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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은 맛으로 기억된다

내가 배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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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했다. 말려도 제멋대로 세상으로 나아가던 딸은 세상 풍파에 조금씩 꺾여 딸을 말리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2019. 04. 05)

이다혜 기자의 책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에는 "나 자신이 딸이었던 기억,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기억을 잃어가며 나이는 먹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이를 더 먹어 부양의 책임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지게 되면 다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기억'을 곱씹으며 나이를 먹나 보다. 부쩍 할머니 이야기를 자주 하는 엄마를 보면.

 

내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니 엄마가 결혼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대학교 1학년 때, 다시 말해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린 나이에 엄마는 당신의 엄마와 헤어졌다. 그러니 나는 할머니를 모른다. 엄마의 엄마로만 듣고 떠올려보았을 뿐. 내가 들은 엄마의 엄마는 멸치볶음을 맛있게 하는 분이었다. 너무 달지도 너무 짜지도 너무 딱딱하지도 않게 슥슥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는 계란찜에 소금 대신 새우젓을 넣었다. 딸에게 새우젓이 맛의 비결이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식혜도 꼬박꼬박 해 놓아 사 먹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식혜는 사 먹어도 계란찜에는 꼭 새우젓을 넣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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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엄마는 엄마의 엄마 이야기를 하며 자주 당신의 어리석음을 회고한다. 그중 하나가 할머니의 권유를 뿌리친 일이다. 당시 서울에 있는 미술대학교에 합격한 엄마에게 엄마의 엄마는 그냥 지방 교육대학교에 진학해서 미술 선생님을 하라고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딸을 강하게 말렸다. 그러나 스무 살의 정 모씨는 시골보다 더 큰 세계에 나가고 싶어 상경했고, 선망하던 의류회사 직원이 되었으나 결혼하여 나를 낳은 후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고…. 하여튼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게 왜 어리석은 일이냐며 짜증을 내지만, 그리고 실제로 젊은 엄마의 선택을 지지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한다. 엄마가 서울에 있을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엄마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엄마는 자주 아프고 자주 잠을 설친다. 예민하다는 말보다는 신경이 항상 곤두서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총구 앞에 선 토끼 같아서 함께 여행이라도 하려면 꽤 크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날씨부터 교통까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속해서 살펴야 하고 자주 멈춰야 하고 그보다 더 자주 나의 이기심을 마주해야 한다. (어떤 딸은 효녀이면서 동시에 불효녀일 수 있더라.)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할머니를 떠올린다. 조금 원망도 한다. 엄마 기억에 따르면, 엄마의 엄마는 딸에게 계란찜을 맛있게 만드는 방법은 가르쳐주었지만 영리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엄마에게 필요했던 건 영리하게 살아가는 방법보다도 영리하게만 사는 사람들 속에서 받은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이나 스스로 보듬을 방법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때문에 엄마는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자주 세상을 두려워하며, 그래서 세상과 다툴 엄두도, 세상에 나아갈 엄두도 못 내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 엄마에게 세계와 자주 싸우려 드는 내가 얼마나 외계인처럼 보일까. 얼마 전  『딸에 대하여』 를 읽으며 생각했다.  『딸에 대하여』 는 레즈비언 외동딸이 동성 연인과 함께 엄마 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소설 속 딸은 동성애 문제로 해고된 동료를 위해 말하고 행동하면서 생계를 위협받는다. 엄마는 생각한다. 딸이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한 탓에 배울 필요 없는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까지 배웠다고. 공부를 괜히 더 시킨 걸까, 고민하는 소설 속 ‘나’에게서 엄마를 본다. 부끄럽게도 나는 사회에 순응적인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내게 종종 하는 말이니까. 그리고 서울 가길 말렸던 엄마의 엄마를 떠올렸다. 묘했다. 말려도 제멋대로 세상으로 나아가던 딸은 세상 풍파에 조금씩 꺾여 딸을 말리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직 제멋대로인 딸은 소설 속에서 제멋대로 엄마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아프게 깨달았다. 이대로 딸애를 계속 당기기만 하면 결국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끈이 끊어지고 말겠구나. 이대로 딸을 잃고 말겠구나. 그러나 그게 이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쥐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푼 것뿐이다. 딸애가 조금 더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양보한 것뿐이다.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또 무언가를 버리고 계속 버리면서 물러선 것뿐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딸애는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른 척하는 걸까. 모르고 싶은 걸까. _김혜진,   『딸에 대하여』  (68쪽)

 

오랜 시간 나는 엄마에게 사랑에는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엄마는 내게 사랑하니까 끼어드는 거라고 말했다. 튕겨 나가는 나를 보고 엄마는 별안간 내게서 물러섰다. 그러면서 우리 사이는 보다 부드러워졌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딸은 ‘제멋대로’가 미덕인걸. 엄마도 엄마는 처음이지만 자식은 해보았을 테니. 나는 별안간 모른 척 눈을 감는다.

 

 

솔직말_사진2 동백.jpg

             언스플래시

 

 

며칠 전 지난 해에 들여온 겹동백 나무가 한 뼘 더 자라 빨갛고 보드라운 꽃을 피웠다. 꽃이 피자 엄마는 화분을 집안에 들였다. 며칠 후에는 마루로 들여 놓은 동백 나무를 보더니 집안이 따뜻해 일찍 지는 것 같다며 다시 화분을 베란다에 내놓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엄마가 동백꽃을 보기 위해 아직 쌀쌀한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어디든 꽃 곁으로 가는 엄마를 보고 깨달았다. 엄마는 꽃을 사랑한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가 마당에서 꽃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렸다. 할머니도 꽃을 좋아해 마당에 여러 꽃을 심었다고 했다. 엄마는 상처를 보듬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배운 듯했다. 엄마에게 『딸에 대하여』 를 쥐어 드린다. 제멋대로여도, 조금 거리가 있어도 곁을 내어드리고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다.

 

지난 주 엄마 생신에 엄마와 맛있는 밥을 먹으며 엄마의 엄마에게 ‘엄마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인사를 올렸다. 계란찜 속 새우젓처럼, 동백꽃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처럼, 엄마의 엄마가 나눈 사랑이 전승되어 내게 닿았다고 생각하곤 한다. 불완전할지라도 불안하지 않은 사랑. 그래서 자주 어그러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계란찜에 새우젓을 넣는 사람이 되었고 그 계란찜은 왕왕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내가 배운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그 맛은 조금 짭조름할 것 같다.


 

 

딸에 대하여김혜진 저 | 민음사
성소수자, 무연고자 등 우리 사회 약한 고리를 타깃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날선 언어와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구현하며 우리 내면의 이중 잣대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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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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