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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떠올리는) 산책

그렇게 있다 보면 생각나는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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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운동장에 앉아 농구하는 학생을 보다가 한 남자애가 생각났다. 그 아이를 떠올리다 보니 잊고 있던 마음들을 새어보게 되었다. (2018.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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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는 혼자서 농구하는 애를 보곤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공을 튀기고 골대에 넣기를 반복하는 그 아이가 자꾸 보고 싶었다. 말 붙이기 어려워서 보고, 보고, 보고, 또 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애였다. 어쩌다 말을 섞었던 날이 있다. 농구 코트로 들어가 용기 내서 말을 걸었고, 걔는 나를 무심하게 봤다. 민망해서 재빨리 도망쳤다.

 

애매한 시간이 흘렀고 나는 축구하는 애랑 사귀게 되었다. 남자친구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애였다. 귀엽고 수더분하고 무엇보다 다정했다. 좋은 사람이란 말은 이런 애한테 쓰는 거구나, 싶었다. 걔가 축구하는 걸 본 적은 없다. 교실에 있다가 가끔 창밖을 내다보긴 했지만, 농구하는 애를 볼 때처럼 보진 않았다. 두근거리지 않았지만 편안했고, 손을 잡고 걸으면 온 세상이 내 편인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늘 있던 자리에 멀뚱히 있었을 뿐이다. 그 애는 그런 내게 뭐든 아낌없이 주기만 했다. 왜 이런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 농구하는 애가 혼자 지나가면 신경이 쓰였지만, 그즈음에는 더는 농구도 축구도 구경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축구하는 남자에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사랑이 느껴지는 날이었고 느낀 대로 말했다. 남자친구는 이전에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흐른 뒤, 농구하던 애가 뒤늦은 고백을 했다. 내가 믿지 않는 눈치이자 걔는 농구를 구경하던 내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다. 앉아 있던 방향이나 머리카락의 길이, 손으로 턱을 괴는 모양 같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 말에 의하면 나는 매번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앉아 농구를 구경했다고 한다. 바로 옆에 있어 신경이 쓰이는데, 내 쪽은 쳐다볼 수 없어서 공과 골대만 봤다고. 내가 농구 코트로 들어가 말을 걸었던 날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걔가 내 말에 답하지 않았다고 기억하는데, 그는 고민하다 답을 하려고 하니 내가 이미 코트 밖으로 뛰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알았어?"라고 물으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었겠냐고, 아마 농구장에 있던 사람은 다 알았을 거라고 했다. "넌 뭘 숨길 줄 모르는 애였던 걸로 기억해. 얼굴에, 목소리에, 걸음에, 뒷모습에 네 감정이 다 보였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종잡을 수 없는데,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그런 감정은 훤히 보이더라고.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 없지만, 나는 너를 잘 아는 사람 같았어." 그런 걸 덤덤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왜 이 친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말해보지 그랬어."라고 말한 뒤 헤어졌고 그 뒤로 다시 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서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농구하던 남자애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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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어 만난 애인은 축구하던 남자애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과 사랑, 을 말했다. 통화를 끝내고 집에 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제까지 받기만 하는 사람일까. 영원히 줄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그날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잤다. 외로웠다. 애인에게 전화를 걸면 바로 왔겠지만 더 외로워질까 봐 그러지 않았다.

 

그것도 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남자친구나 애인이 없어진 지 꽤 되었다. 오늘은 산책을 하다가 홍대 운동장에 앉아 농구하는 대학생을 봤다. 그걸 보다가 오래전에 좋아했던 애가 생각난 거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 또 농구하는 애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때는 축구하던 남자친구나 애인이 내게 준 것과 비슷한 마음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을 깊이 사랑해왔다. 그리고 요즘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농구하던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의 매무새를 다잡는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 (53쪽)  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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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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