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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충분한 나로부터 태어나는 것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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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없는 곳을 골몰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타자는 눈앞의 나를 볼 뿐이다. (2018. 04. 04)

출처 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친척 집에 다녀와라’는 이 시집의 첫 문장이다. 마음이 바빠진다. 슈퍼마켓에서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오라는 심부름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흰 팔절지를 펼쳐놓고 나무와 나무 사이로 어린 새순처럼 돋아난 사람을 그리고 있었겠다. 어쩌면 사칙연산 문제가 빼곡한 학습지 위에다 의미 없는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처럼 말을 하는 동물들이 사람보다 용감한 모험을 떠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무얼 하고 있었건 심부름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나는 늘 몸이 모자랐다. 내가 둘이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하나는 심부름 보내고, 하나는 하던 일을 계속 할 텐데. 어린아이의 엉뚱한 발상만은 아니다. 다 큰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내가 모자라기는 마찬가지다. 숲을 걷고 싶을 때 숲을 걷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먼 나라의 친구와 조각케이크의 모서리를 번갈아 무너뜨리고 싶을 때에도, 먼 나라의 친구에게 나는 먼 나라다. 구름 속인지 안개 속인지 믿을 수 없어하며 산꼭대기에 서있고 싶을 때에도, 나는 충실하게 바닥에 붙어 지낸다. 마음이 그러고 싶을 때 몸이 그럴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싶은 만큼 자는 것만을 해내는 생활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행운이라 여기지 않는가.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갈래의 마음이 하나의 몸 안에 엉켜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모자라다. 둘이라면 만족스러운가. 둘이 가능하다면 셋이라야 좋고, 넷이라면 더 좋다. 기왕 충분해지려면 늘릴 수 있는 만큼 늘어나고 싶다. 무한히 번질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 인간은 자신의 유일함을 감당하느라 유일한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나 자신의 유일함 때문에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매순간의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유연함을 빼앗는다. 경직된 인간의 삶은 일률적일 수밖에 없다. 이때 인간의 영혼은 몸 안에 갇힌 수인이다.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모자의 효과」 부분
      
그러나 유일한 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삶을 꿈꿀 수 있다. 눈앞의 현실이 몸을 붙잡을 때에도 마음은 비현실로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친척집에 다녀오라는 어른의 요청에 집을 나선 여자아이의 마음이 모자 속의 세계로 도망치는 것과 같다. 여자아이가 모자를 쓰고 걸어갈 때 모자 속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자아이 뿐이다. 타자는 모자를 쓴 여자아이만을 볼 뿐이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없는 곳을 골몰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타자는 눈앞의 나를 볼 뿐이다. 나는 모자 속의 세계, 타자의 개입이 없는 다차원의 세계에서, 뿔뿔이 흩어진 복수의 ‘나’들과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나와 모자만이 안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 대신………… 이 모든 감각의
단순한 소외, 즉 소유라는 감각이 나타났다.
- 칼 마르크스, 「사유재산과 공산주의」 중에서
 
발목은 허공에게
어떤 밤들은 쿵쾅거리고 어떤 밤들은 이어달리기를 할 것이다 달려가는 우주에게 누군가는 자주 어지럽겠지만 한때 나의 소유물이었던 발목에게 가장 어울리는 처분이라 사료됨
 
동그란 무릎은 계단에게 옥상에게 옥상의 물탱크에게
차올라 있는 느낌으로 오랫동안 고독
 
귀는 빗방울에게 둥글게 만지는 날씨에게
뽑아서 던진 눈동자는 까마귀에게 캄캄한 밤하늘로 날아가 우주가 짓고 있는 마지막 표정인 날씨에게
 
구릉, 키가 큰 구름, 눈썹, 무덤, 연필, 식탁보, 그리고
 
가장 멀리 있던 코는 종려나무에게
이제 와 고백하자면 나는 자주 규슈의 길가에 서 있었다 17번가 모퉁이 카페 시계는 주로 오후 세시에 멈춰 있다
 
발바닥은 길바닥에게 던져주고
내가 살아서 유일하게 한 질투는 떠나는 자들을 향해 있었지 그런 기분으로 허공에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입술은 태양에게
이후로 토마토는 익어간다 입맞춤 속에서

손톱은 피아노에게 이 순간에 어울리는 스마일은 필요하고 창문을 타 넘어가는 나의 육체, 안녕
-「어느 육체파 부인의 유언장」 전문
     
어떤 시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충실히 묘사하고 있지도 않고, 명징한 서사성을 드러내지 않음에도 설명이 필요 없다. 시인의 감각과 독자의 감각이 온전히 포개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어느 육체파 부인의 유언장」은 그런 시였다. 몸이라는 불충분한 물성 안에 갇혀있는 우리는, ‘나’가 부족하다. 시의 서두에 덧붙인 마르크스 글귀처럼, 내 것을 가지게 되면 내가 아닌 것을 잃는다. 유일한 육체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다른 모든 감각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러나 나의 육체를 분절하여 씨앗을 뿌리듯 곳곳에 뿌려둘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은 영원한 삶의 감각이 아닐까. 이러한 공상의 바탕이 보다 많은 나를 추수하기 위한 욕망이기보다는, 나를 나누어주는 사랑의 태도이기에 감동적이다. 시집의 제목은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봐』 이다. 시인은 자신의 부족한 상태를 채우기 위해, 허공을, 밤을, 우주를 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계단과 옥상의 물탱크, 빗방울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때 자신의 소유였던 육체를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일인칭 ‘나’가 태어나게 되었다, 사랑을 바탕으로 말이다. 아름답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임승유 저 | 문학과지성사
그 웅얼거림을 받아 적기 시작했을 때 시적인 것들이 만들어졌다”는 그의 다짐처럼 이번 시집은 명확한 소리가 없는 사건들에 시적 목소리를 부여하는 시들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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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계영(시인)

1985년 인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임승유> 저10,800원(1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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