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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낙태의 죄’를 넘어

다큐멘터리 영화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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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은 언제까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통제를 받는 ‘배틀 그라운드’여야 하는가.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2020.10.26)

영화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의 한 장면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려 애쓰던 중산층 주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오랫동안 염원해온 파리행을 앞두고 셋째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절망에 빠진다.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을 내심 내키지 않아 하던 남편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부인이 사둔 낙태 기구를 발견하자 크게 화를 내고, 결국 시술 가능 시기를 넘긴 뒤에야 혼자 무리하게 낙태를 시도하던 에이프릴은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당시 미국 대부분 주에서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역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텍사스주의 한 여성이 부당한 시스템에 반기를 들었다.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제인 로’라는 가명으로 불린 이 여성은 강간이나 근친상간 등에 의한 임신, 임부의 생명이 위협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낙태를 금지하는 텍사스 법률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댈러스 지방 검사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7대 2로 제인 로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리며 임신 27주까지의 낙태 권리를 인정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는 바로 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무력화하기 위한 낙태반대론자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정치 공작과 언론 플레이, 그리고 테러 행위를 그린 작품이다. 

생명과 도덕, 영혼의 소중함을 말하는 낙태 반대론자들이 임신부와 의료인의 삶을 빼앗는 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1980년대 중반, 가톨릭이 낙태반대 운동에 개입하면서 자칭 ‘구원대’라는 조직이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을 점거하고 폐쇄하기 시작했다. 여성, 의사, 경호원이 살해되었고 30년 가까이 폭탄 공격과 총격, 협박에 시달리던 의사 조지 틸러는 2009년 결국 피살당했다. 낙태에 관한 입장은 공화당의 주요 선거 전략으로 쓰였고 미국 대통령 선거 때마다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기 좋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의 공식 포스터


앞서 소개한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 필리스 슐래플리 역시 로널드 레이건이 출마한 80년대 중반 낙태반대 선동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낙태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선거에서 승리한 지역마다 낙태는 어려워졌다. 재정 지원이 끊기고 규제가 늘어나며 낙태 시술 병원이 줄어들었고, 낙태 시술 전 환자에게 초음파 사진을 보여줘야 한다는 법까지 생겼다. 2019년,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텍사스주 와스콤시 의회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사실상 로 대 웨이드 판결 이전으로 돌아간 셈이며 낙태 반대 세력의 목표는 이러한 법안들을 가지고 연방대법원으로 가는 것이다. 때마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월 말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낙태에 반대하는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지명하면서 ‘제인 로 케이스’가 뒤집힐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어렵게 한 발 앞으로 나아갔던 세계가 집요하고 교묘한 공작에 의해 점점 후진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이 작품에서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 있다면 미주리주의 산부인과 의사 콜린 맥니콜러스다. 낙태 가능한 병원이 점점 줄어드는 바람에 매주 홀로 장거리 출장을 다니는 그는 출근할 때마다 낙태 반대론자의 비난을 듣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자궁절제술처럼 낙태가 필요한 여성에게 기본 진료를 제공하는 것이 의사로서 당연한 책무라고 믿는다. 낙태 ‘반대’나 ‘찬성’ 법이 아니라 과학에 기초한 의료법이 필요하며 이것은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는 콜린의 말은 낙태죄 전면 폐지에 제동이 걸린 지금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여성의 몸은 언제까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통제를 받는 ‘배틀 그라운드’여야 하는가.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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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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