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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11월 우수상 - 24년 전 시작된 이야기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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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가 진짜 나인 것 같아. 글에는 내 마음, 내 목소리, 내 이야기가 있거든.” (2020.11.04)

언스플래쉬

“네가 쓴 글은 참 따뜻해서 좋아.”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사랑의 편지 쓰기 대회가 열렸다. 5월이면 매년 하는 행사였고, 그때 누구에게 편지를 썼는지, 어떤 내용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24년이 지나도 최우수상이 적힌 상장을 건네면서 선생님이 하신 이 말씀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음향이 녹음되지 않은 옛 흑백 영상처럼 단조로운 몇 개의 이미지로 설명된다. 그것은 도서관 1층 어린이 코너에서 책등을 유심히 훑는 내 발걸음과 이불 속에서 책을 보다가 불도 끄지 못하고 잠든 수많은 밤의 연속이었다.

그래, 그때였다. 엄마는 목욕을 하면서 내 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엄마가 데려간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막 꿈틀대기 시작한 지렁이 같은 모양의 척추가 찍혀 있었다. 동네에 있는 몇 개의 병원을 거쳐 대학병원에 갈 때까지 여러 의사를 만났다. 모두 같은 이야기를 했다. 척추측만증은 지금 손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성장할수록 심해지기만 할 뿐 좋아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때, 나는 말을 잃었다.

친구와 노느라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던 동생과 달리 나는 엄마가 밖으로 내쫓을 정도로 책만 봤다. 척추가 계속 휘어지다가 심해지면 수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더 내성적이고 소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책 속으로 도망을 갔다.

5학년 때 이강신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00초등학교장’이 찍힌 상장보다 ‘담임 이강신’이 찍힌 상장을 더 많이 주셨다. 발표를 잘해서, 축구를 잘해서, 청소를 잘해서.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상장을 받았다. 작년까지 받은 상이라곤 개근상뿐이었던 나는 선생님이 주신 상장을 보며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인식을 처음으로 했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내가 쓴 거의 모든 글에 상장을 주셨다.

글을 쓰면서 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글은 신중하게 고르고 다듬어서 이만하면 남들에게 보여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때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을 잃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글이었다. 표현하지 않던 내가 표현하게 되면서 해방감을 느꼈다. 선생님은 책 속에 있던 나를 꺼내와 글 쓰는 나로 바꿔주셨다.

의사는 휘어진 각도가 40도가 넘으면 수술을 고려해 봐야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이제 성장이 멈추었으며 더 이상 측만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흉추의 각도가 35도쯤이었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자랐던 나는 그제야 내 형량이 끝났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성장이 멈춘 후에도 나는 글로 말하며 자라왔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막막했다. 하얀 종이를 마주하고 앉을 때면 깊은 숲속 한가운데 홀로 떨어져 방향을 잃은 아이가 되곤 했다. 백일장에 제출한 내 작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느적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건 선생님과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1년 동안 받았던 격려는 글을 쓸 때마다 나에게 힘을 준다.

어렸을 때는 몰랐다. 그냥 상장이 좋았다. 친구들이 쳐주는 박수와 부모님의 칭찬이 나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회에서 입상을 해서 기쁠 때에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은 허전했다. 내 글을 유심히 읽어보고 웃어주던 선생님이 그리웠다. 네 글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글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진짜로 나를 알아봐 준 것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빛이 바랜 상장에 먼지가 쌓여 있어도 선생님 말씀은 마음에 남아 나를 빛나게 해준다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실까?

8살 딸이 묻는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어.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엄마는 작가가 되고 싶었어.”

“왜 작가가 되고 싶었어?”

“글을 쓸 때가 진짜 나인 것 같아. 글에는 내 마음, 내 목소리, 내 이야기가 있거든.”

‘되고 싶었어’는 ‘되고 싶어’로 아직도 유효하다. 오늘 아침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는 말을 믿는다. 아이가 잠든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선생님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 나에게 말을 찾아준 선생님을, 나를 나로 살아가게 해 준 선생님을.


김환희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을 때 행복합니다. 13년차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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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환희(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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