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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초년생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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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가 두 주인공끼리 싸우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5분 뒤로 감기 버튼을 눌렀다. 그렇다. 나는 조금의 갈등도 견딜 수 없는 영락없는 현대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2018. 11. 23)

내 입으로든 남의 입으로든 취업 소식을 알렸을 때 '축하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빠르다'였다. 휴학 없이 칼 졸업 칼 취업한 사화초년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과장을 조금 보태면) 경악과 경이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나는 휴학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니까. 책임져야 할 상황은 빠져나갈 구멍 없이 오밀조밀했다. 아빠는 곧 무직이 될 테고 엄마는 경력단절자 주부였다. 보다 자유롭게 위해 비교적 빨리 갑갑한 경제 인구로의 삶으로 편입되었다. 세상엔 그런 역설적인 일들이 많으니까.

 

이제 취업한 지 만 1년 6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무엇이 달라졌느냐 물으면 끝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문장은 하나다.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없어졌다.' 나를 대견스러우면서도 안타까이 바라보던 눈길을 비롯해서 말이지.

 

 

솔직말_사진1 (1).jpg

            언스플래쉬

 

 

이를 테면 이런 일. 며칠 전 드라마를 보다가 두 주인공끼리 싸우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5분 뒤로 감기 버튼을 눌렀다. 그렇다. 나는 조금의 갈등도 견딜 수 없는 영락없는 현대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개연성 없이 신파와 배우에만 기대고 있다며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동시에 설거지 중이었다. 두 주인공이 귀엽게 연애할 때 ‘아웅’거리며 몸을 배배 꼰 일도 빼놓을 수 없지. 자극 없이는 움직이지도 평안히 있지도 못했다.

 

요즘처럼 여행이 쉬워진 때에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면 각종 추천을 뿌리치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여행 찬양론자를 내심 미워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여행지가 좋아서 떠나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를 떠나고 싶어서 떠나기도 한다는 것을. 문제는 떠나야만 하는 기분이 분기마다 찾아온다는 점. 한편 팔로우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수는 배로 늘어났다. 쉬는 날 들어보고 싶은 원데이 클래스, 가보고 싶은 예쁜 카페와 힙해 보이는 예술 공간 등등. 자랑하기 위해 올린다고 생각했던 사진은 사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올릴 사진이 없어서 올리는 것이었더라. 물론 실제로 가본 곳보다 하트 누른 계정이 더 많지만.

 

어느 순간부터 닮고 싶은 사람보다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졌다. 닮고 싶은 사람은 재미있는 사람. 태도와 말이 일치하는 사람.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은 뻔하게 별로인 사람. 엄마의 어떤 모습들. 아빠의 어떤 모습들. 어른들의 어떤 모습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재미 없는 사람이었기에 지루하고 별로인 사람만 되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다짐 자체가 치기였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빠는 종종 가계부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화를 냈다. 아빠가 쪼잔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가사 노동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본가에 갔다가 엄마가 사들인 바구니들을 보고 다 모으면 얼마일까, 생각했고 조금 억울해지고 말았다. 언니에게 내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뺨을 때려 달라고 말했을 정도이건만, 하나 둘 결혼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결혼을 고민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졌다. 외롭고 지치고 피곤할 때 나를 최우선으로 여길 누군가가 필요한데 제 각기 가정을 꾸리고 서로의 최우선이 되자고 약속하는 주변을 보면 나도 얼른 내 짝과 보호자를 만나야 할 것만 같다.

 

 

솔직말_사진2 (2).jpg

              언스플래쉬

 

 

물론 이 모든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아빠는 화를 내는 대신 가계부를 함께 써보자고 제안했어야 하고, 드라마에선 갈등을 피하더라도 사회에서는 마주하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자꾸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고 만다. 배불러 보아야 배고팠다고 말할 수 있고 죽음 가까이 가본 후에야 살 것 같다는 말이 나오듯이 순수를 빗겨가며 비로소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 글 속 모든 말이 내가 그리도 싫어하던 ‘내가 조직 생활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로 읽힌다.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닮아 간다. 항상 타협이 나를 끌어안을 타이밍을 재고 있다. 난감하다.


보여주겠다
내가 어떻게 길을 잃는지

 

멈추고 싶은데 전진하는 것
나아가고 싶은데 정지하는 것
해저의 지느러미처럼
발목의 결심이 물거품 되는 것
바닥인 줄 알았는데 깊이
더 깊이 가라앉는 것

 

길을 놓친 발목들을 다 주워 먹고
사거리는 배가 부르다

 

앞서 택시를 탄 사람들이
어디든 당도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단지
다물어지지 않는 도형처럼
도착지로 향한 사람들은
영영 출발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죽으면서 동시에 성장하는 종족은 그렇다

 

창밖을 빠르게 지나가는 슬라이드쇼?
눈을 떼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본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내린다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모차에 누운 아기는
바퀴를 떠미는 손을 기다리며
웃고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드는 손을
기다리며 운다

 

태양의 엄지가 정수리를 꾹 눌러 나를 고정시킨다
나는 허공을 잡아당기며 겨우 한 걸음 걸었다

_ 유계영, 「잘 도착」,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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