정교한 물건을 좋아하는데 약간 쓸데없는 물건일 경우 더욱 애착이 생기는 것 같다. 그 마음이 작업에도 스미길 바랄 뿐이다.

 

난 대체로 느리다. 어디서 포트폴리오를 보내달라고 하면 파일을 첨부해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데도 그걸 하는 데 이삼 일이 걸리곤 한다. 오자 다섯 개 고치는 작업을 다음 날 오후에야 마치는 지경이니 굼뜬 수행력을 견디지 못하거나 여러 번 만나도 왠지 모르게 어색한 클라이언트는 하나둘 떠나고 서로 ‘자연스럽게’ 대면할 수 있는 파트너들이 곁에 남았다. 그뿐 아니라 대학 때부터 동경해 온 글쓰기 비중이 점점 늘어나니 일하는 즐거움이 더 커졌다. 일하면서 겪은 여러 사정으로 일을 멀리하고 싶었지만 괴로운 원인이 점점 사라지자 일을 공정하게 바라보게 된 듯하다.

 

“만약 내가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그저 공간이나 메우자고 몸이나 배경을 그려 넣는다면 그것은 분명 억지이고 그렇게 되면 그 그림을 완전히 내버리는 게 될 겁니다.”

 

『작업실의 자코메티』에서 건진 자코메티의 말이다. 그저 공간이나 메우듯이 일한다면 인생을 완전히 내버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강상중 저/노수경 역 | 사계절
‘나’를 지키며 일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일이란 무엇인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지, 일을 통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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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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