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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칼럼] 도대체 뭘 쓰지?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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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렵고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뭘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지금 당장 내가 고민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자. (2020.11.03)


글을 평소 꾸준히 쓰는 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가 이제 글 좀 써봐야지 마음먹은 이들이 난감해하는 게 하나 있다. ‘도대체 뭘 쓰지?’ 사실 이 질문은 평소 꾸준히 글 쓰는 사람들도 제법 자주 한다. 글 써서 생계를 이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절실한 질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러하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마감 날짜를 어기지 않고 ‘채널예스’ 연재 기고문을 써야 하는데, 이번 달에는 도대체 뭘 쓰지?

시인 말라르메도 그런 상황을 제법 경험했나보다. 쓸 내용이나 아이디어가 통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는 상황,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일종의 절필감을 말라르메는 ‘백지(白紙)의 공포’라 말했다. 이른바 ‘작가의 벽(writer’s block)’이다. 요즘엔 원고지에 펜으로 글 쓰는 사람이 드무니, 컴퓨터 모니터에서 입력을 기다리며 깜빡거리는 ‘커서의 공포’라 할까. 글 쓰는 도중에 갑자기 발생하기도, 글쓰기에 착수하면서부터 생기기도 하는 치명적 공포다.

이 두렵고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뭘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지금 당장 내가 고민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자. 예컨대 나는 지금 <월간 채널예스> 연재 기고 이번 달 마감이 임박했는데 뭘 써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던 끝에, 바로 그 고민을 주제 삼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내 삶과 일상의 고민과는 별도로 ‘글을 쓰기 위한 주제’를 고민하지 말고, 지금 내 삶과 일상의 고민을 글감으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다시 내 얘기를 해보면, 쉰 살 넘어선 나에겐 ‘늙어간다는 것’이 지금 아주 큰 삶의 주제다. 하여 노년을 주로 다룬 문학 작품, 미술 작품, 에세이 등등을 자주 찾아본다. 로마노 과르디니의 『삶과 나이』(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나 고대 로마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오흥식 옮김, 궁리) 같은 책에 자꾸 눈길이 간다. 노년에 관한 이런저런 실용서에도 예전과 다르게 관심이 간다. 눈길 가고 관심 간다는 건 나에게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런 걸 쓰면 된다.

둘째, 지금 당장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기억과 경험을 떠올려보자. 여행에 관한 추억이어도 좋다. 누군가와 헤어졌던 아픈 기억이어도 좋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에 관한 회고여도 좋다. 두 바퀴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타게 된 첫 순간의 뿌듯함이어도 좋다. 유달리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지나간 날의 소소하거나 대단한 경험 가운데 그 무엇이라도 좋다. 기억과 경험은 아무리 캐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글감 창고다.

오래전 기억일 필요도 없다. 어제나 오늘 겪은 일이어도 좋다. 기억과 느낌이 더욱 생생할 테니 글도 더욱 생생해질 수 있다. 덧붙이면,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 자전적이다.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산책) 여기에 다시 덧붙이면 ‘모든 자서전은 소설이다.’ 요컨대 나의 삶, 내 경험이 우선이다.

셋째, 관찰과 호기심이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작가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뭐든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든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는다. 글감 찾으려 일부러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관찰한다. 관찰은 작가의 본능, 제2의 천성이다. 관찰한다고 뭔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한다는 게 아니다. 슬쩍 보더라도 물음표와 느낌표를 띄우면서, 그러니까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본다.



그런데 이 관찰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억지로 될 리 없다. 관찰의 바탕은 관심이고, 이때의 관심이란 호기심이다. 소설가든 기자든 카피라이터든 글 써서 먹고사는 모든 직업, 직종에서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 호기심이다.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라면 일단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질을 갖춘 셈이다. 꼭 그런 건 아닐 테지만 글 잘 쓰는 사람이 책도 많이 읽는다면, 그것은 왕성한 호기심을 독서로 풀기 때문일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대체로 비례한다. 쓰기 없는 읽기는 불 꺼진 등대가 되기 쉽고, 읽기 없는 쓰기는 단팥소가 빠진 단팥빵이 되어버릴 수 있다. 도대체 정말 뭘 써야 할지 모르겠거든 뭐라도 좋으니 일단 읽는 것이 일종의 응급처방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고 글감의 실마리는 읽은 것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뭐라도 읽어야 뭐라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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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표정훈(출판 칼럼니스트)

출판 칼럼니스트, 번역가,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쓴 책으로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의 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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